코말칼코의 카카오 농장
아침에 일어나니 밤새 화장실 다니느라 눈이 횅하다. 아내는 오늘 하루 호텔에서 쉬자며 나의 코말칼코(Comalcalco)행을 적극 말린다. 카카오농장에 별 관심이 없는 아내를 호텔에 푹 쉬게 하고, 나 홀로 용감히 출정(?)한다. 배 아파도 Go를 외치며! 영어가 유창한 미남 호텔직원에게 체크아웃 시간(12시)을 좀 연장해 달라고 부탁하니 흔쾌히 저녁 6시까지 연장해 준다. 이 친구 어제 나더러 ADO를 '아도'라 하지 않고 스페인식 '아데오'로 정확히 발음하는 외국인은 처음 본다고 막 비행기를 태우더니 그 덕인가?
우리가 머문 H호텔은 Meriotts가 운영하는 중저가 비즈니스호텔인데 편의시설만 빈약할 뿐 방은 넓고 쾌적하다. 한국의 신라 스테이급인데 숙박료는 50불 정도이다.
어제 마리아가 일러준 대로 Comalli 버스를 타니 코말칼코(Comalcalco)까지 딱 1시간 걸린다. 에어컨이 빵빵 나오는 대형 벤츠버스의 요금은 35페소(원화 2500원). 시골냄새가 풀풀 나는 코말칼코에 도착하니 아침부터 아열대 더운 열기가 겁을 준다. 코말칼코에는 투어가 가능한 3개의 카카오농장이 있다. Hacienda Cacaotera Jesus Maria(CACEP), Hacienda 'Luz'(Wolter)와 Finca Cholula(El Chontal). 지도를 보니 Jesus Maria 농장은 시내에서 10km 정도 떨어져 있고 나머지 두 농장은 택시로 충분히 방문할 수 있는 거리다.
먼저 지도상에 가장 가까운 Hacienda Luz(루스농장)로 가기로 하고 버스정거장에서 택시를 잡는데 무슨 영문인지 승차를 거부한다. 다른 택시도 마찬가지이다. 답답해서 길가의 가게주인에게 묻기도 하고 행인을 붙잡고 묻기도 하는데 도무지 무슨 말인지 알아들을 수가 없다. 아니 돈 내고 택시 타겠다는데 왜 그러지? 동양인이라고는 좀처럼 보기 힘들 이 좁은 바닥에서 약간의 소동(?) 끝에 한 자동차정비소 직원이 내 주소를 보더니 걸어서 15분 거리라며 약도까지 상세히 그려준다.
긴가 민가 하며 터벅터벅 약도를 들고 가르쳐 준 도로를 걸으니 la Luz 농장 간판이 정말 보인다. 가까운 거리라고 안태워준 건가? 어쨌든 옷은 땀범벅이 되었지만 택시비는 아꼈다. 농장 입구에는 제법 널찍한 초콜릿 매장이 차려져 있고 실내에는 두 젊은 여자가 초콜릿작업을 하고 있다. 투어시간은 1 시부터이니 한 시간 이상을 그냥 기다리란다.
더운 길바닥을 걷다가 갑자기 에어컨바람을 세니 그동안 용케 참았던 설사기가 다시 음~~. 열기로 후끈 달아 있는 옥외화장실을 왔다 갔다 한 시간 동안 생 고역을 치른다. 옷은 땀으로 훔벅 젖고. 아침에 가지 말라는 아내 말을 못 이긴 척 들을 걸 그랬나?
1시가 되었는데도 아무도 안 와 결국 80페소를 내고 나 홀로 단독 투어에 나선다. 젊은 여자가이드가 농장을 돌며 열심히 스페인어로 설명하는데 당근 못 알아듣는다. 카카오나무에 달린 빈을 따서 잘라 보여주기도 하고 과육을 먹어보라고 권하기도 하는데 좀 못 알아들으면 어떠리. 시원한 카카오 숲 속을 걷는 것 만으로 살 것 같다. 더구나 젊은 아가씨와 단 둘이 아닌가. 농장은 꽤 큰 규모이지만 지금이 수확철이 아닌지 일꾼도 안 보이고 조용하기만 하다.
이 농장은 Wolter라는 독일계 이민자가 1930년대부터 일구어 온 유명한 농장 중 하나이다. 농장 박물관은 80여 년간의 이 카카오농장 역사를 고스란히 보여주고 있다. 농장에서 사용하던 작업도구며 초콜릿 만들던 오래된 기구 등이 이채롭다. 지금도 몇 명의 노동자들이 전통방식 그대로 초콜릿을 만들고 있는 모습도 보인다.
한 가지 흥미로운 것은 벽에 크게 붙은 초콜릿 전파경로(Ruta critica del chocolate). 1527년 이곳 멕시코에서 처음 에스파냐로, 1606년 이탈리아로, 1615년 프랑스로, 가까운 미대륙에 들어온 것은 유럽을 돌고 돌아 마지막으로 2백 년도 더 후인 1755년이다.
농장 투어가 끝나고 둘러본 정원과 농장저택은 고풍스럽고 아름답게 잘 가꾸어져 있다. 멕시코 대농장(Hacienda) 지주들의 전형적인 저택 모습이다. 원래 멕시코에서는 식민시대부터 있어 온, 원주민 공동소유 형태의 에히도(Ejido)가 농촌사회의 기본 토대였는데, 멕시코 독립 이후 산업화를 급하게 추진하는 과정에서 원주민들은 토지를 잃은 채 내쫓기고 소수의 백인 대지주(Hacendado)에게 토지 소유가 집중된다.
1910년 무렵에는 멕시코 전체 토지의 97%를 겨우 830명의 대지주가 소유한 기록까지 있다. 토지를 뺏긴 원주민들은 대지주의 농업노동자로 전락한다. 한 때는 88%에 이르는 원주민들이 대지주의 농노(Peon)로 전락하는데, 결국 이들의 분노와 불만은 마침내 혁명으로 폭발하고야 만다. 우리가 영화에서나 보던 우아하고 멋진 멕시코 대지주의 농장(hacienda)을 나는 지금 보고 있는 것이다.
매장에서 이 집 초콜릿(criollo 70%)을 선물용으로 좀 산 후 이번에는 택시를 타고 Finca Cholula 농장으로 향한다. 택시기사가 농장에 나를 내려주면서 Corea! Corea! 하고 외치는데 한 곱상한 할머니가 마당에서 놀라는 표정으로 나를 맞이한다. 농장 주인마나님인가 보다. 내가 서툰 스페인어로 농장 견학 왔다 하니 조금 후 미겔(Miguel)이라는 꽤나 나이 든 농장 일꾼 한 사람을 데려온다.
비슷한 연배의 우리는 서로 말은 잘 안 통하지만 카카오나무 밑을 천천히 걷는데 카카오 숲 속은 밖의 열기를 전혀 느낄 수 없을 만큼 선선하다. 내가 아는 단어 Fresca(선선하네)! 를 연발하니 미겔도 Fresca! 를 연발한다. 특히 그늘 역할을 하는 키 큰 나무밑을 지날 때는 하늘이 잘 안 보인다.
30 에이커(12만 평방미터)에 달하는 넓은 카카오 경작지를 소유하고 있는 이 Finca Cholula 농장은 카카오경작뿐 아니라, 멕시코 최대 대학 UNAM과 Ecosur 연구소와 연구협약을 맺고 카카오나무에 서식하는 열대식물과 동물군을 보전하기 위한 공동 프로젝트를 진행하고 있단다.
카카오 작업장에 이르자 이 농장 마나님은 직접 메타테와 볶은 카카오 빈을 가져와 미겔이 직접 분쇄하는 모습을 보여 준다. 나도 한 번 해보는데 보기보다 쉽지 않다. 곱게 간 카카오 메스에다 설탕을 살짝 뿌리니 바로 오리지널 멕시코 초콜릿이 된다. 아무런 가공물도 첨가하지 않은 순수한 초콜릿의 맛과 향. 농장 마나님은 멀리서 혼자 땀을 뻘뻘 흘리며 찾아온 나에게 가급적 많은 것을 보여주려 애쓰는 모습이 역력하다. 투어가 끝난 후 택시를 직접 불러주기도 하고 떠나는 내게 계속 손을 흔들어 준다. 부잣집 마나님이 아닌, 푸근한 시골 할머니의 인심이 전해오는 느낌이다.
바쁘게 두 군데의 농장을 둘러본 후 마지막으로 Finca Cholula 부근에 있는 고고학 지구(Zona Arqueologica)를 향한다. 코말칼코가 자랑하는 피라미드 유적지라는데 안 가볼 수 있나? 막상 유적지에 들어 서니 와아카의 몬테 알반(Monte Alban) 보다 더 적막강산이다. 나 말고는 아무도 없다. 이구아와 청솔 다람쥐만 빼면.
이집트 피라미드(80개)보다 무려 100배나 많은 피라미드가 있는 멕시코에서 이 시골 끝동네까지 뜨거운 한낮에 찾아오는 사람이 나 외에 누가 있으랴? 실은 이 코말칼코 피라미드는 단지 8,000개 중의 하나에 불과한 그저 그런 피라미드가 아니고 꽤 유명한 피라미드 중 하나이다. 8,000개 중에서 단 하나뿐인 돌이 아닌 벽돌로 만들어진 유일무이의 피라미드이기 때문이다. 왜 벽돌이냐고? 이 지역에 돌이 없어서란다.
그런데 몇 해 전 뜻밖으로 이 피라미드가 세계적으로 각광받은 적도 있다. 이 피라미드에서 발굴된 벽돌 한 조각 때문이다. 거기에 마야달력으로 2012년 세계의 종말(?)을 예언하는 글이 새겨져 있었단다. 그 후의 약간의 소동(?)은 각자 상상하시라.
번갯불에 콩 구워 먹듯이 후딱 피라미드 유적지를 돌라본 후 서둘러 버스정거장으로 달려간다. 늦어도 6시 이전에 호텔에 돌아가야 하는데 시계를 보니 3시 반이다. 비야에르모사 시내가 가까워질수록 도로가 꽉 막히고 버스는 가다 서다를 반복한다. 시원한 버스 안에서 오늘 하루를 찬찬히 되돌아본다. 고생한 것보다는 행복감으로 더 충만하다. 무슨 성지순례도 아니고 카카오농장 순례를 설사를 무릅쓰고 땀 뻘뻘 힘들게 다니냐고?
초콜릿 애호가라면 이 정도 수고는 당연하다. 초콜릿 책을 한 두권 읽은 사람은 다 안다. 언제나 첫 장에는 하나같이 아스텍제국 이야기가 나오고 카카오는 멕시코 중원에서부터 퍼져 나가기 시작했다는 사실을. 초콜릿의 영원한 고향 멕시코 타바스코 주까지 일부러 왔다면 적어도 내겐 카카오농장 구경은 선택이 아닌 필수였다.
그런데 막상 와서 보니 이렇다 할 정보도 없고 누구 하나 여행기 남긴 블로그도 없었다. 과연 나 혼자 그곳을 찾아갈 수 있을까? 막막하고 약간은 걱정됐다. 어제 만난 여행사 직원 마리아까지 카카오농장 투어하겠다는 외국인은 내가 처음이라지 않던가? 때로는 남들이 다 가는 길보다는 안 가본 길을 가는 재미와 쾌감도 크다. 힘들고 고생스러웠던 여행일수록 그래서 더 추억이 되고 스토리가 되나 보다. 오늘 여행이 훗날 바로 그런 여행이었기를 바란다. 고생은 잊고 행복만 생각나는.
급히 택시를 타고 호텔로 돌아오니 정확히 5시 30분. 그래도 샤워하고 옷 갈아입기에는 충분한 시간이다. 호텔 문을 나오면서 우리 둘이 다 행복해한다. 아내는 모처럼 시원한 호텔방에서 하루를 푹 쉬어서 힘이 나고, 나는 설사로 엄청 고생했지만 평생 가보기 힘든 카카오농장을 마음껏 누벼 봤으니 더없이 좋다. 무작정 다니는 여행도 때로는 이처럼 뜻하지 않은 행복감을 선사하나 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