로마의 센트럴 파크, 보르게제 장원
로마의 센트럴 파크, 보르게제 장원
보르게제 장원에 갈 계획은 원래 없었다. 보르게제 미술관 예약도 하지 않았고 시간도 충분치 못해 다음 기회로 미루었다. 그런데 보르게제 장원이 포폴로 광장 바로 코앞에 있지 않은가? 산타 마리아 델 포폴로 교회를 나와 오른쪽 핀치오 언덕의 계단을 올라서자마자 넓은 보르게제 장원이 눈앞에 펼쳐진다. 로마 시내 한가운데에 이런 넓고 고즈넉한 장원이 숨겨져 있다니 놀랍다. 끝이 보이지 않는다. 더욱 놀라운 것은 이 넓은 장원이 보르게제(Borghese)라는 추기경 한 사람의 소유였다니! 추기경은 이 넓은 장원에 동물원과 어린이놀이터 등 각종 위락시설을 짓고 베르니니 등 당대 최고의 예술가들을 끌어모아 이곳을 지상낙원으로 만들려 했다고 한다. 지금 그의 수장작품(컬렉션)들을 모아 놓은 곳이 바로 바티칸미술관에 버금가는 보르게제미술관이다.
보르게제 장원은 약간 높은 지대에 위치에 있지만 시내에서는 잘 보이지 않는다. 반면 장원 모퉁이에 서면 로마 시내가 눈앞에 확 다 들어오고 전망 또한 일품이다. 우리는 이동식 아이스크림 판매대와 커다란 회전목마가 보이는 어린이 놀이공원을 지나 마냥 즐겁게 걷는다. 보르게제 미술관이 어디쯤 있나 하고 방향도 잘 모른 체 장원 여기저기를 거닐다가 눈앞에 우뚝 솟은 한 무리의 소나무 숲을 만난다. 그 위풍이 하늘을 찌를 듯하다. 잠시 눈을 돌려 시선이 멈추는 저 너머에도 품위를 뽐내는 소나무들이 병풍처럼 하늘을 수놓고 있다. 탄성이 절로 나온다. 로마의 상징 바로 우산 소나무들이다. 레스피기(Resphigi)가 작곡한 ‘보르게제 장원의 소나무(그의 교향시 ‘로마의 소나무’ 제1부))는 바로 이곳을 묘사한 것이 아닐까?
소나무 숲의 정경에 취해 거닐다가 완전히 방향감각을 잃고 만다. 오전 시간이라 사람도 뜸하고 어디로 가야 할지 도무지 막막하다. 갑자기 비까지 뿌리기 시작하자 두 노친네는 당황하여 우왕좌왕하기 시작한다. 장원을 가로지르는 버스는 간간이 보이는데 어디서 어떤 차를 타야 하나? 비는 계속 내리고 다리도 서서히 아프기 시작하고 아내의 눈꼬리가 조금씩 올라간다. 마침 116번 마을버스 한 대가 우리 앞에 정차하기에 무조건 Go! 하면서 올라탄다. 마을버스는 한참 가다가 시내가 아닌 외진 어느 곳에 우리를 내려준다. 종점이란다. 거꾸로 탄 것이다. 우산을 들고 하염없이 30여 분을 기다리다가 반대 방향으로 다시 출발한다. 버스는 차 1대 지나갈 만한 좁은 골목길을 곡예하듯이 이리저리 돌더니 드디어 지하철 바르베리니 역이 보인다.
바르베리니(Barberini) 광장의 두 거인, 베르니니와 레스피기
광장이라고 말하기엔 뭐 한, 차들로 붐비는 좁은 바르베리니 광장 한가운데 하늘을 향해 우뚝 솟은 생동감 넘치는 분수 하나가 물을 뿜고 있다. 아, 그 유명한 트리토네(Tritone) 분수! 로마의 바로크를 선도한 위대한 건축가이자 조각가인 베르니니의 작품이다. 4마리의 돌고래가 떠받치는 조개껍질 위에 바다의 신 트리토네가 무릎을 꿇은 채 고동 나팔을 불고 있다. 로마 3부작으로 유명한 이탈리아의 작곡가 레스피기는 “… 그것은 분출하는 물기둥 사이에서 춤추면서 흥겹게 뛰어노는 나이야드(물의 요정)와 트리토네(반인반조의 해신)의 무리를 불러 모으는 명랑한 부름 같다.”라고 이 장면을 묘사한다. 나는 분수를 바라보며 즐겨 듣던, 고동 나팔을 불 듯 호른의 강한 연주로 시작되는 레스피기의 ‘아침의 트리토네 분수(그의 교향시 ‘로마의 분수’ 중 제2곡)’의 가락을 떠올려 보려 애를 쓴다. 위대한 바로크 조각가와 그 분수를 아름다운 노래로 들려주는 명 작곡가. 두 사람의 거인이 있어 로마는 더욱 아름다워지나 보다.
보르게제 장원에서의 헤매던 기억은 벌써 잊고, 구름 속에서 삐쭉이 햇살이 나오자 더욱 영롱해 보이는 트리토네 분수 앞에서 우리는 젊은이처럼 멋진 포즈를 잡으며 사진 찍기에 여념이 없다. 트리토네 분수 뒤편 길 한 모서리에 벌이 조각된 귀여운 미니 분수 ‘아피(Api)’ 또한 베르니니의 작품이다. 그리고 바로 근처에 바르베리니 궁도 보인다. 후에 교황이 된 바르베리니 추기경의 궁이다. 지금은 미술관으로 많은 뛰어나 미술품들이 소장되어 있다지만 우리는 그냥 패스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