손해 본걸까?
요즘은 늙는 것도 죄인 취급을 하는 덕에 죄다 젊음의 샘이라고 찾아내서 시간을 돌리고 싶은 사람들이 너무나 많다. 남편 역시 그들의 대열에 열심히 동참하고 있다. 남편은 핸드폰 배터리에 두 칸만 남은 것 같은 지금의 시간, 안티 에이징 이 절박한 시간을 운동으로 막아보려고 하지만 잘 될지 의문이다. 요즘의 그는 무병장수 이외의 그 어떤 것에도 관심이 없는 것처럼 보인다. 예전엔 취미도 같았고, 여행도 늘 같이 다녔다. 나의 모든 수입원은 그의 통장으로 입금되는 절대 신뢰의 시간이 있었다. 돈에 관한 한 부부 일심동체가 그와 나의 생각이었지만, 결혼 16년을 정점으로 내 생각은 완전히 바뀌었다. 그놈의 짝퉁 <에르메스> 사건만 아니었다면 나는 아직도 나의 돈과 그의 돈은 같다고 생각했을 것이다. 하지만 그건 완전히 나만의 착각이었다.
건강 염려증에 걸려서 매일 내 눈앞에서 오락가락 남자가 나이 스물에 나를 홀려서 결혼하게 만든 그 남자인지 의문스럽다. 도대체 그의 푸른 수국 같던 연애적 감수성과 학교 앞 경비아저씨와 친구가 될 정도 죽치고 기다렸던 열정과 진격의 그는 도대체 어디서 실종된 건가? 엄마에게 미친년 소리까지 들어가며 결혼하게 만든 그는 어디 있나?
여인들이라면 다 아는 오렌지색 <에르메스> 가방을, 단돈 삼만 원에 사서 와서 생일 선물이라고 했을 때, 그것도 2주 전부터 생일이라고 정보를 흘렸음에도 불구하고, 가족 외식도 없이 본인의 친구들을 만나고 오는 길에 산 그 단돈 삼만 원짜리 주황색 캔버스 에르메스 가방만 아니었더라도, 우연히 와이셔츠 주머니에서 정확히 ‘이만 구천구백 원’이라는 영수증만 안 나왔어도 우리의 가정 경제는 EU처럼 완전 통합의 길로 갔을 것이다.
언젠가 백화점 명품관에 구경삼아 들렸다가 에르메스의 민트색 가방에 홀려서 바라보고 있는 내게 남편이 건넨 말은 '열심히 돈 벌어서 사라' 였다.
그는 말 한마디로 천 냥 빚을 갚는 사람이 아니라, 말 한마디로 만 냥 빚과 매를 버는 사람이었다. 빈말이라도 돈 많이 벌면 사주겠다는 고전적 멘트만 날렸어도 인생의 방향이 달라졌을 거다.
종종 이런 남자와 내가 왜 결혼했을까? 라는 생각을 해본다. 답은 사랑이다. 하지만 언제나 인생엔 사랑이란 아름다운 착각 아래 저질러지는 실수가 있는 법인데 그중 하나가 결혼이고, 세상 사람들 대부분이 하는 실수 인지라 이왕지사 이렇게 된 거 그냥 지고 가자는 생각에서 늘 마침표를 찍는다.
이 시점에서 그저 나는 사랑하면 다 결혼해야 한다는 그 망상이 나의 딸들에겐 대물림되지 않기를 바랄 뿐이다. 결혼의 여신은 없다. 오직 결혼의 무수리가 있을 뿐. 내가 시간과 인생을 투자해서 내가 내린 결론은 서로가 좋은 결혼보다는 한쪽이 일방적으로 편하고 좋은 결혼이 더 많다는 사실이다. 해서 나의 딸들은 사랑은 곧 결혼이란 공식은 선사시대쯤의 이야기로 치부하며 코웃음을 치는 여자로 살길 바란다.
사랑은 뇌가 만들어 낸 환상이고, 컴퓨터 시뮬레이션 같은 것이다. 나도 한동안은 그 환상 속의 그대에게 빠졌었다. 아주 미친 듯이 말이다. 물론 내가 그의 동의도 구하지 않고 완벽하게 만들어 놓은 그 환상에서 빠져나오는 시간은 얼마 걸리지 않았지만 말이다. 거기에는 너무나 두려워할 만한 위력을 자랑했던 시월드가 한몫을 했다.
그 이후로 나는 우아한 작가의 길을 포기하고 잡문서부터 시작해서 돈 되는 글은 죄다 쓰기 시작했다. 자본주의 사회에서 부부간에도 금권독립이 이루어져야 자존이 보장된다는 나의 철학은 지금까지도 금과옥조처럼 여겨지고 있다. 그것은 나의 딸과 내 딸의 딸들에게 이어질 것이다.
결혼을 일찍 해서 좋은 점이 있다면 일찍 키워 놓은 자식 때문에 중년을 그나마 자유롭게 유유자적할 수 있다는 점이다. 동기들이 헬리콥터 맘을 하느라고 정신없을 때 담배 한 대 피우며, 컴퓨터 앞에 앉아서 내 글을 쓸 수 있다는 점이 그나마 위안이라면 위안이다.
이태백 시대에 하늘이 도우시어(?) 의사가 된 큰딸 가을은 아직도 일어나지 않았다. 모처럼 만에 집에 오면 거의 동면하는 곰 수준으로 잠을 잔다. 전형적인 이과형 인간인 가을은 의대에 들어간 순간부터 나와 다른 길을 가고 있다. 남편과 내 인생의 트로피 같은 딸인 가을을 두고 남편은 늘 시집보내기도 아까운 딸이라고 말한다.
그런 딸이 모처럼 집에라도 오면 혹시라도 수면에 방해될까 봐 남편은 음악을 헤드폰 끼고 듣고, 핸드폰은 진동으로 해놓는다. 오래전에 내가 남편에게 집이 아닌 다른 곳에‘작업실’을 필요하다고 했더니 남편은 내게 애들 학교에 가고, 남편도 출근하면 온종일 온 집안이 다 작업실인데 집 놔두고 어디에다가 작업실을 만드느냐고 무심하게 말해서 일주일 동안 말을 안 하고 지낸 적이 있었다. 그런 그가 딸이 집에 오면 뒤꿈치를 들고 다니고, 청소기도 돌리지 않는다. 내가 글이라도 쓰려고 책상 앞에 앉으면 라면을 끓여 달라, 마트에 야간에 쇼핑하러 가자는 등 온갖 잡다한 일로 방해하면서 말이다. 하긴 나 역시 딸의 눈치가 보여 담배를 마당 나가서 피운다. 자식이 상전이 된 세상이다.
매사에 똑 부러져서 별명이 샤프심인 큰딸 가을은 학교 다니는 내내 나와 남편의 은근한 자랑거리였지만 지나치게 시크 해서 종종 패주고 싶을 때도 있었다. 하지만 이름하여 사춘기 시절 ‘커튼 봉 혈투’ 이후 내 안의 폭력본능과 폭력유발자 사이에서 적절한 조율이 필요하다는 걸 크게 깨달았다. 그 사건 이후 가을과 나는 모종의 타협을 하게 됐다. 그때 작성된 항목 중에 제일 첫 번째는 나는 가을의 꿈에 나의 꿈을 대입하지 않는 것이었고, 가을은 평생 내 맘대로 담배를 피우는 것을 묵인해주는 것이었다. 권리장전에 버금가는 조서(?)를 작성한 후 지금까지는 평화가 이어지고 있다.
작은딸 겨울과 막내 봄이 함께 쓰는 방에 불이 켜져 있다. 또 겨울이 책상 앞에서 잠이 들었나 보다. 겨울은 대학에 들어간 이후로는 침대가 아닌 책상에 엎어져서 자다가 허겁지겁 아침도 거르고 학교에 가는 일이 종종 있다.
방문을 열어보니 역시나 겨울인 책상 앞에 엎드려 있고, 공주 잠옷을 입은 봄은 침대에서 말 그대로 그림책 속의 공주처럼 잠들어 있다. 키티가 그려진 핑크빛 수면용 안대를 한 채 잠을 자는 봄은 호기롭게 2번이나 시험을 봐서 들어간 예중, 예고를 졸업 후 3수 중이다. 그래도 바라보는 순간 웃음이 입가에 저절로 걸리는, 행복 바이러스를 몸에 지니고 사는 아이다. 그러나 손이 많이 가고 돈이 많이 든다는 불편함이 있다.
가을과 겨울이 지독하게 편애한다고 아우성치지만 딸 셋 중에서 가장 나를 많이 닮아선지 유난히 사랑스러운 그것은 어쩔 수가 없다. 봄이 덕에 내겐 내가 낳지도 않은 연예인 아들들이 너무 많다. 모든 아이돌 그룹의 멤버들이 죄다 제 오빠이니 말이다. 벽 한 면이 온통 남자 아이돌 그룹 포스터로 도배되어 있다. 심지어 상반신을 훌러덩 벗어젖힌 남자 아이돌의 포스터를 보면 한숨이 나온다. 한때 가을도 아이돌에 미쳐서 공부를 작파한 적이 있었기 때문이다. 그저 나는 봄이 큰 언니의 뒤를 이어 ‘혹성에서 온 내 딸 시즌 2’를 재현하지 않기를 바랄 뿐이다. 막내딸만큼은 우주로 날려 보내고 싶은 상상을 하고 싶지 않고, 뒷모습을 바라보며 이단 옆차기로 날리고 싶은 마음이 굴뚝같아 태권도 도장에 등록해서 저녁마다 도장에 가서 정말 이단옆차기를 날리는 일은 하고 싶지 않다. 그런 일은 가을이 하나로 충분하다.
"겨울, 침대에 가서 자지?"
나는 책상에 얼굴을 박고 잠이든 겨울의 등을 살짝 때리며 말했다. 그러자 겨울이 비몽사몽간에 일어나더니 침대로 가서 봄이 옆에 푹 하고 쓰러진다. 잠결에 봄이 '안 들어갈래!' 하면 잠꼬대를 한다. 순간 피식 웃음이 나왔다. 이번에는 또 어디를 들어가기에 저런 잠꼬대를 하는지…. 어린이집 트라우마가 있는 봄은 어릴 때부터 늘 잠꼬대하면 '안 들어갈래'로 시작했는데 지금도 그 버릇이 여전하다.
자면서 겨울이 흘린 침 때문에 책상에 펼쳐진 책이 축축하게 젖어 있다. 밤새 뭐 했나 들여다봤더니 피츠제럴드의 소설, <위대한 개츠비>에 관한 리포트를 쓰고 있었다. 한 때는, 아니 지금도 내가 좋아하는 피츠제럴드의 작품을 둘째 겨울이 읽고 있다니 참, 세월의 오묘함에 감탄할 뿐이다. 순간 로버트 레드포드의 얼굴이 책 위에 펼쳐진다. 그런 사람과 연애하고 싶었는데 정반대의 사람과 사랑에 빠져서 요즘 애들 말처럼 몰빵한 덕에 매일매일 인생 수업 중이다. 엄마 말처럼 나는 정말 미친년이다. 그걸 깨닫는데 정확히 27년이 걸렸다.
영문학 전공인 겨울이 위대한 개츠비를 읽기 시작한 건 지난주부터였다. 갑자기 피츠제럴드의 작품 중에서 추천할 작품이 있냐고 묻기에 <위대한 개츠비>를 권했더니, 곧바로 서재로 가서 오래전에 내가 읽었던 그 책을 꺼내 그 자리에 서서 읽기 시작하더니 벌써 다 읽었나 보다.
아이들 모두에게 도서 목록을 만들어 줘도 늘 다 채우고 읽기를 끝내는 건 언제나 겨울이었다. 어릴 때부터 겨울은 제 것 하나는 확실하게 챙기는 둘째 딸이었다. 그런 건 영락없이 제 아빠와 부계라인 쪽을 닮았다. 모계라인, 즉 친정 쪽은 남의 이목을 신경 쓰느라 실속이 좀 없는 스타일이다. 달나라를 찍고 화성에 착륙할지도 모르는 시대에 엄마는 아직도 종종 숙부인을 두 명이나 배출한 집안이라고 입만 열면 말씀하신다. 반면에 부계 쪽, 시댁은 전체적으로 약간 홍익인간 정신이 부족한 중인 집안 출신이라고 할 수 있다. 일단은 금전 제일주의가 팽배해 있다. 명절엔 덕담보다 어느 곳 아파트가 더 많이 오르는지, 사람을 만나면 일단은 소유한 아파트가 얼마나 올랐는지부터 묻는, 실사구시 정신이 투철하다. 아 그놈의 실사구시!
친정에서도 받을 복 하면 남부럽지 않은 사람이 한 명 있다. 바로 남동생이다. 이혼한 동생은 아들까지 친정엄마가 키워주는 바람에 부담 없이 돌아온 싱글의 여유로운 삶을 구가하는 중이다.
‘실사구시’가 아닌 ‘연애구시’에 충실했던 이 인간은 전생에 우주를 구했는지, 부모님 곁에서 넙죽넙죽 용돈 받으며 살고 있다. 매사에 쿨한 친정엄마가 이성이 통제가 안 돼서 유일하게 감정적으로 되는 사람은 아들이다. 친정엄마 말처럼 숙부인과 정승을 낸 집안(?)의 유일한 아들이라 나는 가고자 했으나 가보지도 못했던 외국 유학까지 다녀와서도(내가 보기엔 순전히 국고 낭비를 한 유람이건만) 자유로운 영혼으로 사는 거 보면 로또 당첨보다 더 큰 행운의 사주를 타고났음이 분명하다. 가끔 여행 칼럼니스트란 타이틀을 달고 책 한 권씩 내면서 팔자 좋게 살고 있다. 물론 팔리는 책의 삼 분의 일은 본인이 구매해서 지인과 가족들에게 나누어주건만 친정 부모님에겐 그저 잘난 아들이다. 친정엄마는 아들에게 결혼하란 말도 하지 않는다. 엄한 여자 고생시키느니 혼자 속편이 살라고 말할 뿐. 대를 이을 일점혈육은 그래도 떨어뜨려 주었으니 세상에 태어난 임무는 완수했다는 건지.
역시 머리 좋은 것, 예쁜 것 못 따라가고 예쁜 것 팔자 좋은 것 못 따라간다는 할머니 김 부용 여사님의 말이 진리인 것 같다. 광산 김씨의 어른이셨던 할머니는 며느리가 손녀에게 집안일 시키는 것을 싫어하셨다. 일 시키지 말라고. 안 하고 살면 안 하고 사는 팔자가 된다고. 그런 할머니가 지금의 나를 보시면 과연 뭐라 하실까? 그렇게 아꼈던 손녀가 그야말로 완벽한 무수리로 빙의 됐으니 말이다.
주방에서는 조금 전까지도 자고 있던 게으름뱅이 가을이 일어나서 원두커피를 내리고 있다. 평소대로라면 일요일엔 10시가 넘어서 어슬렁거리며 나타났어야 하는데 말이다. 창문으로 들어오는 햇살을 뒤로 한 채 서서 커피를 마시는 딸의 모습이 그림처럼 아름다웠다. 살짝 웨이브 파마를 한 긴 머리가 바람에 살랑거린다. 어느 놈이 채어가려는 지 모르지만, 얼렁뚱땅 넘기엔 아깝다. 게다가 비싼 학비 들여서 의사까지 만들어 놓았으니 딸 바보인 남편은 오죽할까?
"엄마도 마실 라우?"
세상에 존재한 순간 내 청춘을 일순간에 스톱시킨, 이제 28살이 된 가을은 그야말로 아름다운 시절을 통과하는 중이다. 구두에 미친 여자가 신상 구두만 보면 환장하듯이 딸의 물오른 젊음을 보면 훔치고 싶다는 생각이 절로 든다.
긴 머리카락과 나와는 다른 달걀형의 조그만 얼굴과 동그란 눈은 꼭 스무 살처럼 보이게 만든다. 헐렁한 츄리닝 차림인데도 날씬한 자태가 영락없이 친정엄마 말처럼 '물 찬 제비'다. 하긴 나쁠 것도 없다. 자본주의 사회에서 미모는 또 하나의 빛나는 재능이니까. 게다가 머리까지 겸비한다면 그야말로 신의 손녀딸인 셈이다.
"됐어. 벌써 한잔 마셨어."
나는 산 지 10년쯤 돼서 보풀이 일고 다 늘어진 스웨터 주머니에서 담배를 하나 꺼내 라이터로 불을 붙였다. 딸이 싫어하는 줄 알면서도 말이다.
"담배는 대체 언제 끊을 거야?"
엄마가 담배 피우는 걸 질색하는 가을이 또 잔소리한다.
"걱정하지 마셔. 상견례에서는 절대 안 필게."
내게도 이제 딸의 눈치를 보며 담배를 피워야 하는 시절이 왔다. 한동안 눈치를 보느라 끊은 적도 있었지만 결국 몸이 기억하는 담배 냄새 때문에 다시 피우기 시작했다. 오래전에 작성한 '장전'이 그럴 땐 유효했다.
연애할 때는 담배 피우는 애인을 위해서 예쁜 담뱃갑과 라이터까지 사다 주던 남편이 이젠 담배 냄새가 난다고 잔소리를 하고, 방문 앞에 폐를 공장의 굴뚝처럼 표현한 금연 포스터를 턱 하니 붙여놓는 잔소리쟁이 딸이 있어도 나는 담배를 포기하지 못한다. 왜냐면 나에게 담배를 가르쳐 준 할머니와의 의리 때문이다. 아직도 나는 할머니와 나 사이의 각별했던 밤을 기억하고 막걸리를 거르고 난 술지게미인 제강에 설탕을 넣어서 중에 손가락으로 휘휘 저은 후 한 번만 마셔보라고 주던 할머니 김부용 여사의 눈빛을 가슴에 담고 있다.
그날은 하늘엔 유난히 둥근 달이 떠 있었고, 바람은 적당히 살랑거리는 초가을 밤이었다. 갑자기 할머니가 빙그레 웃으시며 피우시던 청자 담배를 내 입에 물려주었던 그 밤이 너무나 그립다. 담배 연기와 옥잠화의 향기가 폐 깊숙이 흔적처럼 남은 가을밤, 농밀한 공기의 추억도. 순간 내 입가에 미소가 걸린다.
"그렇게 좋아? 내가 미쳐 엄마 때문에. 건강에도 안 좋다고 남들은 다 끊는데, 아침부터 일어나자마자. 그게 피부에 얼마나 안 좋은 줄 알아?"
갓 내린 원두커피를 들고 내 앞에 앉은 가을이 나를 흘겨본다. 맞는 말이다. 보톡스도 주삿바늘이 무서워서 안 맞는 내가 그나마 금연만이 유일한 해결책이란 걸 알지만 의지대로 되지 않는다. 의지대로 나를 조종할 수 있었다면 아마 나는 남편과 결혼을 하지 않았을 테니까.
원두의 은은한 향이 ‘한번 마셔보지그래?’라고 속삭이는 것처럼 주변을 맴돈다. 담배 연기와 커피가 어우러지는 향이라니, 악마의 유혹이 따로 없다.
"엄마에게 담배는 뭐야?"
CF의 한 장면처럼 커피를 마시던 가을이 갑자기 내게 묻는다. 태생이 오만한 종자라서 그런지 질문하는 태도 역시 오만하고 설교조이다. 누가 의사 아니랄까 봐.
글쎄 과연 담배는 내게 뭘까? 할머니에게 배운 담배의 강렬한 맛을 기억한 내가 본격적으로 대학 들어가자마자 시작한 담배와 나의 역사는 결코 짧지는 않은데 한 번도 그런 생각을 해본 적이 없다.
"여러 가지 측면에서. 위로되고, 기쁨도 슬픔도 나누고. 그리고 할머니쯤 되려나. 현실을 잠깐 가려주는 안개 커튼?"
"할머니와 커튼? 누가 작가 아니랄까 봐 맨날 이상한 소리만 해. 그러면 아빠는 엄마 인생에서 뭐고?"
갑자기 딸의 그 말에 담배 연기가 목구멍에서 뭉치며 불편한 구름층을 형성한다.
"영수증 제출하라고 지시하는 남자. 상전, 잔소리 대마왕, 그리고 내가 난 세 딸의 아빠."
외우고 있었다는 듯이 줄줄 읊었다. 그런 나를 딸이 어이없다는 듯이 바라본다. 사실 나도 너무 빨리 나와서 조금은 미안했다.
"너무 막말하는 거 아냐? 둘이 열렬히 사랑해서 결혼했잖아?"
"뭐 사랑으로 시작한 결혼이 끝까지 사랑으로 가는 건 아니니까. 너도 살아보면 알아. 사랑은 신선식품 같은 거야. 너무 쉽게 변질 되어서 세심한 주의와 배려가 요구되는. 나도 처음엔 일방적으로 뻑이 갔었던 적이 있었지. 근데, 내가 너에게 충고 한마디 하겠는데 절대 여자가 먼저 뻑이 가면 안 된다. 그건 자멸로 가는 지름길이야. 이 시점에서 내가 깨달은 건, 연애와 사랑은 진실의 문제지만, 결혼은 사실과 관계의 문제거든."
또 딸 앞에서 말 안 해도 좋을 말을 해버렸다는 생각이 들자마자 더 하려던 말을 접고 입을 다물었다. 아니나 다를까, 가을이 나를 ‘그럼 그렇지’ 하는 얼굴로 나를 보고 있다.
"엄마, 막 피어나는 딸한테 그렇게 비관적으로 말해도 되는 거유? 이 좋은 일요일 아침에 그런 말을 하면 없던 로망도 도망간다고."
가을이 인상을 찡그리며 말한다. 그 인상 찡그리는 그것까지도 남편의 복제판이다. 그래도 예쁘다. 언제까지 예쁠지는 장담할 수는 없지만.
“막 피어나는 딸은 아니고 활짝 핀 내 딸 가을, 현실을 직시하면, 미래가 행복해져. 사랑 앞에서 풍덩 하는 게 아니라, 준비운동하고, 심호흡도 해본 후 적당하다 싶으면 그때 다이빙을 해도 된다는 말이지. 말하자면 인생의 선배로서 알려주는 연애의 tip이다. 대책 없는 풍덩은 심청이나 이 엄마나 하는 짓이지. 니들은 절대 그래선 안 된다는 거 잊지 마!”
"엄마는 날 엄마의 눈으로 봐주라니까. 인생 선배는 나 많거든. 참, 둘이 보면 헷갈려. 어떨 땐 죽이 잘 맞는 것 같고, 또 어떨 때는 그런 원수가 없는 것 같기도 하고. 진짜 왜들 그래?"
가을이 볼 풍선을 불며 툴툴거린다.
"가을, 엄마나 아빠로 인해 사는데, 불편하거나 불행했던 적 있었어?"
"그런 건 없었지. 평균 이상이었지."
"항상 사랑으로 차고 넘치지 않는 결혼 생활 속에서도 너를 요만 큼 키웠다는 건 내 능력이 탁월했다는 거 아니겠니? 지속적인 결혼 생활에 꼭, 반드시 사랑이 필요한 건 아니다. 순도 100% 사랑만이 아닌 인내와 일방적인 배려만으로도 이만큼 가정을 꾸린다는 거 그거 놀라운 능력이야. 나는 정말 상 받아야 해"
"무슨 상? 허난설헌 상?"
"아니, 신사임당 상!"
가을이 풋 하고 웃음을 터트린다. 살짝 기분이 나빠지려고 한다. 이젠 딸마저 엄마의 존재감을 잊고 있다는 증거니까.
"뭐야, 그 웃음의 의미는?"
"엄만 난설헌 스타일이지 사임당 스타일은 아니거든. 너무 엄마 스스로한테 점수를 너무 많이 주는 거 아냐?"
"왜 이래, 나는 최선을 다했어."
나는 딸에게 강하게 항의했다. 딸은 나의 알량한 헌신을 몰라준다.
"뭐 그런 면도 있기는 했지. 하지만 그런 느낌은 들 때가 있었어. 마치 유치원에서 역할 놀이 할 때의 느낌. 사실 엄마랑 아빠가 끝내주는 금슬을 자랑하는 부부는 아니었잖아? 마치 군대 동기 같은 분위기로 사는 것 같았거든."
"누구나 다 약간은 아바타로 살아가. 누군가의 지시대로, 나의 의지보다는 타인의 의지대로. 너는 안 그럴 줄 알지? 대한민국에서 여자로 사는 것보다 아내와 며느리로 사는 거 얼마나 힘든지는 결혼해 보면 알 것이다. 선택만 할 수 있다면 나는 이 땅에서 절대 여자로 태어나지 않을 생각이다."
그런데 내가 왜 아침부터 딸과 이런 이야기를 하는 걸까? 아무래도 내가 논리적인 딸에게 또 걸려든 것 같은 기분이 든다.
"엄마는 그다지 아바타였던 것 같지는 않은데?"
가을이 뾰쪽한 어조로 묻는다.
"나도 예외는 아니지. 수많은 아바타가 내 안에 있어서 나에게 지시를 해. 며느리 아바타, 딸 아바타, 엄마 아바타, 작가 아바타, 옆집 교양 있는 아줌마 아바타. 종량제 때문에 흥분하는 반장 아줌마 아바타, 그래도 나는 내 역할에 비교적 충실했다고 자부한다."
이제 막 사회생활을 시작한 큰딸 가을이 갑자기 심각한 얼굴이 된다. 그러더니 새로운 것을 발견한 듯 눈을 반짝거린다.
“ 왜, 오만 원권 지폐에 시를 짓는 재능이 중국까지 소문난 허난설헌이 아니라 사임당이 들어갔는지 알아?”
“허난설헌은 이이 같은 아들이 없어서?”
“빙고.”
“너 애가 사고가 너무 고루한 거 아니니?”
“내 말은 아직 우리나라는 여자에게 그 정도의 등급밖엔 안 준다는 거지. 예술성보다는 ‘엄마는 위대하다.’ 뭐 이런 거지. 율곡 이이의 엄마였기에 가능한 거라고. 10만 원 권을 만들어서 반드시 허난설헌을 지폐에 턱 하니 넣어야 한다고.”
나는 단단해 보이는 가을의 얼굴을 보며 담배 연기를 들여 마셨다. 여유 작작 내뱉었다간 뭔 소리를 들을지 모르기 때문이다.
나는 평생 딸이 나 같은 오류에 빠지지 않기를 바랐다. 그래서 대학도 여대로 가기를 강력히 주장했고, 일찍 연애하는 것을 경계하기 위해 서른 이전에 만나는 남자는 죄다 친구라고 눈만 마주치면 세뇌를 시켰다. 하지만 요즘 들어서 그러한 나의 주도면밀한 계획이 성공적이지만은 않을 거라는 생각이 드는 건 왤까?
모든 이의 로망 같은 홈드라마는 연출해주지 못했지만 리얼다큐 쪽으로는 확실했기에 현실감 있고, 경쟁력 있는 아이로 키웠다는 건 자랑할 만하다. 부작용이 좀 있다면 가을은 환상보다는 늘 현실만 정곡을 찔러서 주입한 엄마 덕에 적어도 표면적으로는 연애다운 연애도 하지 않은 도도한 애가 되었다는 것이다.
매사에 시니컬한 엄마를 둔 덕에 일요일엔 쥐포나 뜯으며 그 좋아하는 영화 감상이나 하는 건어물녀가 될까 살짝 걱정이기는 하지만 그래도 나의 딸들은 결혼보다는 독립과 자존이 우선이다. 누구 탓을 하는 사람보다는 정면 돌파를 하는 승부사 기질을 배우게 하고 싶었다. 딸이라서, 여자라서 차별받는다고 불평하며 살게 하고 싶지 않았기에 로맨틱보다는 의도적으로 리얼다큐 쪽으로 끌고 왔다. 그게 첫사랑에 몰빵한 덕에 망한 엄마가 딸들을 키우는 전략이었다.
미드 <프린지>의 주인공인 올리비아처럼 존재감 있는 삶을 살기를 바랐다. 물론 나의 못다 이룬 염원을 딸의 삶에 투영시키고 싶어 하는 마음이 없다고 말할 수는 없다. 각서를 교환했기에 직접적으로는 간섭할 수 없지만 주도면밀하게 딸의 인생에 개입하고자 하는 나의 공작은 암암리에 진행됐다. 그리고 그 결과는 조만간 나타날 예정이다.
"그래 의사쌤 어떠셔?"
저녁은 항상 여섯 시 이전에 봄이 말처럼 거지같이 먹이고 여섯 시 이후엔, 배고프다고 아무리 호소해도 절대 음식을 주지 않고, 마요네즈보다는 올리브유와 직접 만든 샐러드드레싱을 얹은 과일샐러드로 허기를 채우게 한 덕에 지금은 봐줄 만한 몸매를 자랑하는 가을을 뿌듯하게 바라봤다. 현재의 가을의 모습이 있게 하려고 나는 매일 7시 이후엔 주방 문을 가차 없이 닫아버리는 조처한 탓에 ‘마녀 엄마’라는 소리를 수없이 들었다.
“뭐. 재미있지. 종일 정신이 없어.”
“일이 재밌어 아니면 연애?”
“...... 아직은 연애보다는 일이 더 재미있어."
나의 흑심을 간파한 영리한 가을이 미묘한 표정을 지으며 대답했다.
음, 역시 가을은 지금 내가 원하고 바라던 쪽으로 키를 집은 듯했다. 반짝반짝 빛나는 얼굴에 만족감이 스친다. 그런데도 머릿속을 스치는 알 수 없는 이 불안감은 무엇일까? 엄마와 작가의 촉이 동시에 발동해 딱 집어낼 수 없는 무언가가 잡힌다. 부디 죽 쑤어서 개 주는 일은 없어야 할 터인데.
“결혼은 생각 없어?”
“엄마는 내가 지금 몇 살인데 결혼이야.”
가을이 정색하며 머리를 흔든다.
갑자기 아침이 환해진다. 머릿속에 잔뜩 끼었던 안개가 일순간 사라지는 것 같은 기분이다. 전생에 딸은 친구고 아들은 연인이었다고 하는데 아무래도 나는 좋은 친구를 셋이나 두었나 보다.
"괜찮은 남자는 있어?"
딸의 연애는 모든 엄마의 로망이다. 나 역시 그 대열에서 벗어날 수 없는지라 턱을 바치고 물었다. 딸의 연애가 시작되면 엄마도 덩달아 가슴이 설레고 흥분하게 된다는 말이 영 틀린 말은 아니다.
"있으면, 담배 끊을 거야?"
"그건 아니지. 너의 연애와 나의 흡연과는 별개야. 우리 오래전에 서로 각서 교환한 걸로 아는데. 너는 내 흡연에, 나는 너의 미래에 간섭 안 하기로."
나는 천만의 말씀이라는 표정을 지으며 가을을 봤다.
"내가 미쳐. 나중에 잘하면 장모랑 사위랑 같이 흡연하시겠네?"
"시집은 가려고 하나 보네?
나는 깊게 들여 마셨던 담배 연기를 훅하고 뱉으며 웃었다. 다행히 활짝 열어둔 주방 창문으로 담배연기가 춤을 추듯 날아간다. 안 그랬으면 또 한 소리 들을 뻔했다. 그리고 주택에 살아서 그나마 다행이다. 주택이 아니었다면 공공의 적이나 대역죄인인 되었을 테니.
오십을 목전에 두니 남편보다 커피나 담배 같은 기호식품하고 있을 때가 더 좋고 행복하다. 요즘 나는 곰탕을 발견한 조상과, 인스턴트식품을 개발한 이름 모를 분께 매 순간 감사한다.
"왜 자꾸 웃는 건데?"
가을이 다 마신 커피잔을 거꾸로 들고 흔들며 말한다.
"다행이다. 머리는 나보단 네 아빠 쪽을 닮아서 공부를 좀 한 덕에. 암튼 여러 가지로 고맙다. 엄마가."
"뭐 나도 좋아서 한 공부는 아냐. 그나마 내가 가장 잘하는 거라서."
학교 다닐 때 공부 열심히 안 한 나 같은 사람들의 염장 지르는 소리를 자연스럽게도 잘하는 가을을 물끄러미 바라봤다. 역시 오만한 종자는 다르다.
"여하간에 고맙다. 나는 백번을 환생해도 못 갈 의대씩이나 가서 의사 선생도 되시고, 다 커서 이 엄마에게 잔소리도 하시고, 아무튼, 멀쩡하게 잘 커 줘서. 살짝 건어물녀 조짐이 보이기는 하지만. 21세기엔 흉도 아니지. 아니, 오히려 바람직해."
"무슨 선생씩이나."
그 상황이 좀 불만인지 입을 삐죽인다.
"암튼 네 인생이 계속 브라보 하기를 빈다. 넌 열심히 했고, 그다지 다정한 딸은 아니었지만 자랑스러운 딸인 적도 있으니까.”
그건 그렇다는 듯 가을이 씩 웃는다. 종종 까칠해서 나를 어렵게 하지만 그래도 나름 잘 커 줬다. 때론 나를 넘어서려고 건방을 떨어서 밉상이긴 하지만.
"너, 그거 기억하냐?"
"뭐?"
"우리 한 창 어려웠을 때였나? 추운 겨울에 막 다섯 살 된 너랑 전단지 돌렸던 거? 글쓰기 레슨 전단 붙인다고 자전거 타고 이 아파트 저 아파트 돌아다녔잖아. 너, 아무것도 모르면서 집집이 전단 넣는다고 깡충깡충 뛰어다녔어."
"기억해. 재미있었어. 그때 늘 이모가 내게 옷을 사줬는데."
그래선지 이모에겐 유난히 싹싹한 가을이 말한다.
가을은 그때도 내 손안에 들어오는 딸은 아니었다. 늘 공처럼 튀는 아이였지. 어쩌면 가을과 내가 힘들었던 한때를 둘이서 같이 통과했기에 그렇게 싸웠으면서도 잘 통하는 건지도 모르겠다. 준비되지 않아서 힘든 부모 밑에 태어나서 엄마의 손보다는 이모와 외할머니의 손을 빌리는 적이 많았던 가을이. 그래선지 가을은 지금도 싸울 때면 종종 '나만 엄마가 키우지 않잖아?'라고 해서 염장을 지른다.
"미안했다."
나는 조용히 딸에게 말했다. 그러나 나도 사정이 있었다. 어렸고 학교도 다녀야 했다. 그리고 얼결에 쓴 글로 등단해서 소설가가 되는 바람에 정신이 없었다. 제일 힘들었던 것이 엄마 노릇이었다. 무조건 대학은 졸업해야 한다는 친정엄마 덕에 겨우 대학을 졸업했다. 남편은 군대에 갔고, 나는 낯선 동네에 벌어진 기분이었다. 아마 쌍둥이 동생이 없었다면 대학 졸업은 꿈도 꾸지 못했을 것이다.
"엄만 글 써서 돈 벌었고, 나는 재미있었고. 그러면 된 거 아냐? 근데 그때 아빤 뭐 했지?"
"대학 다니며 자유를 구가하는 중이었을 걸 아마. 암튼 정말 미안했다."
"뭘 그게 최선이었잖아. 대신 이모랑 이모 회사도 놀러 가고 외할머니랑 온종일 놀고, 외할아버지랑 발레 학원도 다녔잖아. 아마 외할아버지랑 발레 학원 다녔던 애는 그 클래스에서 나뿐이었을걸."
가을이 말이 맞는다. 그것이 최선이었고, 재미있었다면 된 것이다. 생각 없이 말하고, 제가 하고 싶은 것만 하려고 하던 딸의 모습과 지금의 모습 그리고 다섯살짜리 딸의 모습이 내 기억 속에서 서로 어우러진다. 매를 맞아도 항상 왜 맞는지 이유를 따지고, 잘못했다고 사과하라고 하면 저도 잘못했지만 때린 엄마도 잘못이니 동시에 사과하자고 깐죽거리던 딸은 이제 의사가 됐다.
"고맙다. 이렇게 오랫동안 같이 수다를 떨어줘서."
“나도 고마워.”
가을이 커피를 마시며 간단명료하게 말한다.
"뭐가 고마운데?"
“엄마가 나를 철저하게 방목한 탓에 다른 애들처럼 스트레스 안 받고 공부했거든."
“사실 그게 먹고 살기 바빠서 신경 못 쓴 건데, 그렇게 해석해주니 고맙다. 딸, 그때 나 엄청 속으론 걱정했다.”
"그래서 고맙다는 거야. 일찌감치 포기해줘서."
포기해줘서 고맙다고? 하지만 가을은 모른다. 그 포기가 쉽게, 간단히 됐던 일이 아니라는 걸. 이 나라 교육담당자가 부모를 골탕 먹이려고 작정을 한 건지 시시때때로 대학 입시 정책을 바꾸고 하는 상황에서 나처럼 전략에 둔한 엄마는 머리에 쥐가 날 지경이었다. 그러니 그냥 포기할밖에. 그런데도 가을은 선전했으니 큰소리치며 알량한 나의 공을 자랑할 입장은 아니다.
“말로만? 지중해 크루즈 어때?”
"설마 어버이날 선물로 지중해 크루즈를 말하는 건 아니지?"
"그런 건데, 왜 안 되나 딸?"
"너무 많이 쓰셨다. 엄마."
가을이 그렇게 말하더니 재빨리 주방에서 나간다.
“기집애! 빈말이라도 '엄마, 월급 타서 제가 쏠게요' 하면 어디가 덧나냐?”
가을의 태도로 봐서 앞으로 크루즈는커녕 한강 유람선도 내 돈을 내고 타야 할지도 모른다.
“참, 엄마 자궁경부암 검사했어?”
떨켜로 올라갔던 겨울이 다시 내려오더니 묻는다.
“왜?”
“사십 대엔 첵크 해야지. 내가 예약해 놓을까?”
“뭐 하러. 나라에서 공짜로 받으라고 검진표도 날아왔던데.”
“암튼 엄마 우리나라 사십 대 여성 10만 명 중 이백몇 명쯤 걸려. 관리하셔. 나중에 땅을 치지 말고.”
“나야말로 건전한 외길 인생인데 그걸 받아야 하나?”
“아빠도 외길 인생인지 그건 모르지. 아 미안! 하지만 이건 통계야. 우리나라 여자들의 자궁경부암을 에게 발생시키는 유두종 바이러스는 대부분 남편에게 옮거든.”
“너무 적나라한 거 아냐?”
“엄마 난 의사야. 그래서 가능성을 염두에 두고 말하는 거라고. 미리 검사해서 나쁠 건 없잖아.”
딸이 이젠 나의 자궁경부암 걱정을 하고 갱년기는 문 뒤에서 바로 노크를 하기 직전이다. 갑자기 암울해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