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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남쪽나라 Jan 03. 2025

속물들의 리조트 - 나폴리만(灣)의 진주 카프리 섬

황제의 길을 따라 빌라 요비스로 

남부 이틀째

푸른 동굴

나폴리 중앙역 앞에서 1번 전차를 타니 베벨레로(Beverello) 항까지는 10분 거리이다. 나폴리만의 진주 카프리(Capri)로 가는 수중익선(Hydrofoil) 앞엔 벌써 사람들의 행렬이 기다랗다. 우등고속이 등장하면서 슬그머니 사라진 일반고속버스처럼 수중익선에 밀려 페리(Ferry)도 하루에 한두 차례 겨우 양념으로 다닌단다. '수중익선은 페리에 비해 속도는 두 배 요금도 두 배그러나 낭만은 1/2 배' 배를 타니 어디에서 읽은 이 말이 실감 난다. 바깥도 제대로 못 보고 답답한 배 안에서 무료히 앉아 있는다. 카프리를 이렇게 가서는 안 되는데.      

33년 전 6월의 어느 날, 따가운 초여름 햇살을 받으며 호수처럼 잔잔한 티레니아(tyrrhenia)해를 미끄러져 가는 페리 갑판 위. 아름다운 소렌토 해안을 뒤로하고 카프리섬으로 향하는 배였다. 하루 전 로마에서 만나 다국적 일행이 된 우리들은 배 위에서 기타를 들고 나폴리 민요를 멋들어지게 부르는 한 이탈리아인 곁에서 손뼉을 치며 신나게 따라 불렀지. 산타 루치아, 돌아오라 소렌토로, 후니쿨리 후니쿨라 등 아는 노래들은 모조리. 멀리 카프리섬이 보이자 손을 마구 흔들며 아이들처럼 환호하기도 하고. 그 카프리를 30년이 훨씬 지나 아내와 함께 다시 가는데 오늘따라 날씨가 잔뜩 찌푸리다.     


푸른 동굴 입구


마리타 그란데(Marita grande) 항에 내리자 바로 입구에서 푸른 동굴(Grotta Azzura)로 가는 배에 탑승한다. 배는 10여 명 정도 탈 수 있는 통통배인데 우리 앞에 젊은 일본인 부부가 탔다. 배는 해안을 끼고 20여 분을 달려 푸른 동굴 입구에 도착한 후 다시 노 젓는 작은 배로 부축을 받으며 어렵게 갈아탄다. 같은 배에 탄 일본인 부부와 우리는 배 바닥에 일자로 완전히 눕다시피 해서 로프를 잡고 아주 작은 동굴 입구를 간신히 통과한다. 이게 장난 아니다. 조금만 균형을 잃으면 물속으로 풍덩할 것만 같다. 생고생(?) 끝에 동굴로 들어서니 탄성이 와! 하고 절로 나온다. 사방은 깜깜한데 오직 보이는 것은 짙은 잉크를 뿌려 놓은 듯한 형언할 수 없는 색깔의 푸른 바다. 아무리 좋은 카메라로도 이 색깔을 담을 수 없단다. 사공은 청하지도 않은 나폴리 민요를 계속 불러대며 분위기를 깨고 과잉 서비스를 제공한다. 아니나 다를까 나중에 손을 내민다. 2유로를 주니 2유로를 더 내란다.


푸른 동굴 안의 물 색깔


이 물 색깔은 햇빛과 물의 복잡한 상호작용으로 생긴 굴절된 푸른빛이 벽과 동굴 천장에 투사되어 발생하는 것이란다. 누군가 헤엄이라도 치면 하얀 모랫바닥에서 오팔 색깔의 빛이 반사되어 은빛 광채를 일으킨다고 한다. 갑자기 클라크 케이블과 소피아 로렌의 오래된 영화 <그것은 나폴리에서 시작되었다>의 한 장면이 기억난다. 그 둘은 이 동굴에서 겁 없이 물에 뛰어들었지. 그때 일으켰던 환상적인 청감색 위의 은빛 물결. 이 동굴을 보지 않고서 카프리를 갔다 왔다 이야기 말자. 많은 사람이 오직 이 동굴을 보러 카프리에 왔다가 날씨 때문에 못 보는 경우도 많다고 한다. 오늘 우리는 운이 좋은가 보다. 


빌라 요비스 가는 길

푸른 동굴을 나와 후니쿨라를 타고 언덕을 올라 움베르토 1세 광장에 내린다. 좁은 광장에는 소문난 관광지 아니랄까 벌써 인파로 가득하다. 먼저 관광안내소에서 지도를 구하고 인근 식당에서 파니니(이탈리아식 샌드위치) 2개를 점심 도시락으로 챙긴다.  서둘러 광장을 벗어나 지도를 따라 티베리우스 황제 별장인 빌라 요비스(Villa Jovis)로 향한다. 조금 걸어 올라가니 전혀 다른 카프리가 전개된다. 좁고 호젓한 길섶에는 오렌지, 레몬, 야자나무 등 아름다운 열대 식물들이 우리 눈을 한결 즐겁게 한다. 우리는 금세 광장의 북새통은 잊고 색다른 남국의 이국정취에 한껏 취한다.

 

남국의 정취가 물씬 풍기는 길가의 정원


조금씩 완만한 경사를 따라 올라갈수록 아래로 눈부신 카프리 해안이 한눈에 펼쳐진다. 또 아름다운 남국 정원으로 둘러싸인, 정답게 이웃한 하얀 집들이 우리를 반겨준다. 가다 쉬다 쉬엄쉬엄 완만한 좁은 돌담길을 따라 오르니 멀리 산등성에 빌라 요비스의 흔적이 또렷이 보이기 시작한다.  

   

빌라 요비스 가는 길에서 내려다보는 커프리 항


티베리우스 황제의 별장 빌라 요비스(제우스라는 뜻)는 생각보다 규모가 작다. 흔하디 흔한 석조 기둥 하나 남아있지 않아 원래 형체를 가늠하기 어렵다. 전성기 대로마제국 황제가 어떻게 이 조그만 빌라에서 10년 동안 로마를 통치했단 말인가? 티볼리에서 본 하드리아누스 황제 별장(빌라 아드리아나)에 비하면 너무 초라(?)하다. 그런데 막상 334m 절벽에 오르니 한마디로 가슴이 탁 터일 정도로 풍광이 끝내준다. 저 멀리 나폴리만이 보이고 사방으로 티레니아 (Tyrrhenia)해가 눈앞에 짝 펼쳐진다. 조각배 하나도 다 보일 것 같다. 황제가 왜 이곳을 떠나지 못했는지 비로소 이해가 간다. 또 황제가 별장을 크게 짓지 않은 이유도 알 것 같다. 이 섬 전체가 그의 정원이고 티레니아 바다 전부가 그의 마당인데 황제는 더 이상 무엇이 필요했을까? 우리는 분명히 황제도 앉았을 Belvedere(조망대)에서 깎아 자른 듯한 수십 길 절벽을 내려다보며 환상적인 점심을 먹는다. 파니니가 이렇게 맛있었나?

    

빌라 요비스의 잔해


조망대에서 내려다보는 절벽


내려오는 길도 마냥 즐겁다. 오를 때 못 보던 새로운 풍경들이 눈에 들어온다. 세상에 이보다 더 아름다운 길이 또 있을까? 이름하여 천상의 길이건 좀 과하나? 그래 황제의 길이라 하자. 황제도 가마를 내리고 분명히 걸어 다녔을 이 길을 무릎이 안 좋은 아내가 뒷걸음으로 천천히 내려오는데 지나가는 사람들이 신기한 듯 쳐다본다.

     

길가의 어느 집 정원


조용하고 아름다운 요비스 빌라 가는 길

아나카프리

우리는 속세(?)로 다시 내려와 버스를 타고 구불구불 좁은 산길을 지나 아나카프리(Anacapri)의 비토리아 광장에 내린다. 광장은 사람들로 넘쳐나고 주변에는 없는 것이 없다. 명품점서부터 각종 고급 식당까지. 어디선가 한국말소리가 막 들려온다. 반갑다. 여기저기 무리 지은 한국 단체관광객들이다. 한국 단체관광객은 멀리서 옷차림만 보아도 쉽게 구별할 수 있다. 칼라풀한 아웃도어 복장에 고운 얼굴 탈까 봐 커다란 차양의 모자 아니면 파라솔을 들고 사진 찍기에 여념이 없다. 우리도 한국 관광객들 틈에 끼여 1인용 리프트로 카프리에서 제일 높다는 솔라로 산(Monte Solaro) 정상에 오른다. 그런데 정상에 오르니 안개가 자욱하여 아무것도 볼 수 없다. 괜히 올라왔네. 돈 아깝게. 겨우 커피 한 잔을 마시고 화장실로 들어갔다가 화들짝 놀라 다시 나온다. 온통 한국 아줌마들이다. 내가 잘못 봤나? 분명 남자 화장실인데.   

  

솔라로 산으로 가는 리프트

돌아오는 배 안에서 오늘 하루 카프리에서 쓴 비용을 계산해 본다. 나폴리-카프리 뱃삮을 포함해서 둘이서 200유로가 넘는다. 와! 장난 아니네. 먹은 것이라곤 파니니 2개뿐인데. 카프리를 <속물들의 리조트>라고 폄하한 시오노 나나미의 말이 문득 생각나는 하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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