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는 날이 장날
아말피 해안을 내륙으로 가다니!
아침에 눈을 뜨자 우리는 아말피 해안(Costiera Amalfitana) 행 채비를 서두른다. ‘죽기 전 꼭 가봐야 할 곳’, ‘유네스코 자연 문화유산’, ‘Must See’ 등 하도 펌프질이 심한 곳이라서 1순위로 정했다. 굳이 나폴리에 3~4일씩이나 머무는 이유는 이곳을 베이스캠프로 주위의 여러 곳을 둘러보기 위해서이다. 나폴리 구경은 틈틈이 하고.
가이드북을 다시 들쳐 보고 중앙역에 나가 베스비우스 순환 열차(Ferovia Circumvesviana))를 탄다. 꽤 낡은 순환 열차는 매끄럽지 못한 소리를 내며 역마다 서고 가기를 반복하다가 1시간 10분 만에 소렌토 역에 닿는다. 역을 나와 좌측 매표소에서 Unico Campania 1일 패스를 사니 길 앞에 벌써 파란색 SITA 버스가 서 있다. 해안가 절벽 길을 꼬불꼬불 간다기에 마을버스 정도로 생각했는데 예상외로 대형버스이다. 버스 앞엔 벌써 긴 줄이 이어져 있다. 30분을 더 기다려 겨우 탑승하자 운전석 오른쪽 좌석을 재빨리 차지한다. 그래야 해안가 절경을 제대로 볼 수 있다나. 여기까지는 가이드북의 매뉴얼(?)대로 일사천리 OK이다. 버스는 출발하고 우리는 목을 길게 빼고 창가를 내다보는데 30분이 지나도 바다는 안 나오고 점점 산속으로 들어가고 있다.
아말피(Amalfi)
‘이거 어떻게 된 거요?’ 하고 옆사람에게 물었더니 어젯밤에 낙석 사고로 포지타노(Positano) 쪽 해안도로가 폐쇄되었다고 한다. 그래서 버스는 내륙 도로로 아말피(Amalfi)까지 먼저 간 다음 포지타노로 간단다. 가는 날이 장날이라고 김 빠지는 소리가 절로 난다. 야! 여기 한 번 오려고 몇 년을 별렀는데… 볼거리도 없는 내륙을 무료하게 둘러 가던 버스는 2시간쯤 지나 아말피 해안이 아닌 아말피(Amalfi)에 도착한다. 그래도 바다 냄새에 금방 기분이 좋아진다. 어쨌든 우리는 그 유명한 아말피에 왔지 않나? 아말피는 생각보다 작아 보인다. 이곳이 한 때 지중해를 주름잡던 해양 강국이었단 말인가?
선창가를 벗어나 들어선 좁은 두오모 광장은 벌써 사람들로 발 디딜 틈이 없다. 각종 상점들과 식당들로 가득한 좁다란 메인 스트리트(?)에는 관광객들로 넘쳐난다. 마치 남대문 시장을 걷는 기분이다. 하기야 1만 킬로나 떨어진 조선 땅에서 우리 같은 시골 노친네까지 소문 듣고 와서 지금 여기 있는데 호젓하기를 바라는 우리가 잘못이지. 상점에 붙은 가격표를 보니 이곳이 유럽 부자들이 즐겨 찾는 고급 휴양지임을 실감한다. 우리는 한참을 올라가 조금은 덜 복잡해 보이는 한 노천 식당에 자리해 해산물 스파게티와 하우스 와인 1/4병(un quarto)을 시킨다. 아말피에서의 멋진 추억을 기대하며. 그런데 맛과 서비스가 영 별로다. 역 부근과 관광지에서 밥 먹지 말라는 어느 유명 셰프의 조언이 거짓말이 아니구나!
식사 후 서둘러 포지타노(Positano)로 가기 위해 선창가 버스 정거장으로 내려오니 정거장은 사람과 버스들로 뒤섞여 시장 바닥처럼 복잡하다. 그런데 정거장 어느 곳에도 아무런 표시가 없다. 출발시간도, 행선지도. 버스가 도착할 때마다 사람들이 우르르 몰려다니는데 어디서 많이 보던 풍경이네. 기사에게 물어도 대답도 잘 안 해 주고 그들끼리 모여 담배 물고 희희닥거리며 세월 가는 줄 모른다. 우리는 멋도 모르고 서 있다가 동작 빠른 젊은 승객들에 밀려 버스 하나를 놓치고 기약 없이 기다리니 1시간쯤 후에야 겨우 버스가 나타난다. 이번에는 우리도 필사적으로(?) 올라타 자리를 잡는다.
여기가 이탈리아에서도 남부이고, 운전기사 천국임을 이제야 실감한다. 출발시간 그런 거 운전기사 마음대로다. 그런데 운전기사들 운전 실력 하나는 정말 최고 같다. 버스는 꼬불꼬불 절벽 길을 곡예하듯이 오르내린다. 시야가 없는 급커브 길에서는 호른 소리보다 더 멋진 경적을 아주 리드미칼하게 울려댄다. 아내는 절벽 아래 펼쳐지는 경치보다는 운전기사 경적소리가 더 멋있는지 감탄사를 연발하는데 어느 사이 포지타노다.
포지타노(Positano) 풍경
언덕바지에서 내려다본 포지타노 해변은 역시 아름답다. 영화 <토스카나의 태양>에서 보던 그대로다. 해변을 중심으로 높다랗게 솟은 언덕바지에는 파스텔 톤의 하얀 집들이 아름답게 자리하고 열대 나무들과 식물들 사이로 지중해가 한눈에 펼쳐진다. 언덕에서 계단을 내려오는 비좁은 길가에는 고급스러운 상점들이 여기저기 즐비하다. 바닷가로 내려오니 아직 이른 5월인데도 늘씬한 몸매를 자랑하는 수영복 차림의 남녀가 비치를 수놓고 있다. 그런데 이곳의 분위기도 어쩐지 아말피와 크게 다르지 않다. 돈으로 사는 그런 휴양지. 관광객들이 소문 따라 한 번쯤 왔다가 가는 곳.
도로가 안 막혔으면 여기서 소렌토까지는 차로 한 시간이라는데 왔던 길로 되돌아가야 하니 무려 3시간은 잡아야 한다. 은근히 걱정돼 마음이 초조한데 마침 부둣가에서 보니 소렌토행 배가 있다. 조금 아쉽지만 얼른 배에 오른다. 그나마 한 시간 정도 배에서 아말피 해안(Costiera amafitana)을 감상한 걸로 위안을 삼자. 배어서 보는 아말피 해안에는 사라센 탑(Torre Saraceno)들이 자주 눈에 띈다. 이 아름다운 해안도 중세 시대에는 이슬람 해적들의 밥이었다지. 그래서 사람들은 더 높은 산과 절벽 위로 도망가고. 해적선 침입을 망보던 탑들이 지금은 수많은 관광객의 지갑을 터는데 일조하니 얼마나 다행인가?
소렌토(Sorrento) 언덕
소렌토 항에서 배를 내려 타소 광장으로 올라가는 절벽 길은 두부 한가운데를 칼로 반듯이 잘라낸 듯한 형상이다. 광장으로 오르는 꽤 높은 절벽 계단에서도 아내는 계속 신기해한다. 인공적으로 자른 절벽일 거라며. 우리는 타소 광장에 올라와서야 비로소 안도한다. 세일 간판이 걸린 옷가게에 들르기도 하고 젤라토도 사 들고 이곳저곳을 기웃거리며 제법 여유를 부린다. 관광객이 덜 붐비는 타소 광장은 한결 여유롭다. 길을 물어도 사람들이 한결같이 친절하게 가르쳐준다.
높은 언덕으로 올라가서 아래를 내려다보니 뜻밖의 절경이 펼쳐진다. 데 쿠르티스(De Curtis)의 노래가 절로 나온다. ‘아름다운 저 바다와 그리운 빛난 햇빛, 내 맘속에 잠시라도 떠날 때가 없도다. … 돌아오라! 이곳을 잊지 말고, 돌아오라! 소렌토로. 돌아오라!’ 중학교 봄 소풍 때 급우들에 떠밀려 장기 대회에 나간 적이 있다. 엉겁결에 나가 학교에서 배운 이 노래를 열창(?)하다가 갑자기 가사를 잊어버리고 얼굴이 벌게져 중간에 내려온 적이 있다. 그래서 나는 이 노래를 지금도 잘 기억하고 있다. 지나친 기대 탓인지 사실 아말피와 포지타노는 그저 그랬는데 그나마 소렌토가 그 미흡함을 채워 준다.
해 질 무렵 기차를 타기 위해 쏘렌토 역으로 향하는 도중 동네 한적한 길가에 괜찮은 식당이 눈에 띈다. 하우스 와인 반 병과 봉골레 스파게티가 나오는데 신선한 재료 탓인지 맛이 일품이다. 값도 싸고 정장 차림의 나이 든 웨이터의 서비스도 정성스럽다. 그래 바로 이거야! 우리가 기대하던 남부. 와인으로 붉어진 얼굴에 포만감으로 순환 열차를 타니 아침의 긴장감은 사라지고 갑자기 보이는 모든 것이 좋아진다. 덜컹덜컹하는 낡은 열차도, 수시로 정차하는 시골 간이역도, 수수한 차림의 나폴레타노(나폴리 사람)들도 다 정답게 느껴진다. 내가 와인 몇 잔에 취했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