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테라의 샤시(Sassi) 지구를 뒤로 하고 15분쯤 걸으니 마테라 역이 나온다. 둘이서 역사로 막 들어가려는데 뒤에서 ‘알베로벨로(Alberobello), 80유로’하고 외치는 소리가 들린다. 돌아보니 한 택시 기사가 우리를 보고 하는 소리다. 저 사람이 우리가 알베로벨로 가는 줄 어떻게 알지? 하며 못 들은 척 지나가는데 갑자기 머릿속에 간단한 산수 계산이 스친다. 지금 기차를 바로 타도 바리(Bari) 역까지 1시간 30분, 바리에서 알베로벨로까지 또 1시간 30분, 최소한 3시간은 걸린다. 기다리는 시간, 바꿔 타는 시간을 감안하면 4시간도 더 걸릴지 모른다. 기차 요금도 둘이 30유로는 될 것 같고.
가던 걸음을 멈추고 흥정을 시작한다. 50유로서부터. 결국 우리는 60유로에 합의하고 택시를 탄다. 올리브 나무가 점점이 심어진 아름답고 조용한 남부 시골길을 편안한 기분으로 드라이브하는 동안 택시 기사는 쉴 새 없이 우리에게 말을 건다. 내 흥정 솜씨(?)를 보고 나를 이탈리아에 좀 산 사람쯤으로 생각한 건가? 지나치는 농가에 트룰로(Trullo)가 하나씩 보이기 시작하더니 정확히 1시간 만에 Alberobello(아름다운 나무라는 뜻)에 도착한다. 택시값이 전혀 아깝지 않다. 한나절의 시간을 벌어줬으니 오히려 횡재한 기분이다.
트룰리 지역(Trulli zone) 입구에서부터 벌써 사람들로 붐빈다. 마테라와는 전혀 딴 세상이다. 폴리아(Poglia) 주의 밝고 빛나는 태양 아래 눈부시도록 하얀 동화의 나라가 펼쳐지자, 아내의 입에서 환한 웃음과 탄성이 터진다. 와!~
석회로 칠한 하얀 벽에 편평한 석회석 돌(Limestone Slab) 하나하나를 쌓아서 만든 뾰쪽한 원추형 지붕의 건물. 집 모양 자체가 아주 특이하고 신기하다. 몰타르를 전혀 사용하지 않고 쌓아 올린 선사시대부터 사용하던 건축 기법이란다. 이런 방식으로 지은 지역 특유의 건축물 군이 지금까지 이렇게 잘 보존되어 내려오는 경우는 매우 드물다고 한다. 당연히 유네스코 세계 문화유산이다. 아직도 알베로벨로에는 약 1,400채의 트룰리가 남아 있다. 리오네 아이아 피콜라(Rione Aia Piccola) 주거지역의 400여 채의 트룰리(trulli)에는 사람들이 현재 살고 있다. 상점, 식당, 호텔 등이 자리하는 리오네 몬티(Rione Monti) 관광지구에도 약 1,000채의 트룰리가 있다. 트룰리는 ‘작은 탑’을 의미한다.
우리는 리오네 몬티 지구를 어린애처럼 약간 흥분하여 쏘다닌다. 그런데 아뿔싸! 사진을 몇 장 찍지도 않았는데 카메라의 배터리가 갑자기 나가버린다. 이 좋은 곳에서 이런 낭패가 또 있나! 혹시나 해서 관광 안내소를 찾았지만 별 도움을 못 받는다. 김 빠진 기분으로 다니다가 눈에 보이는 한 트룰리 식당으로 들어간다. 밥 먹으러 들어간 게 아니고 배터리 충전하러. 손님도 없는 텅 빈 식당 모퉁이에 겨우 충전기를 꽂아 놓고 이른 점심을 먹는다. 이 소중한 시간을 식당에서 보내다니. 덕분에 우리는 꽤 비싼 점심을 먹고 관광객들이 몰려들기 시작하는 1시 30분쯤에야 겨우 식당 문을 나선다. 아침에 택시로 세이브한 시간을 다 잃어버린 셈이다.
그래도 알베로벨로를 구경하기에는 충분하다. 이곳은 유달리 중고등 학생들을 포함한 젊은 관광객들이 눈에 많이 띈다. 당연하지. 이곳은 동화의 나라이니까. 마치 디즈니랜드에라도 온 것처럼 하나 같이 신기해하고 즐거운 표정들이다. 알베로벨로에 이런 트룰리가 생기기 시작한 것은 14세기 중반부터이고 그 후 몇 세기에 걸쳐서 오늘의 트룰리 마을이 형성되었다 한다. 이 지역 트룰리에 관한 몇 가지 설 중 유력한 이야기로는, 당시 이 지역의 봉건 영주는 가옥 당 세금을 부과했는데 세금 징수관이 나타나면 지붕을 헐고, 가고 나면 다시 쌓아 세금을 피하려고 이런 형태의 트룰리를 짓게 되었다나. 트룰리(trulli)의 기원에 대해서는 확실치 않다. 이 지역의 선사시대 돌무덤에서 기원한다는 설도 있고, 한 때 그리스 식민지였던 이곳에 크레타(Creta)나 미케네(Mycenae)에서 전래되었다고도 한다.
점심도 배불리 먹었겠다 우리는 느긋하게 이곳저곳을 누빈다. 기념품 가게에서 손자 줄 티셔츠도 하나 고르고. 그런데 3시가 좀 지나자 마음이 바빠지기 시작한다. 하룻밤 자고 싶은 충동을 참고 아쉬운 마음으로 역으로 향한다. 이탈리아반도의 장화 뒤축, 남부 깊숙한 곳에 숨겨진 이곳까지 온 것은 행운에 가깝다. 이탈리아에 관심이 많은 나도 불과 한 달 전에 우연히 알았으니까. 그만큼 알베로벨로는 우리에게 잘 알려져 있지 않다. 마테라까지 왔다가 만일 여기를 못 왔다면 후회막심할 뻔했다.
알베로벨로역에서 기차로 1시간 30분 걸려 바리(Bari) 역에 도착한 후 나폴리행 버스 정거장을 겨우 찾아 버스를 기다린다. 그런데 출발시간이 10분이나 지났는데도 버스가 나타나지 않는다. 줄 서 기다리는 사람들 틈에서 불편한 심기를 몸짓으로 표현했더니 다들 아무렇지도 않은 것처럼 씩 웃는다. 그리고 한 마디씩 한다. ‘여기는 이탈리아예요’라고. 왠지 그들의 웃음이 이제는 밉지를 않다. 조금은 가난한 형색들이지만 얼굴에 순박함이 묻어난다. 참 흐뭇하고 뿌듯한 남부 여행이다. 우리도 이제 이탈리아 사람 닮아 가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