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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남쪽나라 Jan 07. 2025

어둡고 우울한 과거, 그러나 - 마테라(1)

이탈리아에 이런 곳이?

남부 사흘째

나폴리역 광장 모퉁이의 시외버스 정류장에서 하루에 한 번뿐인 마테라(Matera)행 버스에 오른다. 이탈리아 남부의 숨은 보석인 마테라(Matera)와 알베로벨로(Alberobello)로 가기 위하여. 승객이 겨우 반쯤 찬 버스는 잘 다듬어진 고속도로를 따라 남으로 남으로 향하더니 한동안 이름도 모르는 시골 동네를 들어갔다 나오기를 반복한다. 그러다가 아드리아해를 끼고 한 참 내려간 후 남쪽 끝 단의 항구인 바리(Bari)에 도착한다. 승객 대부분은 바리에 내린 채 운전기사가 바뀐 버스는 방향을 돌려 마테라로 향한다. 직행하면 3시간도 안 되는 거리를 버스는 돌고 돌아 4시간 40분 만에 마테라에 도착한다.     


우리는 6시가 넘어 마테라 신시가지의 변두리 어느 곳에 내려진다. 종점이라는데 주위에는 집도 없고 물어볼 사람도 안 보인다. 피곤하고 막막하다. 어떻게 가야 할지 몰라 숙소에 전화를 거니 택시를 타고 오란다. 택시 타면 되는 거 누가 모르나? 일러 준 번호로 전화를 걸자 총알같이 달려온 시골 택시 기사의 표정이 싱글벙글 밝고 싹싹하다. 봉이라도 물었나? 역시 택시 기사는 미터기도 꺾지 않은 채 5분도 채 안 걸려 숙소까지 오더니 15유로를 내란다. 그러면 그렇지 여기는 남부니까. 남부 택시는 흥정이 필수라는 사실을 깜박한 우리가 잘못이지.  

   

동굴 숙소 내부

그러나 막상 숙소(샤시 지구의 B&B)에 들어서니 기분이 싹 바뀐다. 아니 동굴에 이런 멋진 숙소가 있다니! 동굴을 그대로 살려 꾸민 방은 아주 깔끔하고 색다르다. 한마디로 유니크하다. 우리는 짐만 던져두고 스마트한 인상의 주인 부부로부터 몇 가지 친절한 조언을 받은 후 지도 한 장만 들고 밖으로 나온다. 좁다란 길을 따라 샤시 지역(Sassi, 암굴 주거지)을 100여 m 걷기 시작하자마자 우리는 눈을 의심하기 시작한다. 아니 여기가 우리가 사는 21세기 세상 맞아? 시간이 멈춘 듯하다. 사람도 별로 안 다니는 초저녁의 한적한 샤시 거리는 전혀 딴 세상이다. 우리가 타임머신을 타고 예수님이 살던 시대로 온 것인가? 간혹 서 있는 자동차만 없다면 그렇게 믿을 뻔하다. 로마도, 나폴리도, 카프리도 일순 머리에서 다 지워진다. 영화나 소설 속에서가 아니고 바로 눈앞에 어둡고 우울해 보이면서도 신비스러운 '오랜 과거'가 원형 그대로 펼쳐있지 않은가? 

    

마테라 샤시 지구


높은 언덕의 동굴 교회


아내와 나는 믿기지 않는 눈으로 지도만 손에 들고 발길 닿는 대로 거닌다. 이 좁은 동네서 길 잃을 염려는 안 해도 될 것 같다. 미로 같은 골목길을 헤매기도 하고, 동굴 교회를 들여다보고, 그 아래 깊은 협곡을 내려보기도 한다. 길을 돌아 더 걸으니 높은 언덕 위의 두오모 성당이 석양에 황금빛으로 빛난다. 석양은 바다에서만 멋진 게 아니구나.   

  

석양의 두오모 성당


해가 기울어 어두워지기 시작하자 여기저기 드문드문 가로등 불이 비치는 거리는 더욱 몽환적이다. 어두운 거리에서 사람들을 이따금 마주치지만 우리는 전혀 두려워하지 않는다. 숙소 주인의 든든한 장담을(?) 들었기 때문이다. '이곳은 마피아도 도둑도 소매치기도 일절 없습니다안심 놓고 밤길을 다니세요우리가 보장합니다.' 그래서 우리는 때로는 유령도시 같기도 한 별세계의 밤길을 지칠 때까지 겁도 없이 다닌다. 그렇게 다니다가 눈앞에 식당 하나가 나타난다. 숙소 주인이 적극 추천해 주던 동굴식당 <Nadi>이다.

     

동굴 식당 주변의 밤거리


우리는 주저 없이 들어가서 여종업원이 추천하는 향토 메뉴를 시킨다. 동굴식당이 주는 독특한 분위기에 이 지방 전통 주파(Zuppa, 수프의 일종)와 양고기 요리, 그리고 하우스 와인 잔. 우리는 잊지 못할 기막힌 저녁을 먹는다. 한 구석에 부자나라 독일 관광객들의 왁자지껄 와인 잔 부딪치는 소리가 들린다. 우리도 질세라 와인 잔을 일부러 크게 부딪친다. 우리가 지금 마테라에 있음을 감사하며. 5시간의 고단한 버스 여행을 충분히 보상받는 행복한 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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