그 사람은 나를 더 이상 기다리게 하지 않았다

기다리지 않아도 오는 사랑이 있다. 그건 떠나지 않겠다는 약속이다.

by 단여름

언젠가부터, 나는 그를 기다리지 않게 되었다.


처음엔 늘 내가 기다리는 쪽이었다. 답장을 기다리고, 만남을 제안하고, 마음의 문이 열리기를 바라며 한없이 문 앞에 서 있었다. 나만 손을 뻗는 것 같았다. 어느 순간부터, 그가 먼저 나를 향해 걸어오기 시작했다. 마법처럼 한 번에 바뀌진 않았다. 우리의 첫 고비인 1년쯤 되던 날이 변화의 시작이었다. 나는 회피 성향을 가진 그에게 꾸준히 말했다. 감정은 표현해야 하고 갈등을 피해선 안 된다고. 하지만 바뀔 기미는 대개 보이지 않았다. 여느 때처럼 다툰 뒤, 그가 다시 침묵으로 돌아갔고 나는 실망에 가득 차 안방으로 들어갔다. 그는 몇 분간 거실에 홀로 앉아 있었다. 그러다 슬그머니 내가 있는 방으로 들어와, 아무 말 없이 침대에 가만히 앉았다. 그가 처음으로 내게 먼저 다가온 날이다. 벅차오르는 감정을 주체할 수 없었다. 그는 말없이 내게 다가왔다. 작지만 깊은 그 행동 하나에, 갈등을 풀고 싶다는 그의 의지와 나를 향한 사랑이 담겨 있었다.


그 작은 움직임을 시작으로, 그는 멈추지 않고 자라나기 시작했다. 처음엔 쥐죽은 듯 조용하던 그가 내게 말을 걸었고, 곧 대화를 이어가며 자신의 감정을 표현할 수 있게 되었다. 무엇이든 처음은 항상 어렵다. 그도 처음 해보는 행동과 말이 서투르게 나오기도 했다. 어색한 표정을 감추지 못한 채, 정돈되지 않은 감정을 날카로운 말로 내게 쏘아냈다. 처음에는 적응이 되지 않아서 거기에 함께 동요하기도 했다. 조금씩 시간이 흐르며 그의 행동과 말투의 본뜻을 느낄 수 있었다. 그 말투와 표정 속에는, 나를 사랑한다는 고백과, 부디 떠나지 말라는 애원이 조용히 깃들어 있었다.


기다림은 ‘사랑받고 싶은 사람’의 언어이고, 다가섬은 ‘사랑하겠다는 사람’의 언어일 것이다. 나는 언제나 사랑받고 싶은 사람이었다. 손을 먼저 내밀고, 문이 열리길 기다리고, 그가 나를 선택하길 바라는 사람. 회피하는 그의 등을 보며 내 감정을 삭히는 기다림이 나의 사랑 방식이었음을 깨달았다. 그러나 그는, 어느 날 처음으로 내게 걸어왔다. 침묵했지만, 방 안으로 들어온 그 조용한 발걸음은 명확한 신호였다. ‘나는 네 곁에 있고 싶어’라는.


사랑이 깊어지면 마음의 무게 중심이 달라진다. 예전엔 불안이 나를 움직였지만, 지금은 신뢰가 나를 쉬게 만든다. 기다림은 누군가를 잃을까봐 불안한 사람의 언어고, 다가섬은 머물겠다는 사람의 언어다. 나는 알게 되었다. 사랑은 더 많이 기다리는 쪽이 지는 싸움이 아니라, 더 먼저 다가가는 사람이 이기는 약속이라는 것을.


심리학자 브레네 브라운(Brené Brown)은 이렇게 말했다.

“우리는 본능적으로 연결을 원한다. 연결은 인간 존재의 이유이며, 삶의 의미다.”


그날, 그는 비로소 나와 연결되기를 택했다. 말은 없었지만, 그 안에 있던 마음은 분명했다. 그의 움직임 하나하나에 두려움과 용기가 겹쳐 있었고, 나는 그것을 놓치지 않고 느꼈다. 누군가의 진심은 언제나 목소리가 아니라 움직임으로 드러나니까.


"인간은 사랑을 통해 안정과 안전을 느끼며, 중요한 타인과의 정서적 접근이 유지될 때 비로소 안심한다."


애착 이론의 창시자 존 볼비(John Bowlby)가 남긴 하나의 격언이다. 그가 내 곁에 조용히 앉아 있었던 그날, 우리는 서로의 ‘안전기지’가 되기 시작했다. 처음의 그가 감정을 말하는 데 서툴렀던 이유는, 표현의 언어를 배워본 적 없기 때문이었다. 내게 다가오는 일, 감정을 말로 전달하는 일, 갈등을 피해 숨지 않고 함께 마주 보는 일. 모두 그에겐 처음이었다. 처음인 사람에게 중요한 건, ‘완성된 말’이 아니라 ‘도착하려는 의지’다. 그가 내게 보인 모든 불안하고도 날것인 말들은 결국, 내 곁에 머물겠다는 뜻이었다.


진짜 사랑은 내가 얼마나 사랑받고 있는가보다, 상대가 어떻게 사랑을 배워나가는가를 지켜보는 일인지도 모른다. 나는 이제 더 이상 그를 기다리지 않는다. 그는 더 이상 나를 기다리게 하지 않기 때문이다. 사랑을 배운 사람은, 사랑을 표현하는 사람이 되기 때문이다. 사랑은 늘 표현을 기다리는 감정이었다. 이제 나는 표현이 아니라 ‘의지’를 본다. 나를 붙잡으려는 마음이 있는지. 그 마음이, 시간이 지나도 나를 향하고 있는지를. 우리는 모두 누군가의 발걸음을 기다리며 문을 연다. 하지만 진짜 사랑은, 스스로 문을 열고 들어올 때 시작된다.


나는 긴 기다림 끝에 알게 됐다. 사랑은 말이 아니라, 망설이며 다가오는 발걸음으로 말해지는 것임을. 그날 이후 그는 말없이 나의 세상으로 걸어 들어왔다. 그는 이제, 내가 오래도록 서 있었던 그 자리에, 스스로 걸어 나와 서 있다.


그리고 나는, 그 자리를 떠나도 더 이상 외롭지 않다.

금요일 연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