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디오 전통이 가장 잘 보존된 도시
푸에블라의 D호텔 내 식당 Cinco의 아침메뉴는 웬만한 고급식당 못지않다. 게다가 공짜 아닌가? 아침식사때문에 하루 더 머물고 싶을 정도다. 늦은 아침을 먹고 흡족한 마음에 팁으로 호주머니에 있는 잔돈을 몽땅 털어놓고 잠시 생각한다. 푸에블라에 더 머물 것인가? 와아카로 일찍 갈 것인가? 아쉽지만 예정대로 짐을 챙겨 아데오(ADO) 버스터미널로 향한다.
멕시코의 ADO(Autobuses de Oriente) 버스는 상당히 고급형 장거리버스이다. 넓은 국토에 비해 항공로선이 적고 철도시설도 미비된 멕시코인지라 사람들은 웬만큼 먼 거리도 ADO버스를 이용한다. ADO버스는 비행기처럼 수화물도 다 실어준다. 차종도 고급인 데다 차 안에는 화장실까지 있는 대신 요금은 꽤 비싼 편이다.
우리가 탄 ADO버스는 푸에블라를 벗어나자 곧 2차선의 험한 산길을 오르내리기 시작한다. 아찔할 정도의 낭떠러지 길도, 때로는 선인장만 무성한 험준한 산악지대도 넘나 든다. 마치 오래전 한계령을 넘는 기분이다.
와아카(Oaxaca)가 인디오 전통이 가장 잘 보존된 도시로, 가장 멕시코다운 도시로 남아 있는 이유를 알 것 같다. 이렇게 쉽게 접근할 수 없는 험준한 지형 때문이 아닐까? 4시간 반을 달려 오후 4시쯤 와아카에 닿으니 분위기와 공기부터 달라 보인다. 태평양과 멕시코만의 차이만큼이나. 고즈넉하면서도 활기 있고 시내 어느 곳에서나 전통도시로서의 자부심이 묻어있다.
역사지구 내에 위치한 A호텔에 짐을 풀자 곧장 거리로 나오는데 호텔이 면한 Alcara로(路)는 와아카다운 냄새가 물씬 풍긴다. 푸에블라(Puebla)처럼 화려하지도 넓지도 않은 거리는 작은 돌조각으로 예쁘게 포장되어 있고, 식민지풍 건물들은 아기자기하고 수수하다. 그리고 차마저도 다니지 않는다. 에스파냐식의 허세(?)는 쑥 빠진 오아카다운 식민거리의 모습이다. 어느 책자에서 본 '여유로우면서도 활기차고(relaxed but stimulating), 외지면서도 범세계적인(remote but cosmopolitan) 도시 와아카'라는 표현 딱 그대로.
마침 뱀머리가 걸린 어느 건물 앞을 지나가는 광대모습의 유쾌한 행진을 보니 더욱 와아카에서는 뭔가 재미있는 일이 벌어질 것만 같은 느낌이다. 우리는 좁은 알카라 거리를 경쾌한 기분으로 거닐어 본다. 화사한 붉은색 꽃나무가 그늘을 만들어주고 있는 산토 도밍고교회 쉼터에서부터 소칼로광장까지 천천히 걷는데, 어둠이 지기 시작하면서 소칼로 주변일대는 서서히 사람들이 몰려들기 시작한다. 여기저기 노점상들이 가득한 광장을 거니는 사람들의 표정은 여유롭다. 휴일 저녁 한가롭게 동네 마실들 나온 분위기이다.
광장과 접한 공원은 꽤나 넓고 수목으로 울창하고 공원주위에는 카페와 식당들이 즐비하다. 사람들은 여유롭게 야외 테이블에 앉아 늦은 오후를 즐기고 있다. 점심을 차칸에서 샌드위치로 간단히 때운 우리는 벌써부터 허기를 느낀다. 사람들로 가득한 식당들 앞을 기웃거리다가 문득 어느 블로그에서 읽은 글이 생각난다. <문화와 요리의 도시> 와아카에 와서 이것(Carnes de Asadas, 숯불구이)을 먹어보지 않았다면 와아카에 왔더라는 이야기를 하지 말라는.
우리는 광장 관광안내소에서 얻은 지도 한 장을 들고 씩씩하게 11월 20일 시장 속을 헤집고 연기골목(Pasillo del Humo)을 찾아간다. 입구에서부터 고기 굽는 냄새가 진동하는 것을 보니 우리가 제대로 찾아왔나 보다. 빈자리를 찾아 겨우 앉긴 했는데 어떻게 시키는지 도무지 알 수가 없다. 오가는 종업원을 보고 무조건 Carne(소고기)!부터 외친다. 그다음부터는 완전 손짓 발짓으로 온갖 시늉을 다하니, 토르티야, 구운 야채와 코로나맥주 한 병, 그리고 드디어 숯불고기 한 접시가 차례로 탁자에 놓인다. 허겁지겁 포크로, 급할 땐 손으로 먹기 시작하는데 그 맛이 기막히다.
아무런 양념도 안 한 얇게 썬 소고기를 숯불에 구웠을 뿐인데 담백하고 그 맛이 일품이다. 게다가 구운 야채 맛은 또 어떤가? 대파와 아보카도, 양파 등 여러 야채를 고기와 함께 숯불에 구워주는데 손으로 집어 먹어야 제 맛인가 보다. 폭풍흡입하는 내 모습을 보고 옆자리의 멕시칸 부부가 우스운지 연신 쳐다보며 먹는 법을 직접 보여주기도 하고 이상한 야채를 먹어보라고 건네주기도 한다. 우리는 고기도 맥주도 더 시켜 엄청 먹었는데 계산서를 보니 190페소, 한국 돈으로 14000원 정도이다.
약간의 취기와 들뜬 기분 속에 소칼로광장으로 되돌아오니 밤 시간의 소칼로공원은 앉을자리가 없을 정도로 사람이 넘쳐난다. 와아카 사람들이 모조리 다 나왔나? 공원에는 아직도 한낮의 열기가 남아 있지만, 집에 있는 것보다는 훨씬 시원하고 좋은 가보다.
회랑 한 모퉁이에는 멕시코 전통복장의 마리아치들이 신나게 무슨 노래인지를 연주한다. 현지인들 틈에 섞여 노래를 듣다가, 나도 한 곡조 부탁해 볼까 하는 충동을 겨우 참는다. 광장을 꽉 매운 밤거리 장사꾼의 외침도 정겹기만 하고, 배만 안 부르다면 아마 틀림없이 먹어봤을 옥수수, 망고, 바나나튀김, 타코 등 온갖 거리음식들 앞에 입맛을 다시는 것도 즐겁다. 벌써부터 와아카에 물씬 빠져드는 건가? 사흘간의 와아카가 기대되는 밤이다.
우리가 묵는 A 호텔 역시 내가 좋아하는 중정(Patio)이 있다. 오래된 건물이지만 개조를 해서 아늑하고 깔끔하다. 3층 옥상에는 제법 근사한 풀장도 있다. 아침식사를 제외하곤 가격대비 매우 만족스럽다. 미국 호텔의 반값도 안 되는 가격에 이런 멋진 호텔에 머물 수 있는 것은 멕시코 여행이 주는 보너스다.
우리는 느긋한 아침을 먹고 호텔을 나선다. 오늘은 아무 계획도 없다. 그냥 지도 한 장 들고 발 닫는 데로 다녀보는 거다. 그만큼 와아카는 좁은 곳이니까! 걷다 보니 담에 선인장을 인 멋진 골목이 나오고 안에 멋진 카페가 있는 갤러리도 보인다. 들어가 보니 꽤 넓은 화랑인데 아침이라 그런지 아무도 없다. 젊은 직원이 스페인어로 친절히 안내를 해주긴 하는데, 굳이 알아들을 필요도 없지 않은가?
밖을 나와서 지도에 보이는 직물박물관을 찾으니 바로 그 옆이다. 와아카는 예로부터 원주민 인디오의 전통직물로 유명하단다. 안으로 들어가니 오래된 전통 수공예직물들이 여기저기 걸려 있는데 하얀 벽과 조화되어 아름답기 그지없다. 일일이 손으로 짠 아름다운 수공예 직물들은 하나하나가 그림이다. 아니 그림보다 더 아름답고 가치 있어 보인다. 하나 사고 싶어 나중에 샾에 내려와 가격표를 보다 기겁할 뻔한다. 최하 몇십만 원에서 몇백만 원씩이다. 물가 싼 멕시코에서 이 정도 가격을 매겼다면 그 가치야 물어서 무엇하리. 다만 우리의 주머니가 얇을 뿐이지.
나중에 알고 보니 이 주변이 와아카 전통문화전시관이란다. 주청사 같아 보이는 아주 위엄 있고 근사한 건물 안에도 아름다운 전통공예품들로 가득하다. 문화의 도시 와아카 답다. 모두 무료입장이고 직원들이 곳곳에서 친절하게 안내까지 해준다. 우리는 융숭한 대접을 받는 기분으로 전통공예품 전시관을 천천히 둘러보고 나와 멕시코 자유주의 개혁의 상징이었던 베니토 후아레스 대통령 집을 찾는다. 베니토 후아레스(Benito juarez) 대통령, 그는 바로 와하카가 배출한 원주민 출신의 유일한 멕시코 대통령이었다.
그는 1,806년 와하카의 산골마을에서 태어난 일자무식의 목동이었다. 하지만 우연히 그의 영민함을 발견한 한 신부에 의해 신학교를 다니게 되고 나중엔 변호사를 거쳐 와아카 주지사를 지낸 후 멕시코 대통령까지 된 입지전적인 인물이었다. 와아카의 자랑 중의 자랑이라 주요 거리나 공원에도 그의 이름 베니토 후아레스(Benito Juarez)가 붙어 있는 것은 조금도 이상하지 않다.
어렵게 물어서 찾아간 베니토 후아레스의 집(생가는 아님)은 월요일이라 굳게 문이 닫혀 있다. 유감스럽게도 현지인들도 잘 모를 정도로 방향표시도 없고 집 앞 벽에 조그만 표지판 하나만 달랑 붙어 있다. 서운한 마음으로 발길을 돌리니 교회들만 눈에 뜨인다. 유명하다는 산토 도밍고 교회를 잠깐 들러 본다. 꽤 유명한 교회라는데 내가 들려 본 멕시코교회들은 한결같이 비슷비슷해서 별다른 감동도 영감도 일으키지 못한다. 그저 화려한 제단과 순금장식들만 눈에 띄는 에스파냐식 교회의 아류스런 교회들이다.
월요일이라 갈 곳이 마땅찮다. 와아카의 자랑인 뮤지엄들도 다들 쉰단다. 탐문 끝에 식물원이 문을 연다 해서 찾아갔더니 수시 입장은 안되고 5시에 가이드 동반입장만 가능하단다. 아직 3시간이나 남았는데. 아! 와아카의 심심한 월요일이여!
우리는 별 할 일 없이 11월 20일 시장통엘 다시 가서 와아카 전통음식 Mole Negro와 Res de Carne를 맛보기도 하고, 와아카의 유명한 초콜릿점 Mayordomo를 기웃거리기도 한다. Mayordomo는 한 두 군데가 아니다. 도시 여러 곳에 점포가 눈에 띄고 카카오 빈을 직접 팔기도 하고 초콜릿을 직접 만드는 모습을 보여주기도 한다.
초콜릿이 와아카 전통음식 Mole에 들어가는 필수 재료이기 때문에 와아카의 초콜릿은 꽤나 유명하다. 여기서 초콜릿점은 우리나라의 떡방앗간 같은 구실을 하나보다. 초콜릿 반풍수인 내가 먹어 본 Mayordomo의 초콜릿 맛은 좋은 점수를 받긴 힘든 품질 같다. 초콜릿 자체보다는 핫초코나 음식재료로 주로 사용돼서 그런가 보다.
아까운(?) 오후를 카페에서 디저트나 먹으면서 보내다가 다시 찾아간 식물원은 벌써 사람들로 붐빈다. 알아듣지 못하는 스페인어 가이드를 따라 한 시간 정도를 식물원을 거니는데 선인장과 용설란 등 생전보지 못하던 특이한 열대식물들로 가득하다. 그렇게 넓지 않은 면적에 온갖 열대식물들이 가지가지 잘 가꾸어져 있어 우리같이 동양에서 온 사람의 눈을 즐겁게 해 주고도 남는다.
저녁은 호텔 바로 옆 중국집에서 오랜만에 하얀 쌀밥에 매운 고추가 든 핫소스를 비벼 먹는 것으로 간단히 해결한다. 벌써 멕시코 음식이 조금씩 질려가기 시작하네. 다시 밤늦게 소칼로를 나가 보는데 월요일이라서 그런지 광장은 다소 썰렁하고 어젯밤의 마리아치도 안 보인다. 그리고 우리가 눈독 들이던 군것질 장사들도 다들 사라지고. 오늘은 마리아치에게 한 곡조 부탁할 준비를 단단히 하고 왔는데! 조영남의 '제비'(멕시코 원곡 La Golondrina), 나의 애창곡이여! 언제 한번 들을 수 있으려나? 이 멕시코 땅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