베르니니의 <성 테레사의 환희>
숙소를 체크아웃하고 기차 시간까지 딱 3~4시간의 여유가 있다. 무엇을 할 것인가? 나는 지도를 챙겨 들고 먼저 산타 마리아 델라 비토리아 교회(Chiesa Santa Maria della Vittoria)로 향한다. 베르니니(Bernini)의 <성 테레사의 환희>를 보기 위해서다. 비토리아 교회는 테르미니역에서 도보로 5분 정도 거리에 있다. 교회가 작아서 금방 눈에 안 들어온다. 지나가는 사람에게 물었더니 유창한 영어로 따라오란다. 그러면서 나더러 묻는다. 그 교회에는 왜 가냐고. 베르니니의 <성 테레사의 환희>를 보러 간다고 하니 등잔 밑이 어둡다고 매일 그 앞을 지나다니면서도 그 안에 베르니니가 있는 줄 몰랐다고 한다. 이른 시간이라 그런지 평범하게 생긴 교회에는 입구의 집시여인 외에는 아무도 없다. 청소부가 청소를 하고 있는 약간 어둠 컴컴한 교회 안을 들어서니 제단 왼쪽 코르나로 예배실에 그 유명한 베르니니의 걸작 <성 테레사의 환희>가 보인다.
이 작품은 16세기 스페인의 수녀 테레사의 꿈 이야기에서 비롯된다. 꿈에 나타난 한 천사로부터 황금 창으로 찔림을 받고 육체적 고통과 함께 말할 수 없는 영적 환희를 느꼈다는 테레사 수녀의 신비로운 체험의 순간을 표현한 베르니니의 걸작품이다. 너무 관능적이라고 해서 지금까지도 말도 많고 그래서 더욱 유명한가 보다. 유감스럽게도 조각이 높이 위치해 성 테레사의 표정을 자세히 보기는 어렵다. 미술사학자 사이먼 샤먀(Simon Schama)는 BBC 다큐멘터리에서 이 작품을 <바로크시대 가장 극적이고 대담한 사건>이라고 말한다. 과연 베르니니가 테레사 수녀의 순수한 영적 환희를 그린 것인지, 아니면 성적 도취감을 표현한 것인지, 해석은 자유이다.
산타 마리아 델라 비토리아 교회를 나온 후 9월 20일 거리(Via XX Settembre)를 따라 300여 m를 내려오니 자그마한 사거리 모서리에 4개의 고색창연한 바로크 분수가 있다. 좌측 모서리에 산 카를로 알레 콰트로 폰타네 교회(Chiesadi San Carlo alle Quattro Fontane)가 보인다. 교회 이름에 '4개 분수(alle quattro fontane)'가 들어 있는 것은 다 이유가 있구나. 자그만 교회 건물 파사드의 물결치듯 움직이는 흐름만 봐도 교회가 베르니니와 쌍벽을 이루던 바로크 시대 천재 건축가 보로미니(Borromini)의 작품임을 짐작할 수 있다. 이 작은 교회는 한 때 베르니니 밑에서 가난한 석수로 일하던 바로크 최고의 건축가 보로미니의 천재성을 여실히 보여주는 건물이다. 보로미니가 살아 있을 때도 이미 널리 알려져 유럽 각국에서 이 교회를 보기 위해 수많은 사람이 몰려왔다고 한다.
보로미니의 교회
교회 내부는 좁고 침침하다. 화려하고 장엄한 큰 교회당들과 비교하면 변소간(?) 정도로 소박하다. 그러나 고개를 올려 돔을 쳐다보는 순간 탄성이 절로 난다. 또 하나의 보로미니 스타일이 거기 있다. 비둘기를 가운데 둔 단순하면서도 정갈한 8 각형의 기하학적 무늬를 한 돔은 입체감으로 충만하고 성스럽기조차 하다. 나는 왠지 베르니니(Bernini)보다는 보로미니에 더 호감이 간다. 베르니니의 현란함보다는 보로미니(Borromini)의 간결하고 정갈함이 더 좋다. 베르니니는 뛰어난 엔터테인먼트 기질과 처세술로 평생 부와 명성을 누렸다. 하지만 보로미니는 당대 최고의 건축가로 성공하지만 원만치 못한 처세술과 괴짜 기질로 베르니니에 대해 열등감과 피해의식에 시달린다. 결국 그는 우울증으로 칼날 위에 몸을 던지고 만다. 비극적 삶은 예술가의 천재성을 더욱 돋보이게 하는 걸까?
이번에는 산타 마리아 마조레 교회(Basilica di Santa Maria Maggiore)로 향한다. 테르미니역 바로 코앞에 있다. 이 교회는 바티칸의 성베드로교회, 라테르노의 성요한 교회와 더불어 로마의 3대 교회 중 하나이다. 펠리니의 영화 <로마>에서 로마의 상징물로 소개되기도 하는, 성모 마리아에게 봉헌된 유명한 교회이다. maggiore는 greater의 뜻이다. 아마 예수님 때문에 성모 마리아 이름 앞에 massimo(greatest)는 사용하지 못했나 보다. 뒷마당에는 교황 식스투스 5세가 카톨릭교회의 위용을 과시하고 순례자들이 쉽게 찾을 수 있는 표지판으로 억지로 옮겨다 세운 오벨리스크가 우뚝 서 있다.(로마의 3대 교회에는 다 오벨리스크가 옮겨져 있고 꼭대기에 십자가를 꼽아놓았다.)
미켈란젤로의 모세상
교회 내부는 로마 3대 교회답게 화려하고 웅장하다. 그러나 이제는 그 웅장함들에 익숙해져서 그런지 별다른 감흥을 자아내지 못한다. 사진 몇 장 찍고 서둘러 카부르(Cavour) 거리를 따라 조금 내려가 찾아간 곳은 산 피에트로 인 빈콜리 교회(Basilica di San Pietro in Vincoli). 큰 길가에서 가파른 계단으로 걸어 올라가 다소 후미진 곳에 있어 찾기가 쉽지 않다. 이 교회에는 미켈란젤로의 유명한 모세상이 있다. 나는 한때 이 모세상이 바티칸 성당에 있는 줄 알고 찾아 헤맸던 기억이 나는데 이런 외진 조그만 교회에 있을 줄은 미처 몰랐다. 이 모세상은 교황 율리우스 2세 영묘를 위해 만들어진 것으로 원래는 베드로 성당 내부 성가대석 자리에 놓게 계획된 것이다. 그런데 불행히도(?) 교황과 미켈란젤로의 돈 싸움(?) 때문에 교황 생전에 만들어지지 못하고 그 규모가 축소되어 40년 후에야 겨우 완성되었다고 한다.
시스티나 성당의 천정화를 그리라는 교황의 명령에 '나는 조각가이지 화가가 아닙니다.'라며 미켈란제로가 불복한 이야기는 유명하다. 또한 마지못해 시작은 했지만 돈 문제로 미켈란젤로가 별 진전을 보이지 않자 교황이 막대기로 미켈란젤로의 머리를 때렸다는 이야기 등은 사실여부와는 관계없이 지금까지 재미있는 일화로 전해지고 있다. 독일의 역사 소설가 반덴베르크(Vandenberg)는 두 사람 사이의 불화를 배경으로 매우 그럴듯한 추리소설 <미켈란젤로의 복수>를 쓰기도 했다. 경위야 어떠했던 한 손에 칼, 한 손엔 십자가를 들고 전장(戰場)을 직접 누비던 전대미문의 세속적 교황 율리우스 2세와 맞짱 뜨던 일개 '화공(畵工)' 미켈란젤로의 한 성깔(Terribilite) 덕분에 우리는 지금 이 위대한 작품을 눈앞에 보고 있는 것이다. 모세 머리 위의 2개의 뿔은 미켈란젤로가 구약 성경을 잘못 해석하여 그렇게 만들었다는데 두 뿔은 모세 얼굴의 위엄을 더 하는데 제격인 것 같다.
교회 제단 아래에는 베드로가 묶였다는 쇠사슬이 보관되어 있다. 그래서 이 교회 이름이 San Pietro in Vincoli(쇠사슬의 성 베드로) 교회란다. 테르미니역 주변에서 평소 보고 싶던 4개의 교회를 다 둘러보았는데도 아직 시간이 많아 지도를 들고 이번에는 조금 떨어진 산 조반니 광장의 라테라노의 성 요한 교회를 찾아 나선다. 빈콜리 교회를 나와 주위를 두리번거리며 조금 걸으니 멀리서 콜로세움의 뒷모습이 보이기 시작한다. 관광객들의 동선을 벗어난 콜로세움 뒷길은 놀랍게도 한적하면서도 넓은 공원( Parco Traiano)으로 이어진다. 길가에는 내가 좋아하는 우산 소나무가 아침 햇살을 등에 지고 줄지어 서 있다. 아니, 로마 시내 한가운데에 이런 호젓하고 넓은 공원이 있을 줄이야! 너무나 뜻밖이라 반갑다. 개를 데리고 산책하는 사람들의 여유로운 모습이 여기가 로마인지 의심케 한다.
이어서 보이기 시작하는 네로 황제의 황금 궁전(Domus Aurea)터. 서기 64년 로마 대화재로 불탄 곳에 세계에서 가장 호사스럽게 지었다는, 역사책에서나 보던 바로 그 네로(Nero)의 황금 궁전이다. 바티칸 박물관의 최대 보물 중의 하나인 라오콘 군상이 1,506년 바로 이 자리에서 한 농부에 의해 발굴되었다. 그 이후 이 궁전은 지금도 발굴작업이 진행되고 있는 로마의 보물창고라고 한다. 로마 여행자여! 무조건 걸을지어다. 걷는 자에게 복이 있나니! 오늘 내가 걷지 않았으면 어찌 이런 곳들을 볼 수 있었을까? 로마 시내는 생각보다 좁아 웬만한 곳은 다 걸을 수 있는 거리이다.
라테라노의 성요한교회
이곳저곳을 돌다가 트라이아노(Traiano) 공원의 가파른 계단을 내려오니 산 조반니 광장으로 바로 연결되는 길이 보인다. 지난 5월 1일, 광장을 가득 메운 젊은이들과 그날의 함성은 온데간데없고 광장은 너무 조용하다. 라테라노의 성요한교회(Basilica di San Giovanni in Laterano). 로마 카톨릭교회의 오랜 역사가 담겨 있는 곳이다. 기독교를 공인한 로마의 콘스탄티누스 황제가 서기 313년에 건축한 세계 최초의 교회당이며 교황청이 14세기 아비뇽으로 옮겨가기 전까지 1,000년간 교황이 머물던 곳이다. 그 규모와 웅장함이 성 베드로 성당에 못지않다. 역시 광장 한 모서리에는 로마에서 가장 높은 오벨리스크가 옮겨져 있다. 라테라노 교회는 여러 차례의 공의회를 개최한 장소로도 유명하다. 그러나 무엇보다도 1929년 무솔리니와 맺은 라테라노 조약으로 더욱 유명한 장소이다.
한때 로마 카톨릭교회는 세속권력에 못지않게 광대한 교황령과 세력을 자랑했다. 하지만 19세기 후반 이탈리아 통일과정에서 가리발디와 카브르에게 백기를 든 후 쪼그라들어 설 자리를 잃게 된다. 그러다가 무솔리니와 담판으로 지금의 바티칸 시국(市國)의 완전한 자치권과 치외법권을 인정받아 기사회생하게 되는 역사적인 조약이다. 로마 카톨릭은 무솔리니와 맺은 이 밀약(?)으로 자치권을 인정받는 대신 역사에 큰 오명을 남기며 많은 비난을 받는다. 무솔리니 파시스트 독재정권에 대해서도, 수많은 인명을 앗아간 독일 나치 정권에 대해서도 교황청은 내내 침묵했기 때문이다. 심지어 유대인 대학살에 대해서도. 오랜 세월이 지난 2,000년 3월, 당시 교황 요한 바오로 2세는 유대인 학살에 관한 이 과오를 비로소 인정하고 사과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