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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실 속의 동화의 나라 - 알베로벨로

by 남쪽나라

마테라의 샤시(Sassi) 지구를 뒤로 하고 15분쯤 걸으니 마테라 역이 나온다. 둘이서 역사로 막 들어가려는데 뒤에서 ‘알베로벨로(Alberobello), 80유로’하고 외치는 소리가 들린다. 돌아보니 한 택시 기사가 우리를 보고 하는 소리다. 저 사람이 우리가 알베로벨로 가는 줄 어떻게 알지? 하며 못 들은 척 지나가는데 갑자기 머릿속에 간단한 산수 계산이 스친다. 지금 기차를 바로 타도 바리(Bari) 역까지 1시간 30분, 바리에서 알베로벨로까지 또 1시간 30분, 최소한 3시간은 걸린다. 기다리는 시간, 바꿔 타는 시간을 감안하면 4시간도 더 걸릴지 모른다. 기차 요금도 둘이 30유로는 될 것 같고.


가던 걸음을 멈추고 흥정을 시작한다. 50유로서부터. 결국 우리는 60유로에 합의하고 택시를 탄다. 올리브 나무가 점점이 심어진 아름답고 조용한 남부 시골길을 편안한 기분으로 드라이브하는 동안 택시 기사는 쉴 새 없이 우리에게 말을 건다. 내 흥정 솜씨(?)를 보고 나를 이탈리아에 좀 산 사람쯤으로 생각한 건가? 지나치는 농가에 트룰로(Trullo)가 하나씩 보이기 시작하더니 정확히 1시간 만에 Alberobello(아름다운 나무라는 뜻)에 도착한다. 택시값이 전혀 아깝지 않다. 한나절의 시간을 벌어줬으니 오히려 횡재한 기분이다.


%C0%CC%C5%BB%B8%AE%BE%C6_%BF%A9%C7%E0_2012-5_193.jpg?type=w2 트룰리 지붕 모습(몰타르를 전혀 쓰지 않고 하나하나 쌓았다)

트룰리 지역(Trulli zone) 입구에서부터 벌써 사람들로 붐빈다. 마테라와는 전혀 딴 세상이다. 폴리아(Poglia) 주의 밝고 빛나는 태양 아래 눈부시도록 하얀 동화의 나라가 펼쳐지자, 아내의 입에서 환한 웃음과 탄성이 터진다. 와!~


%C0%CC%C5%BB%B8%AE%BE%C6_%BF%A9%C7%E0_2012-5_181.jpg?type=w2 사암으로 만들어진 뾰족봉과 기독교적 상징이 그려진 지붕들

석회로 칠한 하얀 벽에 편평한 석회석 돌(Limestone Slab) 하나하나를 쌓아서 만든 뾰쪽한 원추형 지붕의 건물. 집 모양 자체가 아주 특이하고 신기하다. 몰타르를 전혀 사용하지 않고 쌓아 올린 선사시대부터 사용하던 건축 기법이란다. 이런 방식으로 지은 지역 특유의 건축물 군이 지금까지 이렇게 잘 보존되어 내려오는 경우는 매우 드물다고 한다. 당연히 유네스코 세계 문화유산이다. 아직도 알베로벨로에는 약 1,400채의 트룰리가 남아 있다. 리오네 아이아 피콜라(Rione Aia Piccola) 주거지역의 400여 채의 트룰리(trulli)에는 사람들이 현재 살고 있다. 상점, 식당, 호텔 등이 자리하는 리오네 몬티(Rione Monti) 관광지구에도 약 1,000채의 트룰리가 있다. 트룰리는 ‘작은 탑’을 의미한다.


%C0%CC%C5%BB%B8%AE%BE%C6_%BF%A9%C7%E0_2012-5_158.jpg?type=w2 알베로벨로 리오네 몬티 시가지 전경

우리는 리오네 몬티 지구를 어린애처럼 약간 흥분하여 쏘다닌다. 그런데 아뿔싸! 사진을 몇 장 찍지도 않았는데 카메라의 배터리가 갑자기 나가버린다. 이 좋은 곳에서 이런 낭패가 또 있나! 혹시나 해서 관광 안내소를 찾았지만 별 도움을 못 받는다. 김 빠진 기분으로 다니다가 눈에 보이는 한 트룰리 식당으로 들어간다. 밥 먹으러 들어간 게 아니고 배터리 충전하러. 손님도 없는 텅 빈 식당 모퉁이에 겨우 충전기를 꽂아 놓고 이른 점심을 먹는다. 이 소중한 시간을 식당에서 보내다니. 덕분에 우리는 꽤 비싼 점심을 먹고 관광객들이 몰려들기 시작하는 1시 30분쯤에야 겨우 식당 문을 나선다. 아침에 택시로 세이브한 시간을 다 잃어버린 셈이다.


%C0%CC%C5%BB%B8%AE%BE%C6_%BF%A9%C7%E0_2012-5_176.jpg?type=w2 식당 입구
%C0%CC%C5%BB%B8%AE%BE%C6_%BF%A9%C7%E0_2012-5_171.jpg?type=w2 식당의 실내 벽과 천장 모습


그래도 알베로벨로를 구경하기에는 충분하다. 이곳은 유달리 중고등 학생들을 포함한 젊은 관광객들이 눈에 많이 띈다. 당연하지. 이곳은 동화의 나라이니까. 마치 디즈니랜드에라도 온 것처럼 하나 같이 신기해하고 즐거운 표정들이다. 알베로벨로에 이런 트룰리가 생기기 시작한 것은 14세기 중반부터이고 그 후 몇 세기에 걸쳐서 오늘의 트룰리 마을이 형성되었다 한다. 이 지역 트룰리에 관한 몇 가지 설 중 유력한 이야기로는, 당시 이 지역의 봉건 영주는 가옥 당 세금을 부과했는데 세금 징수관이 나타나면 지붕을 헐고, 가고 나면 다시 쌓아 세금을 피하려고 이런 형태의 트룰리를 짓게 되었다나. 트룰리(trulli)의 기원에 대해서는 확실치 않다. 이 지역의 선사시대 돌무덤에서 기원한다는 설도 있고, 한 때 그리스 식민지였던 이곳에 크레타(Creta)나 미케네(Mycenae)에서 전래되었다고도 한다.


%C0%CC%C5%BB%B8%AE%BE%C6_%BF%A9%C7%E0_2012-5_189.jpg?type=w2 한 가게에 붙어 있는 일곱 명의 난쟁이

점심도 배불리 먹었겠다 우리는 느긋하게 이곳저곳을 누빈다. 기념품 가게에서 손자 줄 티셔츠도 하나 고르고. 그런데 3시가 좀 지나자 마음이 바빠지기 시작한다. 하룻밤 자고 싶은 충동을 참고 아쉬운 마음으로 역으로 향한다. 이탈리아반도의 장화 뒤축, 남부 깊숙한 곳에 숨겨진 이곳까지 온 것은 행운에 가깝다. 이탈리아에 관심이 많은 나도 불과 한 달 전에 우연히 알았으니까. 그만큼 알베로벨로는 우리에게 잘 알려져 있지 않다. 마테라까지 왔다가 만일 여기를 못 왔다면 후회막심할 뻔했다.


알베로벨로역에서 기차로 1시간 30분 걸려 바리(Bari) 역에 도착한 후 나폴리행 버스 정거장을 겨우 찾아 버스를 기다린다. 그런데 출발시간이 10분이나 지났는데도 버스가 나타나지 않는다. 줄 서 기다리는 사람들 틈에서 불편한 심기를 몸짓으로 표현했더니 다들 아무렇지도 않은 것처럼 씩 웃는다. 그리고 한 마디씩 한다. ‘여기는 이탈리아예요’라고. 왠지 그들의 웃음이 이제는 밉지를 않다. 조금은 가난한 형색들이지만 얼굴에 순박함이 묻어난다. 참 흐뭇하고 뿌듯한 남부 여행이다. 우리도 이제 이탈리아 사람 닮아 가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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