심한 두통에 가려서 잘 느끼지 못했던 치통이 견딜 수 없이 힘들어 오랜만에 치과를 찾았다. 어렸을 때나 나이를 한참 먹은 지금이나 치과에 가는 일은 항상 겁이 나고 조금이라도 미루고 싶다. 아니, 그냥 치과에 가지 않고 진통제만 먹고 견디고 싶은 마음이 굴뚝같다.
사랑니를 빼고 나오면서 왜 입 안쪽 깊이 있는 치아를 ‘사랑니’라 말하는지 갑자기 궁금했다. 여러 이유가 있을 터이다. 어렸을 때는 사랑니를 빼고 나면 앞으로는 사랑을 하지 못할 거라 믿었다.
사랑니는 가장 뒤에 어금니를 일반적으로 가리키는 말이다. 가운데 앞니를 기준으로 하여 좌우로 각 8번째 자리에 있다. 음식을 씹는데도 그다지 필요하지 않고 양치질할 때 칫솔이 잘 닿기도 어렵다. 덕분에 쉽게 충치가 된다. 한마디로 없어도 되고 있어도 되는 존재지만 썩기는 가장 쉬운 치아다. 그런데 왜 이름이 사랑니일까? 사랑니의 어원이 궁금했다. 그리고 어금니, 송곳니와 달리 왜 ‘사랑’이라는 말이 치아의 이름에 붙는지도 알고 싶어졌다.
초등학교 때 어머니에게 억지로 끌려가다시피 하면서 간 치과에서, 의사는 무시무시하게 기다랗고 번쩍거리는 펜치 모양의 도구로 내 치아를 사정없이 뽑아 버렸다. 긴 의자에 누워서 천정에 보이는 눈부신 조명에 나도 모르게 눈을 감게 된다. 옆자리의 이름 모를 환자가 내뱉는 절박한 신음은 두려움을 배가시킨다. 이미 시작하기도 전에 주눅이 들어 버린 상태이다.
그때의 ‘우드득’ 하는 느낌이 지금도 잊히지 않는다. 길쭉한 의자에 누웠을 때 이미 공포는 극에 달했다. 마취 덕분에 통증이 심하지는 않지만 망치나 펜치로 내 치아를 비틀거나 부서뜨리는 충격은 머릿속까지 고스란히 전달된다. 할 수 있는 일은 그저 왼손을 들어 불편함을 의사에게 알리는 일뿐이다.
눈을 가려서 더 무서웠다. 마취할 때
“따끔합니다.”
라는 간호사의 말은 거짓이었다. 마취 주사의 날카로운 바늘은 연하디연한 내 잇몸을 찢어 놓았다. 그것은 ‘따끔함’이라는 단어로 표현할 정도의 작은 고통이 아니었다. 의사는 발치(拔齒) 도구로 치아를 살며시 빼는 것이 아니었다. 도구를 비틀면서 치아를 힘껏 뺐다. 마치 두꺼운 각목에 박힌 대못을 잡아 사정없이 뺄 때처럼…
그때의 기억 때문에 지금도 치과 진료는 쉽지 않다. 단, 나이가 들면서 깨달은 것은 치아가 아프면 조금이라도 치과에 빨리 가서 치료받아야 한다는 사실이다. 왜냐하면, 어차피 상한 치아는 언젠가는 빼야 한다는 것을 경험으로 이미 깨달았기 때문이다.
사랑니는 그냥 발치만 하면 될 줄 알았는데, 의사의 말을 들어보니 치과에서는 나름대로 큰 수술이었다. 그리고 사랑니를 뽑은 후에 여러 합병증으로 사망까지 할 수도 있다는 말도 들었다.
사랑니를 빼는 느낌은 다른 치아와는 사뭇 달랐다. 빼는 느낌은 ‘뽀각뽀각’, ‘뿌드득’하며 두드려 부수는 느낌이 머리까지 그대로 전달되었고 통증도 훨씬 심했다. 게다가 발치하고 난 후에도 출혈과 통증으로부터 쉽사리 회복되지 않았다.
그렇다고 해서 사랑니에 통증이 있는 상태로 계속 둘 수도 없었다. 사랑이 그런 건가? 빼야 할 건 빼야 하는가? 사랑하지만 통증이 있으면 더 아파도 빼버려야 하는가? 라는 의문을 품어보았다.
자의던, 타의던 두 사람의 사랑하는 관계가 끝나고 나서, 그 아픔이 잘 치유되는 것은 사랑니를 뽑은 후에 합병증 없이 온전히 회복하는 것과 같을 것이다. 쉽지는 않지만 그렇다고 전혀 불가능한 것도 아니다. 약을 먹든, 휴식을 취하던 발치하고 난 후의 치유 방법은 결국 사랑이 끝난 후의 각자가 해야 할 일과 다름이 없다. 술을 먹든, 다른 일에 집중하던, 아니면 두꺼운 솜을 물고 몇 시간을 억지로 버티는 것처럼 불편하지만 시간에 맡겨 자연치유를 하던 그 방법에 대한 선택은 결국 각자의 몫일 터이다. 이미 끝나 버린 사랑은 내가 무슨 짓을 하든 절대로 돌이킬 수 없는 법이다.
사랑니가 아픈 채 시간이 지나면 멀쩡하던 사랑니 옆의 치아가 차츰 썩어가는 것을 엑스레이 사진으로 확인했다. 그 치아는 신경이 있는 부분 바로 위까지 썩어가고 있었다. 얼마 가지 않아서 엄청난 통증이 몰려올 것이 뻔하다. 썩은 사랑니를 원천적으로 제거하는 것 외에는 특별히 다른 방법이 존재하지 않는다.
그냥 나름대로 사랑니의 정의를 내려보았다.
‘사랑니’는 ‘사랑’, 또는 ‘사랑하는 사람’처럼 함께 있을 때는 좋지만 없다고 해서 불편한 존재는 아니다. 유효기간이 만료되어 서로 헤어져야 할 때는 후회 없이 빨리 잊어야 할 존재라 할 수 있다.
제 역할을 하지 못하는 사랑니는 잠시 아프더라도 어떻게든 빨리 빼야 한다. 사랑하는 사람도 그럴 것이다. 사랑한다고 해서 다 나에게 좋은 영향만을 주는 것은 아닐 것이다. 자칫 미련을 두고 그 사랑을 붙잡고자 어설픈 노력을 무리해서 한다면 그 상처와 고통은 내 마음속의 멀쩡했던 다른 곳으로까지 침범하여 치명적인 악영향을 줄 것이다.
헤어짐의 고통보다 더 큰 고통이 어디 있을까? 이루어지지 않거나 절대 이루어지지 못하는 사랑은 이미 섞어 버린 사랑니처럼 더 큰 고통을 감내하고서라도 제거해야 하는 것은 아닐까. 그 제거의 고통이 내 머리에 고스란히 전해와도……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