로마 서민들의 보금자리
로마 서민들의 보금자리
’ 트라스테베레(Trastevere)를 가보지 않았다면 로마에 갔었다고 할 수 없다.‘ 우연히 이런 글을 보기 전까지 솔직히 말하면 트라스테베레가 로마의 어디쯤 붙어 있는지도 몰랐다. 이번에 트라스테베레에서 굳이 하루를 자려는 이유는 트라스테베라가 궁금하기도 하고 테르미니역 주변의 번잡함에 진절머리가 났기 때문이기도 하다.
민박집 주인이 전차를 타라고 알려주지만, 지도를 들고 트라스테베레 가(Viale trastevere)를 걷는다. 걷는 것만큼 좋은 구경이 또 있을까? 꽤 세월의 자국이 있는 현대식 아파트 건물과 상점들이 늘어선 대로를 따라 걷는데 도무지 여기가 로마라는 생각이 들지 않는다. 한마디로 트라스테베레는 로마의 서민 동네이다. 로마 시내를 꾸불꾸불 S자 모양으로 관통하는 테베레(tevere) 강 건너(tras)라는 뜻이니 말하자면 달동네인 셈이다. 그래서 이 지역은 로마 시대부터 기독교도나 유대인, 가난한 사람들이 모여 사는 서민들의 보금자리였다. 늘 관광객으로 붐비는 화려하고 복잡한 로마 시내와는 그 분위기가 완전히 다르다.
복녀 루도비카의 환희
부스스 내리는 비를 맞으며 30여 분을 걸어 제일 먼저 찾아간 곳은 산 프란체스코 아 리파 교회(Chiesa San Francesco a Ripa). 현지인들도 잘 모르는 이 작은 교회를 찾아간 이유는 단 한 가지이다. 베르니니(Bernini)가 있기 때문이다. 이 교회의 '복녀 루도비카의 환희'가 산타 마리아 비토리아 교회의 '성 테레사의 환희'만큼 알려지지 않은 이유는 이런 후미진 곳에 있기 때문인가? 유자와 미사노브는 그의 책 <바로크건축>에서 서두를 이렇게 시작한다. '로마의 트라스테베레 지구, 관광객들도 찾지 않는 작은 교회 산 프란체스코 아 리파(San Francesco a Ripa)에 가난한 사람들을 위해 헌신한 덕행으로 복녀의 칭호를 받은 루도비카 알베르토니(Beata Ludovica Albertoni)의 조각상이 있다. 죽음에 대한 고통의 인간적 번민일까? 신과 합일하는 순간의 신비스러운 기쁨일까? 루도비카는 관능적일 정도로 가슴에 손을 얹고 더없이 행복한 표정을 하고 누워 있다.'
교회당 안은 텅 비어 있다. 나를 포함해 미국서 온 듯한 젊은 여성 2명이 베르니니 앞에 서 있을 뿐이다. 어두운 조명에다 사진 촬영 금지표시까지 붙어 있어 10여 분간 묵상하듯 그 앞을 서성거리다가 나온다. 조각의 아우라가 <성 테레사의 환희>와 무척 유사하다. 베르니니 말고 이런 황홀한 순간을 누가 또 조각할 수 있을까? 그저 감탄스러울 뿐이다.
다시 큰길을 건너 찾은 곳은 산타 체칠리아 인 트라스테베레(Santa Cecilia in Trastevere) 교회. 트라스테베레에서 가장 유명한 장소이다. 3세기 경에 처음 지어진 이 교회의 지금 모습은 12세기에 재건된 것이다. 이 교회의 특별함은 로마 시내의 화려한 바로크 교회와 다름에 있다. 내외부가 모자이크로 장식된 보기 드문 중세교회의 모습이다. 주위 건물들 틈에 가려져 있어 멀리서 잘 보이지 않는다. 갑자기 불어난 사람들을 따라 좁은 골목길을 걸으니 널따란 광장이 나온다. 광장 가운데 8 각형의 중세 스타일 분수가 물을 뿜고 있고 그 앞에 황금색 모자이크 파사드가 돋보이는 중세교회가 종탑을 이고 서 있다.
교회 안을 들어서니 양 옆으로 늘어선 22개의 로마 시대 석주가 사람을 압도한다. 제대 뒤의 예수와 성모 마리아가 새겨진 화려한 비잔틴양식의 모자이크가 더욱 사람을 놀라게 한다. 교회 입구의 한 수사 석고상 발아래에는 수많은 소원 편지가 쌓여 있고 머리를 조아리며 기도하는 사람도 보인다. 그 내용들이 무엇일까 사뭇 궁금하다. 설마 우리 아이 좋은 대학 가게 해 달라는 소원은 아니겠지? 그리고 제대 아래에는 산 크리스토 카타콤베에서 본 진짜 성녀 세칠리아의 조각이 보인다. 이 교회는 그녀를 기리기 위해서 특별히 건축된 교회이다.
트레스테베레의 저녁 풍경
교회 문을 나서니 비는 이미 그쳤지만 하늘의 먹구름 때문인지 주위는 벌써 어둠이 깔리기 시작한다. 좁다란 골목길에 늘어선 작은 식당과 상점들이 비 맞은 야외 테이블들을 다시 세트하고 불을 켜기 시작하니 갑자기 거리는 생기가 돌고 골목 분위기가 낮과는 영 딴판이다. 언제 나타났는지 골목길은 사람들로 차기 시작한다. 좁은 골목길마다 아기자기하게 장식한 식당들과 고서점, 조그만 식품 가게와 카페들이 하나씩 불을 밝히고 손님을 부른다. 내다 붙인 가격표가 어디 한 곳 부담스럽지 않다.
어둠이 깔린 테베레 강변의 산 벨(San Bell)에 이르니 새때의 무리가 강 하늘을 가리며 군무를 추고 있다. 동양의 귀한 손님이 왔다고 반기나? 아니면 매일 저녁 추는 춤인가? 가리발디 다리에 서니 사진으로만 보던 여의도 밤섬 같은 티베리나 섬(Isola tiberina)이 발아래 보인다. 저 멀리 테베레강 위에 펼쳐지는 로마의 석양은 왜 이리 또 아름다운가? 사람들이 왜 저녁에 트라스테베레로 몰려오는지 이제야 이해가 된다. 일요일마다 열린다는 포르타 포로테제(Porta Portese)의 벼룩시장은 또 어떨까? 로마 시내에서는 꿈도 못 꿀 여유와 낭만과 아늑함이 여기에는 있다. 여태껏 본 로마가 값비싼 화장품으로 화려하게 치장된 꾸며진 얼굴이라면 트라스테베레는 있는 그대로의 로마의 민얼굴이다. 누군가 로마는 파고 또 파도 계속 나오는 보물단지 같다고 하던데, 새로운 로마를 발견하는 기쁨이 이런 것일까? 다음은 어떤 로마가 기다리고 있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