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런 삶도 괜찮아, 나 홀로 10년 차 시골살이
10년 전 어느 날, 회사 대표님 방에서 나온 이사님이 굳은 얼굴로 나에게 다가왔다.
"대표님이 잠깐 보자고 하셔."
연봉 협상 때 말고는 들어가 본 적 없는 방이었다.
"똑똑."
문을 열고 들어가 어색한 인사를 나눈 뒤, 새까맣고 폭신한 소파에 앉았다.
몇 초간의 정적이 흐른 후, 대표님이 입을 열었다.
"알다시피, 우리 회사 상황이 좋지 않아. 다른 계열사는 지금 바쁜데, 그쪽으로 옮겨보는 건 어떨까?"
이미 회사의 일이 줄어들고 있다는 건 체감하고 있었다. 그리고 다른 계열사로 가도 상황이 크게 다르지 않을 거라는 걸 알았다. 거기서도 그저 조금 더 버티는 것뿐일 테니까.
잠시 고민하던 끝에 입을 열었다.
"대표님, 고민 많으셨을 텐데... 저도 회사에 더 부담을 드리고 싶지 않아요. 퇴사하겠습니다."
그렇게 나는 백수가 되었고, 퇴직금과 한 달 치 월급을 더 받았다.
나는 디자이너로 경력도 어느 정도 쌓여 있고 업계에서도 힘들기로 유명한 분야에서 버텨왔기에 다른 곳에 취업하는 건 어렵지 않았다. 하지만 끝없는 야근과 건강을 해쳐가며 계속 이 일을 해야 하는지 의문이 들었다. 게다가 직업 특성상 오래 하기 힘든 일이라는 걸 알기에, 고민 끝에 재취업 대신 새로운 선택을 하기로 했다.
본가에서 독립해 제주로 내려가기로 한 것이다.
20대 중반 혼자 제주에서 1년 살기를 한 적이 있다.
첫 직장에서 매일 새벽까지 철야하며 3년을 일해오던 어느 날, 해가 바뀌는 순간에도 회사에 홀로 남아 일을 하고 있었다. 그때 문득, 당장 내일이라도 책상에 엎드린 채 과로사로 발견될지도 모른다는 불길한 생각이 스쳤다.
내 불안을 잠재우기 위해, 만나는 사람들에게 똑같은 질문을 던졌다.
"스물다섯 살 때 뭐 하셨어요?"
10명이면 10명, 대답은 똑같았다. 졸업하고 취업을 해서 신입으로 일하고 있거나, 군대 갔다가 복학했거나.
나는 영화광고 일을 하면서 인생은 정말 무지개처럼 다양할 거라고 믿었는데, 도대체 나는 무엇을 기대했던 걸까? 공장에서 찍어낸 듯 똑같은 삶을 살아가는 인생의 선배들에게 약간의 실망감을 느꼈던 것 같다.
시간이 지나 나보다 어린 친구가 나에게 똑같은 질문을 했을 때, 나도 똑같은 대답을 하고 싶지 않았다.
그때 나는 마음먹었다.
"그렇다면 나는 다르게 살아봐야지!"
사직서를 내고 집에서 가장 먼 제주로 내려갔다. 3년간 집에서 단 한 번도 힘들다는 말을 꺼낸 적이 없었지만, 집에서 겨우 잠시 눈만 붙이고 출근하며 일하는 나를 지켜보셨던 부모님은 1년 동안 휴식을 취하며 의미 있는 시간이 되기를 바라시며 나를 보내주셨다.
아무 연고도 없던 그곳에서 게스트하우스 스태프로 지내며 여행도 하고, 아이들에게 미술 수업을 하며 새로운 시간을 보냈다. 친구들도 사귀고, 미술심리치료를 공부하며 몸과 마음을 회복했다. 그 시절은 내게 따뜻한 기억으로 남아 있다.
제주에는 이런 말이 있다.
"살암시믄 살아진다." 살아 있으면 어떻게든 살아진다는 말. 그 말이 왜 그렇게 와닿았을까.
그 기억 덕분에 이번에도 큰 고민 없이 다시 내려가기로 결심했다.
이제 몇 달 뒤면 서른. 디자이너가 아닌 내 삶을 상상해 본 적이 없었다.
막막함과 동시에 자유롭게 살 수 있겠다는 설렘이 교차했지만, 두려움보다는 기대감이 더 컸던 것 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