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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자화상 Dec 11. 2024

06. 아버지의 지갑

돌아가시고 나서야 겨우 부르게 되는 그 이름! 아버지~

무더운 8월의 어느 여름날. 우연히 아버지의 젖은 지갑을 보게 되었다. 형편없이 닳은 얇디얇은 지갑이 무척이나 초라해 보였다. 세탁기를 돌리면서 지갑이 든 채로 아버지의 바지를 그냥 통 안에 넣었나 보다.



햇볕에 말리려고 지갑에 든 물건들을 꺼내 베란다의 편평한 탁자에 가지런히 놓았다. 천 원짜리 지폐 몇 장과 운전면허증, 국가유공자증, 병원 진료 카드가 전부였다. 아버지의 지갑에서 나온 것들은 아버지께서 보내셨던 지난 세월 혹은 지금의 모습이었다.

어려운 집안 형편 때문에 학업을 접고 군(軍)을 선택했던 아버지는 나를 임신한 어머니를 두고 월남전에 참전했으며, 그 후로도 십 수년간 군에 몸을 바치셨다.

군을 제대하고 접하게 된 사회는 아버지의 생각과는 너무나 달랐다. 손대시는 사업마다 실패를 거듭하셨고, 사기꾼들에게 속아 빚보증까지 서게 되셨다. 퇴직금뿐 아니라 가지고 있던 집도 남에게 넘겨주고 형제들에게 손을 벌려야 하는 힘든 시간을 보내셨다. 결국, 우리 가족은 너르게 편히 살던 아파트를 헐값에 팔아 아버지의 부채를 갚아야 했고 낡은 아파트 전세로 쫓겨나듯 들어가 간신히 살아야만 했다.

예순이 훌쩍 넘은 아버지에게 남은 것은 당뇨병과 간질환, 폐질환 등의 갖가지 질병과 월남전 참전으로 그나마 받게 된 국가유공자 증서뿐이었다. 아버지의 지갑에서 나온 물건들을 보고 가슴이 시큰해지지 않을 수 없었다. 아버지는 왜 이토록 힘든 인생을 살아오셨을까?

초등학교 6학년 때의 일이다. 경기도 북부, 전방 지역에서 학교에 다녔다. 새벽부터 일찍 일어나 집에서 출발해 1시간가량을 걸어야 등교 시간에 겨우 맞출 수 있을 정도로 학교는 멀었다.

아버지는 다음 해 서울로 전출을 가실 예정이었다. 나는 서울의 중학교에 배정받기 위해 미리 친척 집에 머무르며 초등학교에 다녀야만 했다. 당시 서울 시내의 중학교 배정을 받기 위해서는 6학년 2학기에 서울의 초등학교에 다니고 있어야 했다. 그렇게 난 서울의 한 친척 집에 혼자 맡겨졌다.

아무리 가까운 친척 집이라고 해도 자기 집에서 부모님의 보살핌을 받는 것에 비할 수 없다. 어린 나이에 그 외로움과 서글픔을 감당하기에는 너무 힘겨웠다. 하루하루를 부모님과 동생을 그리워하며 지내던 것이 아직도 선명하게 기억난다.

친구들과 어울려 지내던 낮 동안은 모르고 지내다가 밤이 되어 잠자리에 들면 부모님과 동생의 얼굴이 떠오르며 나도 모르게 눈물이 흐르곤 했었다. ‘눈물로 베갯속을 적신다’는 의미가 무엇인지 그 어린 나이에 이미 알게 되었다. 누운 채 눈물이 양쪽 볼을 타고 계속 흘러 베개가 축축해지는 것이었다. 사무칠 정도로 그리운 마음은 매일 그렇게 소리도 없이 나를 찾아왔다.


‘엄마, 아빠 보고 싶어.’


 난 소리도 내지 못하고 혼자 울먹이며 부모님을 찾았다. 마치 태어난 지 한 달도 채 안 되어 어미 개에서 떨어져 우리 집에 왔던 강아지가 밤마다 슬프게 울부짖었던 것처럼…

그러던 어느 날이었다. 막 잠자리에 들었을 무렵, 아버지께서 갑자기 내가 머물던 친척 집에 오셨다. 서울의 부대에 일이 있어 장교용 지프를 타고 오셨다가 내가 거처하는 곳으로 오시게 된 것이다. 난 잠결에 아버지가 거실에 들어오시고 친지분들과 이런저런 이야기를 나누시는 목소리를 들었다.

아버지께서 내가 자는 방으로 들어오셔서 나를 가만히 안아서 들어 올리시는 것이 느껴졌다. 하지만 차마 눈을 뜨지 못했다. 창피해서인지 모르겠지만 난 자는 척을 했다. 지금 생각해 보면 참으로 어처구니없는 일이다. 왜 그토록 보고 싶던 아버지께서 오셨는데 난 눈도 뜨지 못하고 아버지에게 매달리지도 못했을까? 내가 내성적이고 소극적인 성격을 가졌다는 것은 잘 알고 있다. 그렇지만 아버지에게도 반갑게 대하지 못할 정도였을까?

어른이 되어서야 그 이유를 알 것 같다. 난 눈을 뜨는 것이 두려웠다. 아버지를 보면 눈물이 터져버릴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나를 자는 척하도록 만들었을 것이다. 그렇게 난 아버지에게 단 한 번도 ‘사랑해요’라는 말을 해 드리지 못했다. 아버지, 어머니께서 계시는 집에 들를 때마다 서해로 뉘엿뉘엿 넘어가는 해를 보며 아버지의 인생에 대해 생각하곤 한다. 어렸을 때는 아버지의 모습이 이해가 안 될 때도 많았다. 하지만 지금은 아버지의 삶 곳곳에 우리 자식들의 모습이 크게 자리하고 있었음을 깨닫는다. 수많은 어려움 속에도 우리가 서로 사랑하고 힘이 되어 줄 수 있었던 것은 아무리 힘들어도 가족이 흩어져서는 안 된다는 생각 덕분이었다. 아버지는 나와 동생들이 잘 자라 준 것을 가장 훌륭한 재산으로 생각하신다.

8월의 뜨거운 햇볕에 아버지의 지갑이 사르르 마르듯이 아버지의 인생도 이젠 따사로운 햇살 아래 있길 바란다.

월남전 참전 당시 아버지 모습





사진: choon

#아버지 #지갑 #가족 #사랑 #햇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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