외노자 꿈나무의 일상
다운타운 버스 정류장에 도착했다.
많은 사람이 버스를 기다리고 있었지만 딱히 줄이 있지는 않아서 적당히 튀지 않는 자리에 섰다. 버스가 오려면 앞으로 8분 남짓, 갈 경로를 다시 한번 확인하며 버스를 기다리던 중 누군가 사람들 사이를 비집고 앞쪽에 섰다. 연세가 꽤 있는 할아버지였다.
'한국이나 캐나다나 버스 빨리 타고 싶어 하시는 분들이 있는 건 매한가지구만' 하는 생각에 괜히 좀 웃겼다.
곧 할아버지가 타려던 버스가 도착했다.
그러나 할아버지는 바로 버스를 타지 않고 뒤를 돌아 내 옆에 있던 사람에게 물어보셨다.
"너 혹시 이 버스 탈 거니?"
"아니"
할아버지는 그제야 버스를 탔다.
할아버지가 물어봤던 그 남자는 나와 같은 버스를 탔다. 알고 보니 그 정류장에 있던 대부분의 사람들은 나와 같은 버스를 탔는데, 모두 그 남자가 버스를 타서 어느 정도 자리를 잡은 후에 버스에 탔다. 너무도 당연하게.
그는 휠체어를 타고 있으니까. 몸이 불편한 시민을 배려하는 것은 당연한 시민의 의무이니까.
그렇게 버스를 타고 가다가 문득 깨달았다.
아, 내가 이 장면을 보고 싶어서 여기 왔구나.
캐나다 워킹홀리데이 비자의 기준 나이가 변경되었다는 이야기를 듣고 마지막 기회를 잡겠다며 별 고민 없이 신청했지만, 그래서 어디로 갈지는 생각보다 어려운 문제였다.
사람들이 "왜 밴쿠버야?"라고 물었을 때 여러 가지 이유를 댔지만, 그 이유들 역시 진심이었지만, 사실 밴쿠버였던 가장 큰 이유는 사진 한 장이었다.
작년 연말 밴쿠버에 다녀온 친구의 인스타에 올라온 인스타 스토리 사진 한 장.
밴쿠버 국제공항 안내 전광판에서 수어 안내가 나오던 그 사진.
지나가는 사람이 다른 사람에게 내뱉는 비속어에도 움찔하는, 꽤나 예민한 성향의 나는 좀 더 포용적 인문화권에서 살아보고 싶다는 생각을 꽤나 강하게 해 왔다. 그런 나를 그 사진 한 장이 사로잡았고, 불안이 높아 모든 것이 확실하지 않으면 잘 움직이지 못하던 내가 용감하게도 다음 거취가 정해지지 않은 채 퇴사라는 선택을 할 수 있게 해 주었다.
비록 정작 내가 입국할 때는 그 안내 전광판을 볼 수 없었지만(아예 안내 전광판 자체를 못 봤다;), 대중교통을 이용하면서 생각보다 꽤 자주 보고 싶었던 장면들을 볼 수 있었다.
그래서 다시 마음을 다잡았다. 그래, 여기 살아보자.
애초에 버스의 목적지였던 키칠라노 해변도 기대보다 예뻤지만,
버스에서 마주했던 그 장면이 나를 좀 더 밴쿠버에 머물게 할 것 같다는 강한 예감이 들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