퀵퀵 슬로우, 차차차!
살면서 순수하게 좋아하는 것을 위해 모든 걸 쏟아붓고 도전해 본 경험이 있는지. 결과와 상관없이 머릿속에 무언가 하나 떠오른다면, 이 다큐멘터리에 마음을 뺏길 수밖에 없을 것이다.
<땐뽀걸즈>는 거제여상의 댄스 스포츠 동아리 ‘땐뽀반’의 학생들과 담당 교사가 경진 대회에 도전해 입상하는 과정을 담은 다큐멘터리이다. 하지만 이 작품이 그저 춤에 관한 이야기만을 담고 있는 건 아니다. 원래 제작진은 지역 경제를 책임지던 조선업이 쇠락하는 현장을 담기 위해 거제도를 찾았다고 한다. 당시 거제의 조선소들은 구조조정 중이었고, 그 여파는 학생들의 일상에까지 깊이 스며들어 있었다. 삼성중공업에서 운수업으로 직종을 바꾼 아버지는 딸이 왜 직업을 바꿨냐는 물음에 선뜻 답하지 못한다. 다른 일을 해보고 싶었냐는 딸의 말에 애써 웃을 뿐이다. 평생을 바친 일을 잃고 새로 음식점을 차리기 위해 딸을 거제에 남겨둔 채 서울 조리학원으로 떠나는 아버지도 있다. 땐뽀걸즈의 이야기에는 거제 노동자들의 얼굴들이 함께 녹아있다.
같이 있으면 세상 밝게 웃던 소녀들에겐 또 다른 얼굴들이 있다. 부모 없이 친구와 함께 월세를 내며 살아가는 아이, 동생들을 책임지고 돌봐야 하는 아이, 가족과 떨어져 살아야 하는 아이. 학교 생활은 무의미해진 지 오래고, 저마다의 무거운 가정환경이 있으며, 상권이 무너진 도시는 침침하다. 다큐멘터리는 불온한 환경에서도 춤을 놓지 않는 소녀들을 감정에 치우치지 않고, 묵묵히, 수평적으로 관찰한다. 마치 친구처럼, 곁에서.
자이브와 차차차를 추는 열여덟 소녀들은 만년 9등급, 초특급 스피드로 시험 문제를 찍고 꿀잠 자는 학생들이다. 사회에서 그 나이대 아이들에게 요구하는 성적과 성실한 학교 생활이 이들에겐 무의미한 것들이다. 또래 아이들보다 일찍 사회에 내던져진 이 소녀들에게 학교와 가정 역시 온전한 울타리가 되어주진 못한 채 하루하루가 흘러간다.
그런 소녀들 앞에 이규호 체육 선생님이 나타난다. 댄스와 함께.
이규호 선생님은 참 특이하다. 전 날에 술을 마셔 힘들어하는 학생에게 숙취음료를 건네는 선생님이 몇이나 있을까. 검정 신발을 신고 춤추고 싶다는 학생의 신발을 마카로 칠해주는 선생님, 동생들에게 누나 역할 하라며 손에 빵을 사 들려 보내는 선생님. 아이들의 울타리가 되어주며 ‘땐뽀’라는 도전을 해낼 수 있도록 옆에서 함께 걷는 선생님.
내가 학교에서 제일 웃는 시간이 뭔지 아나? 체육 시간에 춤출 때가 제일 재밌다. 엄청 재밌어. 근데 엄청 힘들어
도대체 땐스가 뭐길래. 이규호 선생님과 아이들은 이토록 춤에 헌신하고, 울고, 웃으며 매달리는 걸까. 까놓고 말해서 이 춤이 뭐 대학을 보내주는 것도, 취업을 시켜주는 것도 아닌데 말이다.
댄스를 통해서 학교 재밌게 다니는 애들 많다 아이가. 언젠가 아줌마가 되면 생각 안 나겠나. 자이브 애들 가르쳐 줘야지. 재밌다 아이가.
의미를 잃어버린 학교에, 땐스는 작지만 분명한 의미로 남는다. 땐스를 통해 아이들은 작은 사회를 경험한다. 목표를 세우고, 그 목표를 위해 최선을 다해 노력하며, 때로는 갈등과 위기도 있었지만, 동료들과 함께 협력해 목표를 성취해 내는 경험. 이규호 선생님은 땐스를 통해 아이들에게 그런 경험을 안겨준다.
수많은 삶의 모습이 있듯 모든 학생들의 정답이 성적과 대학은 아니다. 누군가에겐 취업이, 누군가에겐 꿈을 좇는 것이, 누군가에겐 포기하지 않고 살아내는 것이 자신의 정답이다. 그래서 이 아이들의 ‘땐뽀’는, 그 자체로 빛나는 기록이자 도전이다. 무거운 삶 앞에서도 한 발 나아가는 법을, 선생님은 아이들에게 보여주었다. 무언가를 끝까지 해본 경험은 분명 삶의 어딘가에서 그들을 지켜줄 것이라고 생각한다.
조금 과할 정도로 쨍한 색감과 할레이션 효과는 왜인지 모르게 이들의 청춘이 판타지에 머무를 것 같다는 생각이 들게 한다. 드라마로 따지자면, 따듯하고 아름다운 해피엔딩이 펼쳐질 것 같은 느낌. 그러나 춤 하나로 이들의 인생에 구원되진 않는다. 이건 드라마가 아니라 현실이니까. 여전히 해는 넘어가고, 삶은 이어진다. 인생에서 힘들고 버거운 일들은 계속 있겠지만, 그럼에도, 이 소녀들은, 끝내 무너지지 않을 하나의 주문을 얻지 않았을까. 완뚜쓰리뽀 앤 완뚜쓰리뽀, 퀵퀵 슬로우 차차차!
인생에 이런 끝내주는 경험 하나가 있다는 게 부러워진다. 이 다큐멘터리가 마치 언제든 꺼내볼 수 있는, 다시 힘나게 하는 예쁘게 보정된 기억처럼 느껴지기도 한다.
물론 음악의 사용이 다소 감상적인 부분은 있지만 다큐멘터리는 최대한 담담한 시선으로 이야기를 들여다본다. 그럼에도 중간중간 눈물이 왈칵 나는 이유는 이들의 모습이 순수해 보여서였을까. 아니면 무언가를 순수하게 좋아했던 내 모습이 떠올랐을까. 다큐멘터리에 나온 여러 정보들을 조합해 보니 땐뽀 걸즈 학생들이 나와 동갑이더라. 열여덟이던 이 친구들은, 이제 어느덧 스물일곱이 되었겠구나. 동갑내기인 이 친구들에게 더욱 마음이 간다. 지금 어떤 삶을 살아가고 있든, 자신만의 정답을 향해 나아가고 계시기를, 그리고 행복하시기를. 응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