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학(文學): 언어를 예술적 표현의 제재로 삼아 새로운 의미를 창출하여, 인간과 사회를 진실되게 묘사하는 예술의 한 분야(위키백과)
일반적인 문학의 정의이다. 언어를 제재로 인간의 삶을 묘사하는 일이 어디 말처럼 쉽겠는가. 심지어 문학을 제대로 공부하지도 않은 필자가 문학에 대하여 생각을 밝히는 일은 자칫 언어도단에 빠질 수 있는 꽤 심각한 일이 아닐 수가 없다. 하지만 다행히(?) 필자의 글은 사회적으로 그만한 영향력은 갖추지 못했기에 안심하고, 지금까지 겪었던 문학(특히, 글 쓰기)과 관련된 경험과 생각을 편하게 이야기하려 한다.
문학이 무슨 의미인지도 잘 모를 시절인 중학교 2학년 봄부터 서른 살 무렵까지 일기를 썼다. 매일 쓰지는 않았지만, 최소한 일주일에 두 번 정도는 계속 썼다. 중학생 시절에는 거의 매일 썼고 고등학생 때는 공부에 치여 거의 쓰지 못했다. 그리고 대학생 시절 다시 매일 쓰다시피 했었고 심지어 분량도 적지 않았다.
글이 그다지 유려(流麗)한 것도 아니었다. 그냥 신변잡기에 그날그날 있었던 소소한 일들, 생각했던 일, 주변 사람들로부터 느낀 일말(一抹)의 감정들…… 어쩌면 일기에서 써야 할 주제들이 제대로 담겨 있었는지는 모르겠다. 하지만 난 항상 내 글이 잘못되었고 문장력은 부족하다는 생각에 사로잡혀 있었다.
일기가 쓰기 편안한 이유는 아무에게도 보여주지 않는 비밀의 글이라는 점이다. 지금까지도 내 일기를 본 사람은 아무도 존재하지 않는다. 내 글이 어느 정도 깊이와 완성도를 갖추었는지 판단할 근거가 없었다. 아니, 판단 받고 싶은 생각이 전혀 없었다. 누가 시키지도 않은 일, 심지어 대다수 학생이 가장 지겨워하고 싫어하는 숙제로 정평이 나 있는 ‘일기 쓰기’를 자신이 스스로 시작했다는 것 자체가 이미 문학적 감수성을 갖추었다는 의미일 것이다.
중학생 시절, 우연히 읽게 된 윤동주(尹東柱, 1917~1945) 시인(詩人)의 「서시(序詩)」는 시(詩)에 대한 내 생각을 바꾸게 해 준 결정적인 글이었다.
서시(序詩)
윤동주
죽는 날까지 하늘을 우러러
한 점 부끄럼이 없기를,
잎새에 이는 바람에도
나는 괴로워했다.
별을 노래하는 마음으로
모든 죽어 가는 것을 사랑해야지
그리고 나한테 주어진 길을
걸어가야겠다.
오늘 밤에도 별이 바람에 스치운다.
「별 헤는 밤」 일부
가슴 속에 하나 둘 새겨지는 별을
이제 다 못 헤는 것은
쉬이 아침이 오는 까닭이요,
내일 밤이 남은 까닭이요,
아직 나의 청춘이 다하지 않은 까닭입니다.
본문에는 한자어가 단 하나도 나오지 않는다. 순전히 우리말로, 게다가 몇 행에 불과한 짧은 시이다. 하지만 시를 읽는 순간 밤하늘에 별이 아름답게 빛나고 맑은 공기가 콧속을 스치고 풀잎이 너무나 예뻐 보인다. 그리고 그 공간에 조용히 앉아 밤하늘을 바라보는 내 모습이 그려져 버린다. ‘시(詩)는 이런 마법을 갖고 있구나!’라는 생각을 가지게 되었다.
윤동주는 일제 강점기의 저항 시인이자 독립운동가이다. 28세에 일본의 후쿠오카(福岡) 감옥에서 생체실험으로 사망했다는 설이 유력하다. 윤동주 시인에 빠져 그의 작품을 샅샅이 찾아 모두 읽었다. 그리고 성인이 된 후에는 중국 연변(延邊)의 용정(龍井)에 있는 그의 고향과 학교, 묘지를 찾아가 보았다. 그의 숨결을 느끼고자, 쉽지 않은 여정을 선택한 것이었다. 직접 본 그의 흔적은 너무나 감동적이고 찬란했다. 2016년 개봉한 영화 『동주』를 여러 번 보았다. 그의 생각과 행적들을 간접적으로라도 느끼고 싶었다. 그가 다녔던 일본 교토의 도지샤(同志社) 대학도 여러 차례 방문했었다.
경기도 연천군 소재 '당포성'(고구려 성) *해마다 가을이면 별을 관측하는 축제가 열린다.
고등학교 1학년 때, 별생각 없이 친구로부터 소개받고 읽었던 이문열(李文烈) 작가의 소설들은 사춘기 소년의 문학적 감성에 불을 지피는 계기가 되었다.
가장 감명 깊게 읽었던 그의 소설 「그대 다시는 고향에 가지 못하리」는 ‘쇠락하고 사라진 것들을 위해’라는 부제가 어울릴 만큼 고향에 대한 향수(鄕愁)를 표현한 이야기이다. 사실, 고향에 대한 그리움이나 안타까움은 한 개인만의 특별한 정서는 아닐 것이다. 인간이라면 누구나 회귀(回歸)의 욕구를 지닌다. 특히 인간 소외의 공간인 대도시에서 성장했던 사람들은 이러한 귀소(歸巢) 욕구가 ‘고향’이라는 자신이 머물렀던 특별한 장소로 쏠리게 되는 것이다. 필자도 마찬가지다.
이문열 소설의 다수가 이러한 주제를 내포할 진데, 그에 공감하였고 현재까지도 필자의 문학적 정서의 기반으로 자리 잡고 있다.
대학입시 준비로 바쁜 와중에도 쉬는 시간, 점심시간 틈틈이 소설을 읽었다. 그냥 소설이 흥미로웠다. 문학적 재능의 유무를 떠나 난 그저 이유 없이 소설이 재미있었고, 그런 문장을 쓰는 소설가들이 여느 스포츠 스타나 연예인보다 훨씬 멋있어 보였다. 물론 그들의 재능이 너무 부러웠다.
중·고등학교 시절에는 장차 국어국문학과에 진학하여 사람들의 가슴을 따듯하게 하는 작가가 되고 싶었다. 나의 글을 읽은 누군가가 삶의 희망을 얻을 수 있게 만드는 멋진 작가가 되고만 싶었다. 하지만 난 교육대학을 택하게 되었고 문학에 대한 나의 열망은 거기서 접히게 되었다. 교직 생활 가운데서 문학을 한다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다. 난 국어교육이 아닌, 국문학을 하고 싶었고 교육대학에서의 국어교육 수업은 나름 재미있었지만 내가 생각했던 국문학과는 거리가 있었다.
문학 수업에서의 일이다. 담당 교수님께서 수강생들에게 강의 시간마다 한편 씩 암송할 것을 과제로 제시하였다. 대부분 학생은 순간 난감해하는 눈치였다. 난 조금 달랐다. 그냥 일주일에 시 한 편씩을 외우는 일이 재미있었다. 등하교 지하철에서 수첩에 적은 시를 외웠다. 아니 그냥 몇 차례씩 읽었다. 그런데 이상하게도 시의 장면들이 떠오르며 시어(詩語)들이 머리에 알알이 박혔다. 마치 알아서 제자리를 찾아가는 퍼즐처럼……
어느 날 강의 시간, 내 발표 차례가 되었다. 난 박인환의 ‘목마와 숙녀’라는 시를 암송하기 시작했다. ‘한 잔의 술을 마시고’라는 첫 구절에서 학생들의 웃음이 터져 나왔다. 아마 ‘술’이라는 단어가 나왔기 때문일 것이다. 하지만 이내 학생들은 침묵에 빠졌다. 난 그렇게나 길고 난해한 시를 멈추지 않고 스스럼없이 읊어 나갔다. 지그시 눈을 감고 고개를 살짝 든 채, 그리고 약간은 떨리는 목소리로 「목마와 숙녀」를 강의실 공간으로 잔잔하게 내던졌다. 암송을 마친 순간, 학생들과 교수님은 누가 먼저랄 것 없이 환성과 함께 손뼉을 쳤다. 교수님의 칭찬이 잇따랐다.
이듬해, 나와 같은 강의를 들은 후배가 말해주었다.
선배, 교수님께서 오늘 선배 얘기를 해 주셨어요. 작년에 ‘목마와 숙녀’라는 어려운 시를 암송한 남학생이 있었는데 너무 좋으셨다고요.
‘내가 문학에 재능이 있는 건 아닌가?’하는 의구심을 갖게 된 첫 번째 사건 아닌 사건이었다.
그 시절 친구들과 종로서적이나 교보문고 등 대형서점에 자주 들렀었다. 집에서 가까운 거리가 아니었지만, 공강(空講)이 있거나 방학 때면 여러 대형서점을 들러 하루 종일 책을 읽곤 하였다. 그냥 선 채로 읽거나 조금 힘들 때는 구석에 쪼그려 책 한 권을 다 읽어버리기도 했었다. 그냥 그 공간이 좋았다. 편안했다. 작가들의 재능이 너무 부러웠고 거룩하게만 보였다. 하지만 난 내가 직접 작가가 될 수 있다고는 전혀 생각하지 못했다. 아마 비(非)전공자는 작가가 될 수 없다고 스스로 판단해 버렸던 것 같다.
10여 년 뒤, 비슷한 사건이 생겼다. 평소 애독하던 ‘샘터’ 월간지의 독자 투고란이 눈에 들어왔다. 일상생활에서의 소소한 감동을 사연으로 투고하면 채택되어 샘터 지면에 실리는 기회였다. 별다른 생각 없이 두 장 정도의 짧은 글을 작성해서 전자우편으로 제출했다. 독자들이 한 달 동안에도 수십 편씩 투고한다는 말을 들은 터라 특별한 기대 없이 그냥 했던 일이다. 며칠 후 샘터 편집부에서 전화가 왔다. 내 글이 채택되었다는 내용이었다. 기분이 좋았다. 처음으로 글을 써서 세상에 내어 보였고 인정을 받았다. 너무 뿌듯했다.
하지만 그런 일들과는 별개로 하여 ‘등단(登壇)’은 엄두도 내지 못했다. 가끔 들려오는 주변 사람들의 등단 소식은 먼 나라의 이야기만큼 나와는 관계없는 일이었다. 등단 자체가 엄청난 노력과 과정이 필요할 것이라는 나름의 생각, 그리고 시도조차 못 할 것이라는 자괴감들은 여전히 존재했다. 그리고 당시 대학원 박사과정과 논문 준비로 바빴던 것도 등단에 대해 꿈도 꾸지 못하게 했던 원인 중의 하나였다.
그리고 또 세월은 속절없이 흘렀다.
작년에 독립출판으로 여행 수필집 한 권을 간신히 출간했다. 말이 되건 되지 않건, 망설이거나 눈치 볼 것 없이 내 글을 세상 밖으로 내보였다. 물론 지금 읽어보면 비문(非文)과 오탈자들이 수두룩하다. 그렇지만 ‘잘못하면 혼자서만 글을 쓰다가 그냥 내다 버리겠구나!’ 하는 우려와 이젠 제대로 된 글쓰기를 배우고 싶다는 열망이 함께한 결과였다.
올해는 수필작가와 시인으로 등단에 성공했다. 여전히 부끄러운 문장이지만 이름 앞에 작가라는 수식어가 붙은 이상, 난 더욱더 소명을 갖고 글을 써야 한다. 일견 부담이 된다. 하지만 내가 쓴 글을 부끄러워해서는 좋은 글을 쓸 수 없다. 죽이 되던, 밥이 되던 일단 세상 밖으로 내놓아야 비판도 받고 칭찬도 받을 수 있다. 문고리를 잠그고 쓴 글은 살아있기 힘들다. 글에도 생명을 불어넣어야 할 것이다.
요즈음은 시(詩)를 열심히 공부한다. 전문적으로 시작(詩作)을 공부한 적은 당연히 없다. 그냥 내가 좋아서 시작법(詩作法)에 대한 책을 읽고, 유튜브를 본다. 시를 쓰는 일은 어렵다. 수필과는 또 다른 프로세스의 일이다. 마치 각기 다른 색깔의 돌을 쌓아 견고한 담을 만드는 일처럼 느껴진다. 마디마디 홈을 맞춰야 하고 추가로 색상까지 고려해야만 한다.
많은 부분이 부족하지만, 나름대로 자신 있는 것이 한 가지 있다. 그것은 ‘글을 읽으면 어느 순간 감동을 잘 받는다’는 것이다. 굳이 재능이라 표현하고 싶지는 않다. 아마 ‘감수성’ 정도가 알맞을 것이다. 이 나이에도 예전만큼은 아니지만 아직 감수성이 살아있다는 것이 내게는 커다란 장점이라는 생각이 든다. 감수성은 전공한다고 해서 배울 수 있는 것이 아닐 것이다. 좋은 시를 느낄 수 있다는 것은 좋은 시를 쓸 수도 있다는 방증일 터이다.
시적(詩的), 문학적 감수성을 발현시키기 위해 사물이나 현상에 대해 깊이 생각해 본다. 메모지나 수첩에 아이디어가 떠오를 때마다 바로바로 기록한다. 출근길 운전 중에도 신호에 걸릴 때마다 시상(時象)을 기록하는 위험한 짓을 한 적도 있다. 시는 함축적이고 수필은 유려(流麗)해야 한다. 서로가 약간은 다른 형태의 표현 방식이나 결국은 내 마음에 있는 무언가를 글로써 정확히 우려내야 한다는 공통점이 있다. 형식이나 표현의 방법은 시간을 두고 조금씩 다듬어 갈 요량이다.
글쓰기에 대한 필자의 졸견(拙見)을 펴보았다. 하루에 한 편씩 짧은 글을 오랫동안 써 볼 작정이다. 한 몇 년 정도 꾸준히 쓰다 보면 낙숫물이 돌에 홈을 만들 듯 눈에 보이는 성과가 나타나지 않을까 싶다. 어쩌면 그럴듯한 멋진 시 한 편 정도는 만들어지지 않을까 혼자 상상해 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