필자는 30여 년 경력의 초등학교 현직 교사이다. 교직 생활의 황혼에 접어든 지금, 오로지 학생들만을 위해 멋모르고 살았던 젊은 시절이 아련하게 떠오른다.
여러 갈래의 약속들은 나에게 삶을 지탱하는 활력소가 되기도 하고 때로는 슬픔과 절망을 안겨주는 원망의 대상이 되기도 했다. 인생의 대부분 시간을 차지했던 교직 생활에서 제자들과 함께했던 약속을 되뇌며 잠시 회한에 젖는다.
1990년대 중반, 난 서울 강북지역의 한 초등학교 교사로 부임했다. 지금도 마찬가지긴 하나 당시 젊은 남교사의 등장은 학생들에게 엄청난 호기심을 자극하기에 충분했다. 교육대학을 갓 졸업한 스물네 살의 어린 남교사, 나는 학생뿐 아니라 학부모, 그리고 동료 선배 교사들로부터 분에 넘치는 관심을 한 몸에 받았다.
여느 초임 교사들처럼 의욕에 가득했고 학교로 출근하는 일이 너무나 흥미로웠다. 교육에 대한 신념으로 한껏 무장했고 넘치는 교육열은 하늘을 찌를 만큼 충만했다. 물론 서투르고 미숙한 행동도 있었지만, 학생들에 대한 사랑으로 충분히 상쇄할 수 있다는, 그저 치기 어린 확신과 자신감만으로도 그 부족함을 채워갈 수 있었다.
‘오늘은 어떤 즐거운 일이 생길까?’ 하는 막연한 기대감에 새벽같이 학교로 출근했다. 당시 숙직하시던 직원들까지 놀랄 정도였으니 더 이상 설명할 필요가 없을 터이다.
난 모든 분야에서 학생들에게 최선을 다했다. 수학 문제집을 직접 복사하여 풀게 하는 등 학습지도에 열의를 쏟았고 생활지도나 상담 등 학습 외적인 부분에도 학생들과 늘 함께했다. 남학생들이 좋아하는 축구도 같이하여 다른 반 학생들의 부러움과 질투를 자아내기도 했다.
이 무렵의 교직 생활 중 가장 기억에 남는 것은 학생들이 쓴 글을 꾸준히 모아 매년 학급문집을 만들어 낸 일이었다. 워낙 글쓰기를 좋아했었고 거기에다 학생들에 대한 열정까지 더해져 담임을 맡을 때마다 정성스레 문집을 제작하였다. 그냥 대충대충 한 일이 아니었다. 밤을 새워가며 학생들의 서툰 글을 편집하고 또 수정해 가면서 최고의 문집을 만들고자 노력했다. 학생들에게 문집 비용은 받지도 않고 스스로 제작 비용을 마련했다. 오히려 소문을 들은 학부모들이 자발적으로 십시일반(十匙一飯) 돈을 모아서 제작비로 보태 준 적도 있었다.
「별을 사랑하는 우리들의 작은 이야기」라는 제목으로 처음 만들기 시작한 학급문집은 어느덧 20호를 넘겼다. 워드프로세서로 작성하고 출력한 무감정의 글이 아닌 학생들이 직접 정성 들여 한 글자씩 펜으로 쓴 글들은 너무나 소중한 재산이었다. 문집을 읽다 보면 글을 쓴 학생의 얼굴이 떠오르고 교실에서 일어났던 에피소드들이 자연스레 영상이 되어 머릿속을 스쳐 간다.
2002년 3월 1일 대학로 마로니에공원 시계탑. 오후 4시
무심코 넘긴 첫 문집의 첫 페이지에는 이 문장이 빛바랜 채 희미하게 남아 있다. 바로 이것이 나에게는 가장 기억에 남는 약속이다. 그때의 일이 낮달의 희미한 모습처럼 아련히 떠오른다.
1995년부터 난 자원하여 3년을 연속해서 6학년 담임을 맡았다. 졸업식이 다가오는 2월이 될 때면 학생들과 헤어져야 한다는 생각에 너무나 허전하고 아쉬웠다. 고심 끝에 학생들과의 소중한 추억을 간직할 수 있는 한 가지 방법이 떠올랐고 그들에게 ‘약속’이라는 이름으로 그것을 제안하기에 이르렀다. 졸업식 날, 학급문집의 맨 첫 페이지에 우리들의 약속을 써 보도록 하였다. 그리고 나는 학생들에게 진심 어린 목소리로 이야기했다.
얘들아, 우리 7년 후인 2002년 3월 1일에 마로니에 공원 시계탑 아래서 오후 4시에 만나도록 하자. 그때는 여러분들이 스무 살 성인이 되는 해야. 함께 만나서 반갑게 인사하자꾸나.
아이들은 약간 신기하면서도 한편으로는 의아하다는 표정으로 반응했다.
선생님! 2002년이 정말 오나요?
1995년, 그때만 해도 학생들은 2000년대가 올 거라는 생각조차 해본 적이 없었을 터이다. 게다가 어린 자신들이 성인이 된다는 것도 상상하기 쉽지는 않았을 것이다. 그 약속에는 학생들 각자 다른 중학교, 고등학교로 헤어져 열심히 살다가 어른이 되어 만나서 서로의 모습을 나누자는 의미가 담겨 있었다. 즉, 치열한 사춘기를 보내고 예전 어렸을 때의 순수했던 자신들로 돌아가 반갑게 만나자는 낭만 가득한 약속이었다.
난 그 이후로도 3년 동안 졸업식 날마다 똑같은 내용의 약속을 했다. 물론 학생들만 매년 바뀐 채로 말이다. 그리고 약속한 해로부터 7년 후 3월 1일에 같은 장소에서 제자들을 3년 동안 해마다 만났다.
제자들과 나는 그 세 번의 3월 1일에 분식점이 아닌 민속주점에서 막걸리를 주고받으며 거나하게 취한 목소리로 이야기를 나누었다. 그들은 기다렸다는 듯이 밤이 새는지도 모를 만큼 오랫동안 초등학생 시절의 이야기로 꽃을 피웠다. 학창 시절에 어렵기만 했던 선생님과 술잔을 주거니 받거니 하고 있으니 더더욱 신기하고 즐거웠을 것이다.
난 제자들의 즐거워하는 모습을 보면서 흐뭇한 마음과 함께 ‘보람’이라는 추상적인 단어의 의미를 조금은 이해할 수 있었다. 그리고 내가 제안했던 약속이 그들에게 긍정적인 영향을 미쳤을 것이라는 자기만족은 덤이었다.
세월은 시위를 떠난 화살같이 흘렀고 삶의 모습은 하루가 다르게 급박하게 변해갔다. 그 시절 신명을 바쳐 정성을 쏟았던 덕분인지는 모르지만, 제자들 몇몇과는 지금까지도 정기적인 모임과 경조사도 함께 나눈다. 어느 제자의 결혼식 주례까지도 기꺼이 서 주었다. 초등학교 선생님과 제자의 이러한 모습은 보기 쉬운 일은 아닐 것이다. 불혹의 나이에 접어든 그들은 자신이 속해있는 직장과 사회에서 중추적인 역할을 하고 있다. 때로는 꼰대 취급을 받기도 하며 어느새 자신들을 밀어내듯 서서히 자리 잡아가는 MZ세대, 또는 젠지 세대(Generation Z)들과의 힘겨운 줄다리기를 토로하기도 한다. 그럴 때면 항상 등장하는 멘트가 그때 했던 그 약속이다.
어떤 제자는 한 달 전부터 손꼽아 약속한 그날을 기다렸고, 전날에는 가슴이 두근두근하여 거의 뜬눈으로 밤을 꼬박 새웠다고 했다. 잊은 줄만 알았던 초등학교 친구들의 모습과 함께 선생님과 있었던 많은 일들이 새록새록 떠올랐다고 했다. 그리고 졸업식 때만 해도 자신이 스무 살이 되어 그 약속을 지킬 수 있을 것이라는 생각조차도 하지 못했다고도 말했다.
그 약속이 지켜진 후 20년이 또 흘렀다. 어느덧 나를 비롯한 학생들은 누군가의 부모, 배우자가 되어있다. 올해도 제자들은 그때의 약속을 또 습관처럼 이야기한다. 술 한잔 걸치면 안줏거리처럼 더 자주 얘기한다. 그만큼 졸업식 날의 그 약속이 이 녀석들에게는 어지간하게도 인상 깊었나 보다.
한 갈래의 약속은 비록 웅장하지는 않지만, 자그마한 삶의 목표를 만들어 주기도 한다. 그리고 그 목표는 다시 자신의 삶을 영위하는 도구이자 이유가 되기도 한다. 특히 억지로 지켜야 할 의무적인 약속이 아닌 소중한 약속들은, 지치고 힘든 인생살이의 언저리에 희망이라는 감미료를 살짝 얹어준다.
초임 교사 시절 사랑했던 학생들과 했던 이 세 번의 약속을 ‘인생 약속’으로 간직하고 싶다. 하루 종일 가을 장맛비가 추적추적 내린다. 혼잣말로 조용히 이야기해 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