Movie vs Film
우리나라에도 출간된 <그리스도는 에볼리에 머물렀다(Christ stopped at Evoli)>는 무솔리니 시절 파시즘에 반대하다 남부 오지로 추방당한 카를로 레비(Carlo Levi)가 쓴 자전적 소설이다. 이 책은 영화로도 만들어져 화제가 되기도 했다. 하지만 책 제목만으로는 무슨 뜻인지 선 듯 이해가 잘 안 된다. 예수님이 에볼리에서 멈추다니? 책 속에 ‘우리는 크리스천도, 인간도 아니다. 동물과 다름없다. 그리스도는 에볼리에 멈추어 이곳까지는 오지도 않았다.’라는 한 남부인의 절규가 그 의미를 잘 말해준다. 당시 남부인들의 소외감, 비참함, 절망감을 대변하는 제목이다. 이탈리아 남부는 오랫동안 버려진 곳이고 가장 낙후된 땅이었다 그중에서도 가장 가난하고 비참한 곳이 바로 이곳 마테라(Matera)다. ‘이탈리아의 수치’라고 이탈리아 사람들마저 부끄러워한 남부의 치부. 한국의 60~70년대의 서울 왕십리나 청계천의 빈민촌을 생각해 보라.
마테라의 역사는 구석기시대까지 거슬러 올라간다. 구석기시대부터 지금까지 9천 년 동안 인간이 거주해 온 세계 유일의 암굴 주거지 마테라. 이 암굴은 집 없는 가난한 남부 사람들의 어쩔 수 없는 주거지였고 남부 빈곤의 상징이었다. 응회암으로 된 이 암굴은 손으로나 간단한 도구로도 쉽게 팔 수 있다. 일단 판 후 공기와 접하면 돌처럼 단단히 굳어진다. 그래서 구석기시대 사람들도 쉽게 거주할 수 있었나 보다. 1950년대에 이탈리아 정부는 빈민굴처럼 된 이 암굴 주거지를 더 이상 방치할 수 없었다. 그래서 여기에 살던 사람들을 새 주거지로 강제 이주시킨다. 그 이후 이 도시는 점차 문화적 역사적 가치를 인정받게 되어 1980년대부터 새롭게 태어난다. 가난과 수치의 땅에서 남부의 관광 명소로, 그리고 세계의 문화유산으로
1993년 세계 문화유산으로 지정되고 2004년 멜 깁슨의 영화 <그리스도의 수난(Passion of Christ)>이 이곳에서 촬영되자 수많은 관광객이 찾는 남부의 관광 명소가 된다. 내가 마테라를 처음 알게 된 것은 파졸리니(Pasolini) 감독의 영화 <마태복음>을 보고서부터이다. 이 영화는 멜 깁슨의 <그리스도의 수난>보다 40년 전인 1964년에 제작되었다. 이 영화는 마태복음에 적힌 예수님의 생애를 한 폭의 수채화처럼 간결하고 과장 없이 표현한 뛰어난 심미적 흑백영화이다. 20세기 위대한 영화 중의 하나로 손꼽히는 이 영화의 촬영지 역시 이곳 마테라이다. 영화에서 마테라는 예수님 시대의 예루살렘과 거의 흡사한 분위기여서 굉장히 인상에 남는 영화이다. 멜 깁슨의 영화 <그리스도의 수난>이 인공 조미료를 잔뜩 친 ‘Movie’라면, 파졸리니의 <마태복음>은 조미료가 전혀 안 든 천연 그대로의 ‘Film’이다. 그러나 사람들은 조미료를 잔뜩 친 음식을 더 좋아하는 마련이다. <마태복음>은 몰라도 색시 여배우 모니카 벨루치가 나오는 <Passion of Christ>를 더 잘 안다.
우리가 본 마테라는 진짜 마테라가 아닌지 모른다. 지금은 실제 동굴에 거주하는 사람은 없다고 한다. 우리는 단지 포장된 관광상품으로써의 동굴을 보고 있는 것이다. 동굴에 살던 인간보다는 인간이 살던 동굴에 더 관심을 가지고 우리는 멜랑콜리한 감상에 빠져 있는 것이 아닐까?
동굴 숙소에서의 아침은 상쾌하다. 피곤해하는 아내는 숙소에 자게 둔 채 홀로 카메라만 들고 일찍 숙소를 나선다. 어제 보지 못했던 곳들을 바쁜 걸음으로 찾아다닌다. 얼마 전까지 사람이 살던 동굴과 교회, 계곡 깊은 곳까지. 골고다 십자가가 세워진 곳이 저기였던가?
이른 아침, 잠에서 막 깨어난 마테라는 밤과는 다른 모습으로 나타난다. 빛바랜 무겁고 충충한 돌집 사이로 인간의 끈질긴 생명력이 꿈틀거리고, 인간임을 외치는 절규가 들리는 것 같다. 늦은 아침을 먹고 천천히 역으로 향하는 도중에도 우리는 여전히 이 도시에 대해 눈을 떼지 못하고 뒤돌아보기를 반복한다. 더 많은 것들을 기억 속에 담아두기 위해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