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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번쯤 화양연화

꽃 같이 빛나는 시절이었을까?

by Dear Lesileyuki

주방 옆에 딸린 창고 방에 마련된 작업실로 들어서자마자 유리창 문을 활짝 열었다. 원래는 다용도실로 쓰이던 건데, 명색이 작가면서 작업실 하나 없는 게 억울하다는 생각이 들어서 마련했다. 선배 작가가 남편이 작업실을 마련해 줬다고 행복에 들뜬 목소리로 전화를 했을 때, 더는 압력밥솥 우는 소리를 들으며 글을 쓰고 싶지 않았다. 비좁고 천정엔 빨래걸이가 걸려 있지만 뷰는 끝내준다.

창문 너머 오월의 햇살이 빨간 장미 넝쿨 위로 떨어지고 있다. 그 햇살 아래서 장미는 역시 여왕다운 자태를 마음껏 뽐내고 있다. 아이러니하게도 계절의 여왕인 5월에 태어난 나는 여왕의 자태와는 너무나 거리가 먼 무수리의 길을 가고 있다.

잘 나가는 작가도 아니고, 우아한 중년을 구가하고 있지도 않고, 제대로 된 정장도 없고, 명품 가방도 없지만 억울하지는 않다. 하지만 '프랑수아 사강'처럼 살지 못해서 심통이 난다. 물론 이 모든 것이 엄마의 말처럼 내가 스무 살에 반 미쳐서 결혼한 결과이기에 그 누구에게도 항의하지 못한다. 오로지 내가 스무 살의 나에게 ‘미친년’ 소리를 하는 것이 고작일 뿐이다.

심드렁한 마음에 컴퓨터를 켜자 일본 배우 ‘오다기리 조’의 눈부신 자태가 화면 가득 떠오른다. 그의 아스라한 눈빛을 보자 입이 귀에 걸리며 자동으로 미소가 입가에 번진다. 사월의 남자 장국영 이후 나의 팬심을 발동하게 한 ‘오다기리 조’는 역시 오월의 남자다. 그의 아스라한 눈빛과 나의 눈빛이 교감하는 순간 에너지 충천이다.

커피믹스를 두 개나 넣은 대용량 커피를 한 모금 마신 후 신음 같은 한숨을 내쉰다. 그동안 타 마신 커피믹스 때문에 내 위벽 사이사이에 낀 인공크림 걱정 따위는 이 순간엔 하고 싶지 않다. 적어도 이것 때문에 가슴이 쿵쾅쿵쾅 뛰니까. 더구나 카세인나트륨이 아니라 진짜 우유를 넣었다고 하니 분명 내 위벽도 멀쩡할 것이 분명하다고 믿는다. 단지 이젠 나를 설레게 하는 건 이 인스턴트커피 외엔 없다는 사실이 살짝 허무할 뿐이다.

나의 분신과도 같은, 나의 모든 기억과 밥벌이를 위한 모든 정보가 담긴 구식 컴퓨터의 화면에 뜬 <오다기리 조>를 보며 천천히 커피를 마신다. 여자가 나이 사십을 넘으면 다 까먹은 사탕 껍질만 들고 있는 것 같은 기분이 든다. 도저히 사십이란 숫자가 용납이 안 될 때, 그럴 땐 오다기리 조가 나오는 영화가 제격이다. 영화 속의 그는 나에게 담배이며 와인이며, 레몬 맛이 살짝 감도는 맥주이다. 특히 영화 <도쿄타워>에서의 그는 감동이다.

가을은 제 노트북에 십 대부터 좋아해 온 아이돌을 화면에 띄워 놓았고, 둘째는 힐러리 클린턴이 제 엄마인지 활짝 웃는 사진을 띄어 놓았다. 그리고 셋째 딸의 컴퓨터 화면엔 제 친구들과 찍은 사진을, 남편은 딸 셋의 어린 시절 사진을 올려놓았다. 순간 부아가 치밀 대로 치민 내가 바탕화면에 깔려있던 가족사진을 밀고 선택한 게 <오다기리 조>이다.

그는 오늘도 나의 컴퓨터 화면을 가득 채우며 그 고혹적인 미소를 나에게 보낸다. 나의 눈과 마주치기만 하면 말없이 조용하게 웃으며 파이팅을 외친다.

잔뜩 들이마신 오월의 아침 공기와 어우러진 담배 연기가 폐에 가득 채워진 덕분에 부푼 마음을 다독이고 책상 앞에 앉았다. 마감인 원고의 마지막 마무리가 남아 있기 때문이다. 날짜는 꼭 지켜야 한다는 책임감과 직업윤리(?) 때문에 어제 밤늦게까지 노트북 앞에 앉아 있었던 탓인지. 아니면 노안 때문인지 눈이 침침하다.

정말 노안 탓인지 노트북 바로 옆에 있는 탁상용 캘린더의 숫자가 겹쳐 보인다. 특히 초록색 사인펜으로 동그라미를 여러 번 쳐 놓은 숫자가 더 어른거린다.

뭘까? 제삿날인가? 아니면 아직도 칠십이 넘은 나이에도 쌩쌩한 친정엄마의 생신인가? 곰곰이 생각해 보니 그것도 아니다. 엄마 생신은 유월이다. 달력을 자세히 들어 보니 음력으로 적힌 작은 글자가 들어온다. 머릿속에서 숫자가 아른거린다. 치매 초기 증세처럼 생각이 나지 않는 것들이 점점 많아진다.

달력의 숫자를 노려보며 도대체 왜 동그라미를 해놓았을까 기억하려고 애썼다. 요즘은 왜 내 머릿속에서 예전에 알았던 일들이 실종되거나 잠시 길을 잃는지 알 수가 없다. 알츠하이머가 오려나? 사십 전후에 치매가 온 어느 여성의 다큐멘터리를 본 적이 있는지라 덜컥 겁이 났다. 순간 어떻게든 기억해야 한다는 강박관념에 사로잡혀서 달력을 노려봤다.

한참을 턱을 괸 채 달력을 눈이 빠져라. 노려본 끝에 그 숫자가 모두가 잊고 있는 내 생일이란 것을 겨우 기억해 냈다. 음력은 항상 깜빡해서 연초에 가족들의 음력생일을 양력 날자 밑에 적어놓고 동그라미를 쳐 놓는 습관이 있는데 까맣게 잊고 있었다. 왜 가족 모두의 생일은 기억하고 살면서 정작 내 생일은 번번이 깜빡하는지 모르겠다.

눈부신 오월 아침에, 그것도 햇살은 정신없이 빛나고, 작업실 창밖으로 보이는 대문에는 빨간 덩굴장미가 오월의 정신을 구현하느라 정신없이 제 존재감을 자랑하고 있는데, 그 아름다운 계절에 태어난 내 생일을 나를 비롯해 그 누구도 기억하지 못했다니.

"이런 빌어먹을. 그 누구도 내 생일을 기억하지 못한다는 게 말이 돼? 하긴 본인도 까먹은 생일을 누가 기억하겠냐."

나는 투덜거리며 습관처럼 책상 서랍에서 담배를 꺼내서 또다시 피워 물었다. 이래서 내가 담배를 끊을 수가 없다.

나이 마흔 하고도 여덟이 적지 않은 나이이건만 생일상, 아니 케이크 한 쪼가리 가져다주는 식구가 없다는 게 말이 되냔 말이다. 가족 놀이를 하고 사는 것도 아닌데 이렇게 무심할 수 있는 건가?

생각해 보니 가을이가 나의 생일을 기억하고 편지를 써줬던 건 정확히 초등학교 5학년 때까지였다. 그 이후론 편지가 없다. 남편은 한 번도 내 생일을 스스로 기억해 챙겨 준 적이 없다. 며칠 전에 힌트를 주면 고작해야 다 늙어서 웬 생일 타령이냐고 할 뿐. 이것이 대한민국 평균 가정의 남편의 작태란 말인가?

내 마음처럼 담을 타고 불타오르는 장미 넝쿨을 보며 담배를 한 대를 다 피웠다. 책상 위에 놓인 핸드폰에 메시지가 도착했다는 신호가 떴다. 그래도 나이 오십을 목전에 두고 누군가로부터 메시지를 받을 수 있다는 건 다행이다. 나는 담배 끝을 앞 이로 살짝 씹으며 천천히 메시지를 확인했다. 모두 네 통의 메시지가 도착해 있었다.

하나는 출판사 허 편집장이 생일을 축하한다고 보낸 메시지고 또 하나는 나의 중학교, 고등학교, 심지어 대학까지 동창인 윤재가 보낸 생일 축하 메시지였다. 그리고 나머지 둘은 사랑해 마지않는 여동생과 동생과 이혼한 전 올케가 보냈다. 정녕 이들뿐이었단 말인가? 나의 생일을 기억한 이들이. 마음에서 불타오르던 장미가 후드득 떨어진다.

이제 이 집안사람들은 죄다 내가 미친 듯이 떠벌리고 다니지 않으면 언제가 내 생일인지 기억도 못 하는 시절이 된 것이다. 생각해 보니 재작년에도 내가 삼일 전부터 나발을 분 덕에 겨우 생일 전날 저녁 한 끼 같이 먹었다. 그나마 올해는 원고가 밀려서 그 짓도 못 했다.

올해는? 나 혼자라도 미역국을 끓여야 하나? 아냐 그럴 순 없지. 등등의 생각이 머릿속에서 오락가락했다. 일요일 아침부터 미역을 불리고 내 생일 미역국을 끓인다는 건 억울한 일이다. 그깟 미역국 안 먹고 말지.

"뭐 해?"

산에서 돌아왔는지 남편이 문을 반쯤 열고 얼굴을 들이민다.

주방 옆에 딸린 나의 작업실은 온 가족이 들락거리면서 한 번쯤 문을 열어보는 곳이다. 남편 역시 예외는 아니어서 물 마시러 나왔다가 혹은 아침에 산에 가려고 일찍 일어났다가 불이 켜져 있으면 한 번씩 열어보곤 한다.

산의 정기를 듬뿍 받고 온 남편은 오십이 코앞인데 여전히 젊다. 아무래도 내가 잠자는 사이에 방부제를 한 움큼씩 먹나 보다. 안 그러면 저런 절대 동안이 유지될 리가 없다. 연초에 특집처럼 하는 모 방송국의 동안 콘테스트에 나가보라고 권하고 싶을 정도다.

"원고 넘길 게 있어서"

나는 담배 연기를 길게 내뿜으며 말했다. 용가리로 변신해서 그에게 담배 연기 대신 불을 뿜고 싶은 심정이다. 본인의 생일은 매년 챙겨 먹으면서 마누라 생일은 본능적으로 잊고 사는 작태가 말이 되느냔 말이다.

"뭐 돈도 안 되는 거 맨 날 머리 터지게 쓰기만 하면 뭐 하냐? 그러다 몸 버린다."

순간 열이 확 받친다. 듣기 좋은 꽃노래도 한두 번이라는데 저 남자는 무슨 말을 저 모양 저따위로 하는지 모르겠다. 티끌 모아 태산이라고 그 푼돈 원고료를 모아서 무엇을 할지는 나중에 두고 볼 일이다. 그때까지는 유구무언이다.

“고모냥 고따구로 말하는 의도가 뭔데? 됐고, 문이나 닫으셔.”

"담배 좀 고만 피우고. 원고 쓸 때 담배 피우는 것만으로 보면 벌써 노벨 문학상 타고 남았다. 아 벌써 우리나라가 탔지."

내장이 꽈배기처럼 꼬였는지 하는 말마다 어쩌면 저렇게 밉상인지 모르겠다.

“담뱃값이나 주고 이야기하셔.”

결혼 생활을 오래 하면 딱 두 종류의 부부로 구별된다. 하나는 없던 정도 새록새록 생겨서 어디를 가나 붙어 다니는 부부이고 또 다른 하나는 먼 산 꽃구경 하듯이 서로를 보는 부부다.

남편과 나는 아마도 후자. 먼 산 진달래 같은 부부이다. 과거에도 그랬는지는 기억이 가물가물하다. 아마 사랑을 하긴 했을 것이다. 친정엄마는 그런 나에게 네가 좋다고 육갑을 떨었으니 죽을 때까지 입 다물고 살란다.

"늙어 가잖아. 다 건강 생각해서 하는 말이야."

남편은 작업실 문을 닫으며 미안한지 굳이 붙이지 않아도 될, 사족 같은 말을 덧붙인다.

남편에게 김 빠지는 소리를 들은 덕인지 원고 쓰려고 기껏 걸어놓은 시동이 허무하게 꺼지는 바람에 집을 나와서 곧장 편의점으로 향했다.

장미의 향을 품은 달달한 오월의 아침 공기가 코끝을 스친다. 아직도 오월에 반하는 건 코안에 들러붙은 코딱지만큼 내 안에 들러붙어 있는 어쩔 수 없는 낭만 때문이다. 정신 나간 아줌마처럼 코를 벌름거리며 편의점 문을 기세 좋게 열고 들어섰다.

"이모 일찍 나오셨네요?"

종종 담배를 사러 나오느라고 알게 된 아르바이트생 유진이 반갑게 아는 척을 한다. 이제 겨우 대학 2학년이라선지 소낙비를 흠뻑 맞은 한여름 물푸레나무처럼 싱싱하다. 소년과 남자의 경계선상에 서 있는 것 같은 유진의 웃음은 또 얼마나 싱그러운지 주변이 다 환해진다. 그야말로 유진은 지금 낭만과 서사의 중간에 서 있다.

피 한 방울 섞이지 않은 유진이 나를 이모로 부르는 이유는 간단하다. 그의 엄마가 내 책을 읽는 팬인데, 엄마가 언니라고 부르니, 자신에게는 이모인 셈이라며 그렇게 부르겠다고 해서 그러라고 한 덕분에 이모와 조카 사이가 됐다. 졸지에 연초록빛 메로나 아이스크림처럼 달달한 조카가 생겨서 좋은 점이 있다면 하루에 꼭 세 번씩 콩 먹듯이 주워 먹던 비타민 C를 안 먹어도 피곤하지 않다는 점이다. 해서 글을 쓰다가 혹시라도 피곤하면 슬리퍼를 끌고 편의점으로 가서 캔 커피 하나씩 들고 피 한 방울 안 섞인 조카랑 수다 한번 떨면 만사형통이다.

편의점 안은 유진이 틀어놓은 <10월의 어느 멋진 날에>가 시냇물처럼 잔잔하게 흐르고 있었다. 오월에 시월의 노래라니. 장미가 지기도 전에 가을바람이 불라고 주문을 거는 것 같은 남자의 목소리에 홀려서 잠시 듣고 있었다. 갑자기 울컥한다. 아무래도 호르몬 탓인가 보다 요즘 감정의 기복이 너무 심하다.

"유진아, 지금은 오월이다. 선곡이 좀 그렇다. 지금은 '오월과 유월'의 <장미>를 들어야 하는 계절이란다."

아주 오래전에 내가 중학생이었을 때 나는 오월의 어느 일요일 아침에, 마루에 걸레질하면서 '사월과 오월'의 <장미>를 들었었다. 그때를 생각하니, 순간 그날의 장미 향기가 기억 저편에서 시공을 초월해 날아오는 것 같은 기분이 든다.

"그런 가수도 있어요, 이모? 새로운 여성 듀오인가요? 나는 못 들었는데."

하긴 요즘은 서태지도 조상님 취급을 받는 세월이니 그가 <사월과 오월>을 알 리가 없다. 유진에게 사월과 오월은 가수계의 크로마뇽인 정도 될 터이니.

"아, 한 30년 전쯤에 있던."

"으아? 완전 선사시대네요."

유진이 눈을 동그랗게 뜨며 웃는다.

"그런가? 여하간 이 노래는 좀 그렇다."

"그렇긴 한데, 시월을 노래하는 이 가수 목소리가 오월 같지 않아요?"

"김동규가 오월 같다는 소리는 처음 듣는다."

"김동규 아니고 휘진이라는 가수가 부른 건데 아주 좋지요?"

가만히 들어 보니 다르긴 다르다. 김동규가 뚝배기라면 가수 휴진의 목소리에서는 손가락으로 와인 잔을 두드렸을 때 울리는 소리의 섬세함이 느껴진다.

"음 인정! 그런데 너, 여친이 좀 지루하다고 하지 않냐?"

아줌마가 이십 대 초반 남자랑 아침부터 수다를 떨고 있자니 갑자기 엔도르핀이 확 돈다. 남들은 주책없다고 할지는 모르지만 나는 하루 중 이 시간이 세상에서 제일 즐거우니 어쩔 수가 없다. 그래서 내가 집 앞에 있는 편의점을 두고 부러 좀 떨어진 이 편의점에 들르는 것인지도 모른다.

"어, 어떻게 알았어요?"

유진이 20대 초반 남자 특유의 해맑은 웃음을 지으며 물어 온다. 그는 정말 이모로써 사랑하지 않을 수 없다.

"여자친구 사귀고 오래 사귀고 싶으면 노래 취향부터 바꿔라."

"그러니까요, 근데 저는 문제가 뉴진스나 블랙핑크 노래보다는 사라 브라이트만의 노래가 좋다는 것이지요."
"혹시 넬라 판타지아?"

나는 다 안다는 듯이 싱긋 웃으며 물었다.

"어, 이모랑 통했네. 이모 여기요."

유진은 내가 늘 피는 담배를 재빠르게 내밀며 말했다.

"이건 됐고."

나는 담배를 다시 돌려줬다.

"금연하세요?"

유진이 놀란다.

"아니 오늘은 이거 사러 온 거 아니거든. 즉석식품 코너는 어디냐?"

"저쪽이요."

나는 유진이 손으로 가리킨 쪽으로 가서 식구 수 대로 즉석 소고기미역국을 골라서 계산대로 돌아왔다.

유진이 내가 골라온 즉석 미역국을 보더니 깜짝 놀라며 묻는다.

"이모, 여행 가세요?"

"아니."

"그럼?"

"내 생일이다. 오늘이."

"정말요? 잠깐만요. 여기 계산대 좀 봐주세요."

깜짝 놀란 표정의 유진이 계산하고 돌아서는 나를 불러 세우더니 계산대 안으로 밀어 넣는다.

유진이 갑자기 물품 보관 창고 쪽으로 가는 바람에 졸지에 계산대를 책임(?) 지게 됐다. 숫자에 약하고 기계에 젬병인 내가 잠깐이니 괜찮겠지, 하며 넋을 놓고 있는데 교복을 입지는 않았지만 분명 고등학생인 것 같은 남자애가 편의점 문을 열고 들어오더니 대뜸 ‘담배 한 갑주세요, 말레로’ 한다. 도대체 ‘말레’가 뭘까? 새로 출시된 담배인가?

“말레가 뭐지? 그리고 민증 있어요?.”

“아, 말보로 레드요. 그리고 저 성인이거든요. 대학생이라구요.”

“그럼 학생증.”

종종 어린애 시켜서 담배 사 오게 하고 미성년자에게 담배 팔았다고 신고하는 파파라치가 있다는 말을 들은 적이 있기에 단호하게 말했더니 남자아이의 얼굴이 일그러진다.

“고등학교 몇 학년이지?”

나는 눈을 부라리며 물었다.

아마 그때 유진이가 달려와서 수습하지 않았다면 반장 아줌마 정신을 발휘해서 목청을 높였을지도 모른다.

“이모 얘 고등학생 아니에요. 귀신도 무서워한다는 중학교 이 학년이에요. 내가 조금 전에 봤는데 너희들 가위바위보 하더라. 네가 대표로 들어온 거지? 지난번에는 할머니한테 삼천 원 주고 담배 심부름 부탁했다가 들켰잖아 너희들!”

“뭐야, 중학교 이학년?”

순간 고등학교 딸을 둔 엄마와 평소 지적질 좋아하는 반장 아줌마의 아바타가 출현하면서 흥분이 된 내가 끼어들었다.

“에이 씨. 아줌만지 할머닌지 모르지만 내가 죽을 나이는 안 됐지만 담배 피울 나이는 됐거든요.”

‘할머니’ 소리 한마디에 나는 할 말을 잊은 채 편의점 문을 박차고 나가는 남자애의 뒷모습을 바라봤다.

“이모, 괜찮으세요?”

“저 자식이 뭐랬니?”

“에이 요즘 애들 생각 없이 막말하잖아요.”

“아니 생각은 없어도 눈은 있어야 할 거 아냐?”

“진정하시고. 이모, 잠깐만요.”

유진이 아이스크림 코너로 달려간다. 그리곤 보기에도 제법 근사한 케이크를 가지고 뛰어온다.

"뭐니?"

"아, 사장님이 유통기한이 간당간당한다고 저보고 집에 가지고 가라는데, 생일이시라니까 이모 드리는 거예요. 그리고 그 중학생 애들 막말은 잊으세요!"

“어떻게 잊어. 할머니라는데. 근데 이거 받아도 되니?”

유진이 아예 긴 손가락으로 하트까지 그려서 날리며 끄덕인다.

“인심 좋다?!"

갑자기 입이 벌어지려는 걸 참으면서 물었지만 웃음은 숨길 수가 없었다. 역시 아줌마는 아줌마다. 공짜라는 소리 듣고 입부터 벌어지는 걸 보면.

“....... 그런데 언제부터 24시간 편의점에서 케이크를 팔았지?”

"아휴, 이모 편의점엔 안 파는 게 없어요. 그리고 이 케이크 드셔도 생명엔 아무 지장 없을걸요. 저는 만날 유통기한 지난 것만 먹고사는 데도 멀쩡해요. 근데 이모 너무 좋아하신다. 겨우 케이크 하나에"

유진이 라일락 가지에 막 솟아나는 새순처럼 싱그러운 미소를 사방에 흘리며 말한다. 한동안 나는 그 눈부신 웃음에 홀딱 반해서 조금 전에 들은 할머니 소리도 잊고 멍하니 바라보기만 했다. 아무래도 이 증상은 딸만 셋 있는 엄마의 전형적인 후유증이다. 세상의 모든 젊은 남자들만 보면 잠재적 사윗감으로 여기며 헤벌쭉해지지 말이다.

"왜요?"

잠시 눈부시다는 듯 바라보는 내게 유진이 물어 온다.

"아휴 네 주변에서 광채가 나서 잠깐 정신이 혼미해졌다."

나는 일부러 쓰러지는 시늉을 하며 말했다.

"에이 이모 농담도 지나치면 욕인 거 아시죠?"

"농담 아냐. 넌 정말 축복받은 녀석이다. 그리고 잘 먹을게."

나는 유진이 준 케이크를 들고 흔들며 말했다.

"봄에게 고맙다고 하세요!"

"봄이랑 사귀니? 이건 뇌물이고? 우리 봄이 삼수생이라 연애 금진데."

"에이 이모 그거 아니고요. 그냥 그런 게 있어요."

그가 또 웃는다. 역시 젊음은 축복이다. 분명 나도 저런 때가 있었을 터인데 왜 까마득한지 모르겠다.

편의점 유리창에 비친 나의 모습은 말 그대로 저주의 끝장을 보여준다. 그나저나 유진이 봄에게 관심 있는 건가? 나는 편의점 안에서 손을 흔드는 유진을 모습을 보며 그런 생각을 했다. 딸이 많아서 좋은 점은 다양한 사윗감을 구경할 수 있다는 장점이 있다고. 생각만 해도 신이 나고 엔도르핀이 마구 돈다.

케이크를 들고 집에 돌아와 보니 주방에선 가을이 또 샌드위치 만들기 삼매경에 빠져있다. 요즘 이상하다. 모처럼 일요일이라고 솜씨를 발휘하려는 건지 아니면 늘 그렇듯이 얌체처럼 저만 먹을 샌드위치를 만드는 건지 모르겠지만 태생이 게으름뱅인 가을이 아침부터 커피를 내리더니 이젠 샌드위치를 만들고 있다는 것이 중요하다. 여자가 요리에 유난히 관심을 가지면 사랑이 시작된다는 증거다. 적어도 내경험으로는 그렇다. 대체 누구와?

"아침부터 편의점 갔다 왔어?"

가을이 내가 들고 있는 세븐일레븐의 비닐봉지를 보더니 한 마디 건넨다.

딸의 눈에는 다른 손에 들린 케이크는 눈에 들어오지 않는가 보다.

"어."

"뭐 샀어?"

만든 샌드위치를 정성스럽게 자르더니 삼단 도시락 안에 넣는다.

나는 딸의 정성이 담긴 삼단 도시락을 노려봤다. 냄새가 난다. 눈곱만 겨우 떼고 식탁에 겨우 앉던 가을이 요리하고 도시락을 싼다. 고등학교 때도 소풍 갈 때 도시락 들고 가기 귀찮다고 돈으로 달라던 무미건조한 가을이 인터넷을 뒤져서 샌드위치를 만든다. 왜, 도대체 누구를 위해?

"그냥 이것저것. 아침부터 참 애쓴다. 어디 놀러 가냐?

나는 괜히 가을의 곁을 기웃거리며 물었다. 얼핏 보니 내가 좋아하는 햄 오이 샌드위치와 감자샐러드 샌드위치 그리고 올리브가 들어간 그리스 스타일 샌드위치까지 곁들인 럭셔리 도시락이다.

"그 비슷한 거."

가을은 오로지 도시락 싸는 데 집중하느라 쳐다보지도 않는다. 얄미운 딸이다. 끝내는 내 생일인지 모르고 넘어갈 기세다.

나는 케이크를 냉장고에 넣고 주방 옆에 설치된 오디오를 켰다. 언제나 그렇듯이 지미 폰타나의 <che sara>가 흘러나온다. 마치 지미 폰타나가 기다리고 있다가 나를 위해 노래를 부르는 것 같은 기분이다. 그래 인생은 그런 거야. 그가 나를 노래로 위로한다.

"엄마 좀! 그 노래. 아침부터 그 노래는 좀 오버 아냐?"

샌드위치 옆에 방울토마토를 놓고, 파슬리로 잎으로 포인트를 주려던 가을이 지랄을 떤다. 흘낏 보니 인터넷 레시피를 참고해 만들어 놓은 가을의 도시락 모양새는 거의 전문가 수준이다. 나와는 달리 모든 하면 제대로 집요하게 하는 가을이 답다. 그런데 왜 도시락을 싸는 걸까? 작가적인 감각으로 유추해 보건대 내가 모르는 일이 분명 발생하는 중이거나 아니면 이미 발생했다. 나는 그게 빌어먹을 몰빵식 연애의 화학작용으로 인한 부작용이 아니길 바란다.

"오버 아냐. 가을, 이 곡이 마치 우리 가족을 위한 노래 같지 않냐?"

나는 무슨 임금님 진상품이라도 되는 양 요리조리 살피고 핸드폰으로 인증사진까지 찍는 딸을 보며 이죽거렸다. 왜 요즘 젊은것들은 뻑 하면 인증샷 타령인지 모르겠다. 나중에 그 증거들을 다 어떻게 처치하려고.

가을은 피크닉이 아니라 만찬용 도시락을 싸는지 내가 즉석 미역국 포장을 뜯고 있는데도 쳐다보지도 않는다. 정확히 4인분의 즉석 미역국을 끓이고 어제 해놓은 밥을 푸고 있는데 제 볼일을 다 본 가을이 벌떡 일어나서 주방을 나간다.

"아침 안 먹어?"

"나 오늘 바빠. 바로 나가야 해."

가을은 뒤도 돌아보지 않고 후다닥 이 층으로 올라간다.

가을이 올라가자마자 잠에 취한 채 내려오는 건지 굴러오는 건지 도무지 알 수 없는 봄이 내려온다. 목에는 키티 안대 걸려 있다. 올라가던 언니에게 한 대 쥐어박히는 걸 보니 또 가을의 옷을 훔쳐 입었나 보다.

잠이 덜 깬 봄은 다시 소파에 벌러덩 누웠다. 역시 잠 많기로는 둘째가라면 서러워할 집안 내력이다.

아무도 기억해주지 않는 나의 생일을 위해 달랑 즉석 미역국과 늘 먹는 반찬을 식탁에 올렸다. 이층까지 들리도록 설치한 벨을 누르니 남편이 내려오고, 이어서 겨울이 내려온다.

적어도 수저는 자기가 찾아서 먹어야 한다는 원칙에 충실하기 위해 달랑 나의 수저만 들고 식탁 앞에 앉았다.

남편이 국과 밥만 덩그러니 놓인 식탁을 보더니 나를 본다.

"뭐?"

"수저는?"

"이제부터 당신도 수저는 당신이 챙겨."

"수저 하나 더 놓는 게 뭐가?"

그는 몹시 불만스러운 눈치다. 나는 그러거나 말거나 수저로 즉석 미역국을 한술 떠서 후루룩 소리를 내며 마셨다. 남편이 깊은 한숨을 내쉬며 나를 본다. 그러나 그 역시 무시할 뿐이다.

"아빠 여기."

그때 겨울이가 남편에게 수저를 내민다. 제 수저를 챙기다가 아빠 것까지 챙긴 것이다.

"음식 솜씨는 안 늘고 어째 나이가 들어갈수록 심통만 느냐?"

남편이 한마디 하지만 나는 그냥 묵묵히 미역국만 먹었다.

"엄마 오늘 미역국 맛있는데? 이거 엄마가 끓인 거 아니지?"

겨울의 속없는 한마디에 냉큼 남편이 미역국에 수저를 담근다.

"음 괜찮네. 어제 장모님 다녀가셨어?"

"맛있다. 도우미 아줌마 솜씨인가? “

종종 바쁠 땐 도우미를 부르는 걸 아는 봄이 철없이 한마디 툭 던진다.

그 정도로 나의 음식 솜씨가 형편없었었나? 적어도 나는 음식에 관한 한 천부적인 자질이 있다고 생각하고 살았는데 말이다. 나의 음식 솜씨가 맥없이 즉석 미역국에 무너질 줄이야.

"당신 도우미 써?"

이런 젠장. 남편의 눈이 휘둥그레진다. 그 눈빛은 집에서 하는 일이 뭐가 있다고 도우미까지 쓰느냐는 눈빛이다.

"오뚜기 공장장 솜씨야. 즉석 미역국이니까 잔말 말고 드셔."

"그 글 얼마나 쓴다고 미역국을 즉석으로. 칠첩반상은 바라지도 않아 내가. 열심히 일하는 내가 마누라 표 아침 밥상을 원하는 게 당연한 거 아닌가?"

잔소리 대마왕인 남편이 또 한마디 한다.

때가 어느 땐데, 아직도 칠첩반상 타령을 하는 건가? 그건 신혼 초에나 잠깐 가능했던 전설 같은 이야기일 뿐이다. 아니 신혼 초에도 불가능했던 일이다.

그 시절의 나는 애 키우랴, 학교 다니느라 몸이 열 개여도 모자랄 지경이었다. 더구나 시댁 식구는 갑족이고, 며느리는 을족 이었던 시절에 생존하기도 바빴다. 지금 생각해도 내가 그 시절을 어떻게 지나왔는지 궁금하다. 지금 같아서는 도저히 불가능일 것 같은데 그때는 가능했다는 게 놀라울 뿐이다.

"그럼, 생일날 즉석 미역국 먹는 년은 어떨 것 같니, 나의 딸들아?"

나는 자못 심각하고, 드라마틱한 목소리로 말하며 식탁 앞에 둘러앉은 딸과 남편을 둘러봤다. 이쯤 되면 급반전이라 나는 의기양양한 얼굴로 딸 셋과 남편의 얼굴을 봤다.

"생일이야?"

미역을 반쯤 입에 문 남편이 눈을 동그랗게 뜬다.

도대체 새대가리도 아니고 이 남자는 얼마나 무심했으면 28년 동안, 길지도 않은 마누라 생일 날짜를 외우지 못했을까?

“다들 구구단은 어떻게 외웠데.”

"엄마 생일이었어?

가을이 놀라며 묻는다.

“말하지, 그랬어.”

눈치 영단의 직구파 겨울이 거든다.

"엄마 미안, 쏘리."

봄은 생글거리기까지 한다. 역시 아무 생각이 없는 철부지 막내딸이다.

뭐 사소하게 그깟 생일을 두고 아침부터 히스테리냐고 말한다면 할 말이 없다. 하지만 가족이 뭔가? 상대방에게 특별한 날을 기억해 주고, 챙겨주는 것이 가족이 해야 할 일인데, 그것을 안 한다면 동거인과 다를 바가 없는 것이다. 이래서 가족에게도 원만한 생활을 위한 매뉴얼이 필요한 것이다.

갑자기 식탁 주변의 분위기가 지난겨울 극성을 부리던 동장군이 다시 납시신 것처럼 싸해진다. 남편은 말없이 미역국을 다시 먹기 시작하고, 세 딸은 눈치만 본다. 그러거나 말거나 미역국을 후루룩 마신 후 자리에서 일어섰다. 도저히 식탁 앞에서 그들이 밥 먹는 걸 지켜볼 수가 없었다. 부아가 치밀어서. 과연 이 가족들이 나의 회갑은 기억해 줄까?

"그릇은 각자 닦지."

간단명료한 나의 말에 세 딸과 남편은 일순 멍한 얼굴이 된다. 그것 역시 그러거나 말 거나이다. 아침에 밥을 얻어먹은 것만으로도 감사해야 할 상황이니까

"아니 여기가 군대도 아니고 참, 그리고 난데없이 웬 생일 타령이야?"

그 말은 어디서 자주 듣던 말이다. 너무 들어서 이젠 눈만 마주쳐도 기억의 골짜기에서 메아리가 되어 울린다.

철없는 세 딸과 무심한 남편, 그들을 뒤로하고 베란다를 통해 마당으로 나왔다. 담을 타고 오르는 빨간 덩굴장미가 눈부시도록 아름다워서 나도 모르게 한숨이 나온다. 그 담 아래 안쪽으로는 너무 작고 여린 하얀 찔레꽃이 수줍게 피고 또 그 옆으로는 작은 야생화들이 돌 틈 사이로 그들만의 소소한 일상을 말하고 있다. 파란 패랭이와 보랏빛 제비꽃이 아무렇게나 자란 잔디와 잡초들 사이로 그 고운 얼굴을 내밀고 있다. 원래 삶은 이런 것인데 왜 아등바등하고 세월을 보내고 있는지 도무지 알 수가 없다. 그깟 생일이 뭐라고 이 좋은 오월에 우거지상을 한 채 쪼그리고 앉아 풀을 뽑아야만 하는지.

"엄마, 나 늦어. 그리고 생일 축하해."

꽃바람 향내를 풀풀 날리며 지나가던 가을이 말한다.

도대체 일요일 아침부터 무슨 일이람. 연애를 하나? 돌아보니 딸은 벌써 대문 앞에 서 있다.

"됐고! 딸, 향수를 들이부으셨네. 도대체 누굴 꼬시려는 거야."

나는 딸의 짧은 미니스커트를 보며 말했다. 일주일 내내 병원에 처박혀 있었으니 하루쯤은 미니스커트로 자신에게 보상하는 것도 나쁘지 않은 일이다. 갑자기 가을의 찬란한 젊음에 질투가 나려고 해서 한마디 던졌더니 파르르 한 가을의 목소리가 되돌아온다.

"엄마 쫌, 쫌, 쫌! 아, 참 내가 건강검진 예약할게. 그게 생일 선물이야.”

나는 가을이 사라진 초록색 대문을 멍하니 바라봤다. 냄새가 나고 소리가 들린다. 막 연애를 시작한 사람의 달짝지근한 냄새, 두근거리는 심장 뛰는 소리 같은 것 말이다. 정말 가을에게 다시 남자가 생겼나?

가을이 고등학교 다닐 때의 일이다. 딸이 사귀는 남자친구가 마음에 들지 않는다고 엄마인 내가 몰상식하게(?) 화이트데이에 남자친구에게 주려고 준비한 초콜릿을 전날 밤에 훔쳐서 홀라당 먹어 치운 이후로 가을은 남자친구 이야기는 일절 내게 하지 않는다. 그러니 내가 딸의 연애에 대해서 아는 것이 없는 건 이상한 일도 아니다. 나이 스물 하고도 여덟이면 장편 연애 소설 한 권은 쓰고도 남을 시간이다. 기미를 봐서는 분명 남잔데 숨기는 것 같다. 나의 유난히 예민한 촉은 한 번도 틀린 적이 없다. 갑자기 딸이 만나러 가는 남자가 궁금해진다. 갑자기 나의 상상력이 날개를 단다. 선배 의사? 아니면 동료? 아무래도 의학 드라마를 너무 많이 본 탓인가 보다

"엄마, 생일 축하해!"

어느새 봄이 이층 베란다로 나와서 두 손을 머리 위로 올리고 하트를 그리더니 붉은 장미 꽃잎을 날린다.

나는 정원 바닥에 주저앉아 풀을 뽑으며 화창한 오월의 하늘을 배경으로 흩날리는 장미 꽃잎들을 바보처럼 웃으며 바라봤다. 그래도 봄이 뿐이다. 나를 가장 많이 닮은 딸이라선지 유난히 하는 짓이 예뻐 보인다. 하긴 얼마나 예뻤으면 유치원 다닐 때까지 똥을 닦아 줬을까. 두 딸은 아직도 편애라고 원성이 자자하지만 어쩔 수가 없다. 깨물어서 안 아픈 손가락이 어디 있느냐고 하는데, 그건 사실이다. 하지만, 분명 더 예쁜 손가락은 있다.

"한 봄, 보기도 아까운 건 왜 따서 날리는데!

나무라듯 봄에게 말했지만, 딸의 이벤트 때문에 마음이 봄바람에 날리는 꽃처럼 살랑거린다. 나는 활짝 웃는 딸의 모습을 보며 생각했다. 참 낳기를 잘했다. 저거 없었으면 인생이 뱉어버리기엔 참 거시기 한 단물 다 빠진 껌 같았을 텐데 말이다.

"엄마 사실 나는 엄마 생일 알았거든. 유진 오빠가 준 케이크 내가 엄마 오면 주라고 한 거야. 속았지?"

이층 베란다의 봄이 오월의 햇살 아래서 깔깔거린다. 본인의 계획이 성공했다고 아주 좋아 죽는다. 저 웃음을 어찌 장미에 비할까. 나는 그 웃음에 홀려서 바보처럼 덩달아 웃었다.

두 녀석이 작당해서 보기 좋게 나를 속여먹은 셈이다. 나는 어처구니없이 깜빡 속은 거고. 그나저나 유진이 녀석은 어쩜 그렇게 능청스럽게 연기를 잘하는 걸까? 괘씸한 녀석 같으니라고. 선심 쓰듯이 내게 케이크를 안겼을 때 알아봐야 했는데. 유진의 청춘과 싱그러운 미모(?)에 넋이 나가서 내가 그만 핵심을 놓쳤다. 그나저나 언제부터 봄이랑 유진이 오빠 동생 사이가 된 건가? 내가 또 한 번 핵심을 놓치고 있는 것 같다는 느낌을 지울 수가 없다. 어설픈 연애의 풋내가 왠지 둘 사이에 감도는 것 같다. 아무래도 요즘 갱년기를 앞두고 나의 촉이 심하게 발동하는 것 같다.

휴일인데도 남편은 외출도 하지 않고 집안 소파 정중앙을 차지한 채 TV 삼매경이다. 무슨 남자가 드라마를 저리도 좋아할까 싶을 정도로 TV 드라마에 빠져있다. 아주 나중엔 여주인공에게 대사까지 쳐준다. 그러면 신기하게도 대사가 맞는다. 역시 고수는 고수다. 다년간 TV 앞에서 내공을 쌓아온 게 사람답다. 이제 그는 텔레비전, 소파, 그리고 리모컨 삼 종 세트를 사랑하는 남자가 됐다. 저런 사람이 어떻게 회사에서는 폼 잡고 일하는지 도무지 상상이 가질 않는다. 그의 세상엔 운동 아니면 드라마뿐이다.

"다음 주가 엄마 생신 아냐?"

이층으로 올라가려는데 남편이 불러 세운다.

"아마 그럴 것으로"

마누라 생일은 패스고, 엄마 생일은 기억하는 남자와 사는 게 신나는 일이 아닌 건 분명하다. 눈을 뜨면 생일 케이크가 대령해 있고, 유치 찬란하게 풍선이 둥둥 떠다니는 설정은 드라마에서 나오는 빤한 일이라고 치부하면서도 은근 기대하는 걸 보면 나는 역시 끝물만 남은 낭만주의자인지도 모른다.

"준비 잘해. 요즘 엄마 요즘 기력 안 좋아. 돈은 넉넉히 줄게"

‘그 기력은 나도 안 좋거든’이라고 말하고 싶었지만 들은 척도 안 하고 개그맨처럼 거북이와 두루미 삼천갑자 동방삭'을 흥얼거리며 힁하니 이층으로 올라갔다.

"당신 말이야 그 노래 한 번만 더 부르면 이혼이다! 내가 오래 살아야 이 사람아 당신의 노후복지가 편해져."

나의 노래를 들은 남편이 발끈하며 말하더니 금테 안경 너머로 노려본다.

그는 내가 그 노래를 부르는 것을 제일 싫어한다. 왜냐하면 이름하여 '동박삭 주제가'는 무병장수가 지상최대 과제인 남편을 골려 먹을 때 내가 부르는 노래이기 때문이다.

봄이 어느새 침대에 살짝 생일 카드를 두고 갔다. 제 취향대로 고른 생일 카드는 온통 핑크와 하트와 레이스 3종 세트다. 내용은 온통 ‘사랑해’이다. 이쯤 되면 '역시 낳기를 잘했어, 후후'이다.

봄의 카드를 가방에 넣은 후 외출준비를 했다. 아끼는 하얀 실크블라우스에 잉크 빛 바지를 입었다. 까칠하게 죽은 입술에 진달래 빛 립스틱을 발랐다. 꾸며도 이 정도인가 싶어서 살짝 한숨이 나온다. 거울 앞에 서니 내 뒤에 할매가 서 있는 것 같은 착각이 들어서 움찔했다. 편의점의 맹랑한 녀석 때문에 생일날 할머니 소리나 듣고. 이제는 정말 세월과 타협을 해야 하는 건가.

립스틱을 바르니 젊음이 매정하게 떠나버린 것 같던 내 얼굴에 그나마 화사한 기운이 감돈다. 인정하고 싶지 않지만 내게도 이제 초여름 청오이 같던 시절은 다 가고 독에서 푹 절여진 오이지를 닮은 시절이 왔다.

너무나도 짧았던 그 시간에 안타까움과 함께 경배를! 더불어 나와 똑같은 길을 먼저 통과한 친정엄마에겐 존경을! 이제는 내가 늙어 가고 있다고, 더는 젊은 척해도 소용없다고 깨끗이 인정하는 일만 남았다. 하지만 과연 내가 그럴 수 있을지는 의문이다.

거울 앞에 서서 빙그르르 한번 돌았다. 돌아봤자 역시 맘에 들지 않는다. 세월이 흐르다 보니 내 몸에서 가슴만 볼륨이 사라지는 건 아닌가 보다. 푸석하다 못해 윤기가 사라진 나의 머리칼들에는 한때는 유명했으나 중년이 되어버린 여배우가 광고하는 가발이 필요하게 생겼다. 그뿐만 아니라 그도 모자라 과학의 힘을 빌려야 되는 시절이 도래했다. 순간 며칠 전 TV에서 본 여배우의 얼굴이 스친다. 볼살은 중력의 법칙을 무시하고 탱탱하지만 부분 마취된 사람처럼 웃어도 웃는 얼굴이 아니었고 얼굴 근육 중에서 살아 있는 건 입술뿐인지 옹알거리던, 그녀.

남편보다 더 오랫동안 내 곁을 지킨 에스티 로더의 향수 ‘화이트 린넨’이 단종된 후 차선으로 선택한 ‘퓨어 린넨’을 뿌린다. 톡 쏘는 향기가 공중을 떠돌다 살며시 내려앉더니 살짝 건드리기만 해도 터질 것 같은 추억의 향과 뒤섞인다.

아, 갑자기 랄프로렌 폴로의 향수, 사파리를 뿌리던 시절이 그립다.

거실에서는 전형적인 일요일의 풍경이 연출되고 있다. 열어놓은 베란다 창문으로 장미 향이 실린 오월의 바람이 불어오고, 하얀 바탕의 연둣빛 물방울무늬 커튼은 덩달아 춤춘다. 에어컨 cf의 한 장면 같다.

봄은 전화기를 아예 붙잡고 있고, 겨울은 아이팟을 들고 인터넷 검색 삼매경에 빠져있다. 전자기기와 너무 친한 두 딸을 보며 한숨을 쉬었다.

"어디가?"

<복면가왕>을 시청하느라 텔레비전에 눈을 맞추고 있던 남편이 신발장 앞에서 구두를 고르고 있는 내게 묻는다. 이제야 그의 눈에 집을 나서려는 오래된(?) 아내가 눈에 들어오나 보다.

"약속 있어."

가지고 있는 구두 중에서 가장 높은 12㎝의 자줏빛 스트랩 힐에 발을 조심스럽게 밀어 넣으며 말했다.

“정형외과 의사가 하이힐 신지 말라고 안 했나?”

매 같은 눈의 남편이 한마디 한다.

갑자기 그 말에 삐끗한다. 역시 지상에서 12㎝는 오십을 목전에 둔 지금엔 무린가? 살짝 발뒤꿈치를 들어 보니 발목이 시큰하다. 아무래도 조만간 한의원 가서 침 맞고, 부항 뜨는 상황이 올 것 같다. 하지만 갈 때 가더라도 자존심상 지상에서 12㎝를 포기할 순 없다. 젊은 날 나의 화려한 시절을 상징하는 힐들이 제발 신어주길 이제나저제나 고대하며 신발장 속에서 나를 기다리고 있었을 터이니 말이다.

“그러거나 말거나. 가끔은 괜찮아.”

"........ 그럼 점심은 라면 끓여 먹어? 라면은 나트륨이 많은데"

그놈의 성분 타령이 시작됐다. 이쯤 되면 외식 이야기가 나와야 하는 거 아닌가? 그에겐 기념일 들은 그저 숫자에 불과한가 보다.

"싱크대 안쪽에 종류별로 다 있어."

"알았어. 다녀와"

남편은 다시 TV에 시선 고정이다. 아무래도 요즘 여성 호르몬이 지나치게 분비되는 것 같다. 안 그러면 저렇게 드라마란 드라마는 다 섭렵하고, 이젠 예능 프로그램을 접수한 채 소파에 모로 길게 누워 '일요일의 인어왕자' 놀이를 할 리가 없다.

"엄마 나는 짜파게티 먹고 싶은데?'

아이팟에 정신 팔렸던 겨울이 그제야 정신이 드는지 말한다.

"엄마 나는 냉면이요!"

애교 충만한 봄이 거든다.

"냉면도 있어. 니가 좋아하는 오빠가 광고하는 그 냉면!"

“정말?”

"저녁은 꼭 밥 해줘야 한다. 나는 일식 남이다. 설마 나에게 영식님을 기대하는 건 아니지?"

남편이 천연덕스럽게 말한다.

그가 말하는 일식 남은 하루에 한 끼는 집에서 먹는 남자라는 말이다. '영식님'은 집에서 한 끼도 안 먹는 남자를 말하고. 세끼 다 집에서 먹는 '삼식이 놈'이 아닌 게 다행이라는 건가?

'그래 조금만 기다려라 '눈물의 사골국'을 먹여줄 날이 꼭 올 것이니. 사골국만 보면 경기를 일으키게 만들어 줄 날이 올지니'라고 속으로 외치며 부녀들의 아우성을 뒤로하고 집을 나섰다.

집을 나오자마자 갑자기 머릿속에 무겁게 내려 있던 블라인드가 확 젖혀진다. 통 넓은 부드러운 잉크 빛 바지 안으로 오월의 바람이 들어오더니 아침부터 시큰둥했던 내 마음을 달래준다. 온몸의 세포들이 자유를 만끽하며 파이팅을 외치는 기분이 바로 이런 걸까?

갑자기 우산을 타고 하늘을 날아오르던 메어리 포핀스가 된 듯하다. 마음은 벌써 저 하늘 두둥실이다. 고작 대문 밖을 나왔을 뿐인데.

‘왜? 오늘은 충분히 아름다운 오월이고, 나의 생일이니까.’ 나는 그렇게 중얼거리며 하이힐을 신은 위태로운 발걸음을 사뿐히 내디뎠다. 그러나 역시 무리. 관절이 찌릿하다. 연골을 늙어 죽을 때까지 장기적으로 사용하는 건 아무래도 틀린 것 같다.

집 앞에 주차된 차의 문을 열고 누군가 잡으러 오는 것도 아닌데 재빠르게 올라탔다. 오디오 버튼을 누르자마자 비지스의 <first of may>가 차 안에 부드럽게 흐른다. 장미 넝쿨이 붉은 벽돌담장을 타오르고, 햇살이 바람과 장난을 하듯 일렁이며 아름다운 무늬를 베란다 창문에 그리던 오월 어느 일요일 오후에 마루에 배를 깔고 엎드려서 듣던 그 노래다. 가만히 눈을 감고 생각해 보니 그때는 공부만 하지 않으면 세상이 다 장밋빛이었던 십 대, 화우시절이었다.

그때 꾸던 꿈들은 아침 햇살 아래 증발하는 이슬처럼 흔적도 없이 사라졌지만 꿈 하나는 그나마 건졌다. 평생 글을 쓰며 살겠다는 단 하나의 소원. 그게 내가 꾸준히 살아가는 이유이며 보람이고 나의 자존심이다.

카페 라일락으로 향했다. 가장 아름다운 시절을 함께 공유했던 친구를 만나기 위해. 나의 꿈이 자신의 꿈이라고 말해주던 세상에 단 하나뿐인 소울 메이트가 그곳에서 나를 기다리고 있다. 존재하는 것 자체가 내 인생의 기적 같은 그가.

오래전 화양연화를 그와 봤다. 그가 좋아한 양조위와 내가 좋아한 장만옥이 주인공으로 나왔다. 어느 날 그가 나에게 말했다.

‘너와 함께한 모든 시간이 내겐 화양연화의 나날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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