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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의 얼굴을 가진 도시 - 나폴리(Napoli)

나폴리를 보고 죽어라

by 남쪽나라 Jan 21. 2025


나폴리 마지막 날

나폴리를 보고 죽어라(Vedi Napoli e poi muori)’. 옛날부터 나폴리를 두고 하는 말이다. 요즈음도 이 말을 그대로 믿는 사람들이 있을까? 사실 나폴리만큼 널리 알려진 도시도 드물지만, 명성에 비해 나폴리만큼 인기 없는 도시도 별로 없을 것 같다. 사람들은 고작 폼페이나 카프리 등 남부여행을 위해 거치는 정거장 정도로 생각한다. 더러는 나폴리에 대해 좋지 않은 선입관 때문에 이곳에 오는 것조차 꺼린다. 더럽고 빈곤하고 시끄럽고 혼잡하고 치안마저 불안한 그런 곳. 우리 또한 그랬다. 나폴리 관광을 위해 이곳에 온 것이 아니다. 인근 지역으로 가기 위한 베이스캠프로 머문 것일 뿐이다. 그래서 그 유명하다는 고고학 박물관 한 번 가보질 못했다. 나흘 밤을 역 근방의 싸구려 호텔에서 자다 보니 몇 가지 소동도 있었다. 한밤중에 불꽃놀이 하는 듯한 요란한 총소리와 경찰 사이렌 소리에 놀라 가슴을 쓸기도 하고, 터무니없는 밥값 바가지를 쓰기도 하고 외출할 때마다 바싹 긴장해 목이 뻐근할 지경이었다.     


그러나 사람은 금방 환경에 익숙해지기 마련이다. 며칠 밤을 자다 보니 호텔 직원들과도 제법 친해지고 역 안의 관광안내소 뚱보 아가씨와는 지날 때마다 차오(Ciao)! 하는 사이가 된다. 역 주변에서 할 일 없이 하루를 보내는 아프리카인들도 나쁜 사람들이 아니라는 것을 알게 된다. 사람 사는 곳은 다 비슷하다. 단지 좀 더 가난하기 때문에 그런 것일 뿐이다. 우리도 한때 그러지 않았나? 소매치기와 깡패와 포주들이 서울역의 주인 노릇하던 시절이 오래전 일이 아니다.  

   

플레비쉬토 광장(사진 출처: 위키피디아)플레비쉬토 광장(사진 출처: 위키피디아)
움베르토 1세 갤러리아움베르토 1세 갤러리아

우리는 오늘 오후에야 비로소 나폴리 구경에 나선다. 전차를 타고 이리저리 발 닿는 데로 다닌다. 먼저 내린 곳은 나폴리의 중심 번화가 플레비쉬토 광장(Piazza Plebiscito). 넓은 광장 주변에는 왕궁과 산 프란체스코 디 파올라 성당, 그 유명한 산 카를로 오페라극장, 움베르토 1세 갤러리아 등이 다 모여있다. 한 마디로 나폴리의 얼굴이다. 움베르토 1세 갤러리아 주변에는 화려한 쇼핑 상가들이 줄지어 있고 나폴리의 선남선녀들이 다 모인 것 같다.    

 

나폴리 중심 쇼핑가나폴리 중심 쇼핑가

우리는 고급 호텔들이 즐비한 산타 루치아 해안가를 따라 달걀 성(Castel dell’Ovo)까지 걷는다. 달걀 성에서 보는 나폴리만의 경관은 과연 자랑할 만하다. 멀리 베수비오 화산이 선명하게 자리하고, 가까운 부두에는 멋진 요트들이 가득하다. 그 너머로는 대형 크루즈 선들과 페리들도 보이고.     


달걀 성(Castel dell'Ovo)달걀 성(Castel dell'Ovo)

나폴리를 보고 죽어라.’라는 말이 허언이 아니구나. 32km에 달한다는 나폴리만은 정말 아름답다. 베수비오 화산 정상이나 쏘렌토 행 배에서 보았을 때처럼 나폴리만의 아름다움은 가까이서 보다는 멀리서 보았을 때 더욱 빛난다. 어머니가 손을 벌려 품어 안는 듯한 완만한 곡선의 해안. 그래서 뱃사람들은 한결같이 나폴리를 사랑하며 노래했나 보다. 수개월 또는 수년간 고단한 항해를 마치고 손을 벌리고 맞아주는 포근한 어머니의 품 같은 나폴리 항에 들어올 때 이보다 더 아름답게 보이는 항구가 또 있을까? 어떻게 노래가 절로 나오지 않겠는가?  예수님이 팔을 벌린 모습의 로마 베드로 성당 광장의 열주랑(列柱廊)도 바로 이곳 출신의 천재 건축가 베르니니(Bernini)가 어릴 때 보던 나폴리만의 형상에서 따와 설계한 것이 아닐까?


나풀리항 전경나풀리항 전경
팔을 벌린 듯한 나폴리 만팔을 벌린 듯한 나폴리 만

우리는 해변가를 더 걷다가 조금 지쳐 전차를 타는데 전차는 해안가를 벗어나더니 조금 전과 전혀 다른 나폴리로 우리를 안내한다. 말하자면 나폴리의 뒷 동네이다. 지저분한 거리와 골목마다 베란다에 걸려 있는 빨래널이 깃발들. 뭔가 지쳐 있는 듯한 사람들의 표정과 형색들. 그곳엔 남부의 남루함이 베어 있다. 우리는 어딘지도 모르는 변두리 종점에 내려 20~30분을 기다리다가 다시 그 전차를 타고 돌아온다. 전차 안에는 뚱뚱하고 작달막한 키에 가난의 티를 벗지 못한 순박한 모습의 사람들이 대부분이다. 두 동양 노인네가 신기한 듯 계속 호기심 어린 눈길로 우리를 쳐다보는 전차 속의 그들은 조금 전 움베르토 1세 갤러리아 거리에서 보던 나폴리 사람들이 아니다.  

   

나폴리의 또 다른 모습, 스파카 나폴리나폴리의 또 다른 모습, 스파카 나폴리
스카파 나폴리의 뒷골목스카파 나폴리의 뒷골목

시칠리아로 떠나는 날 아침 일찍 혼자서 스파카 나폴리(Spacca Napoli)를 둘러본다. 천 년의 역사를 가진 나폴리의 가장 오래된 주거지역. 나폴리를 두 쪽으로 자른 듯한(spacca는 자르다의 뜻임) 이 유명한 좁고 더러운(?) 골목이야 말로 화장하지 않은 나폴리의 민 얼굴이다. 가난한 서민들의 고단한 삶의 모습과 애환이 스며져 있는 곳. 그러나 이곳 사람들의 끈질긴 생명력과 활기와 생동감을 느낄 수 있는 곳, 나폴리 사람들의 낙천적 성격과 쾌활함도 같이 묻어 있는 곳.     


구스타브 샤르팡티에(Gustave Charpentier)가 <이탈리아의 인상(Impressions d' Italie)>에서 노래한 '나폴리'는 바로 이런 나폴리가 아닐까? 나폴리를 배경으로 한 두 편의 영화가 생각난다. 하나는 로셀리니(Rossellini) 감독의 <이탈리아 여행(Journey to Italy)>. 다른 하나는 리나 베르트뮬러(Lina Wertmuller) 감독의 <안녕, 선생님(Ciao,Professore)!>. 잉그리드 버그만이 나오는 영화 <이탈리아 여행>은 부유한 영국인 부부가 나폴리 여행 중 겪는 부부 갈등과 사랑을 그린 오래된 영화이다. 나폴리의 기막힌 풍경과 명소들이 다 나온다. 영화에 나오는 나폴리 옛 귀족과 한량들이 자기 자신들을 보고 하는 말 하나. dolce far niente(sweet for doing nothing) 이 말은 요즈음도 일상에서의 일탈을 꿈꾸는 사람들이 좋아하는 말인데 ‘무위의 달콤함’,‘달콤한 빈둥거림’ 뭐 그런 뜻이다. 좋게 표현해서 그런 거고, 아무 일도 안 하고 빈둥거리는 게으름을 말한다.     


나폴리는 낙원이다사람들은 자신을 망각한 도취상태에 살고 있다여기서는 일하고 싶은 생각이 나지 않는다’라고 괴테도 말하지 않았던가?(괴테는 빈민가에 한 번도 가보지 않았을 것 같다.) 수긍이 간다. 온화한 기후에 사시사철 빛나는 태양, 그리고 기막힌 자연경관을 자랑하는 이곳 사람들이 애써 일할 필요가 뭐 있겠는가? 먹고 살 걱정이 없는 사람들이라면. 그런데 여자 감독 리나 베르트뮬러의 영화 <안녕, 선생님!>은 전혀 다른 나폴리를 그리고 있다. 나폴리 뒷골목의 한 초등학교를 무대로 한 이 영화는 가난과 무지와 부패, 그리고 범죄의 악순환에 빠져 있는 이탈리아의 남부 문제(Mezzogiorno)를 북부 출신 한 교사의 눈으로 심각하게 정면으로 다루고 있다.     


내가 본 2편의 영화만큼이나 우리가 본 나폴리는 상이하고 혼란스럽다. 화려함과 남루함, 게으름과 쾌활함. 생동감과 무질서, 거침과 정열, 시끌벅적함과 신비감. 순박함과 교활함, 아름다움과 더러움.…어떤 것이 진짜 나폴리인가? 천의 얼굴을 가진 도시나폴리'(Napoli,city of a thousand faces) 어느 나폴리 관광 홍보지에 실린 글귀처럼 그래 나폴리를 1~2마디로 간단히 정의하려 하지 말자. 그대가 직접 눈으로 보고 체험하기 전에는. '나폴리화려함을 자랑하지 않고소박함을 부끄러워하지 않는다.' 누가 말했더라?


<나의 아날로그식 이탈리아 여행기1>은 분량관계로 여기에서 연재를 끝내고 3주간의 시칠리아 여행을 담은 <나의 아날로그식 시칠리아 여행기>가 곧 이어집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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