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La Familia

Ⅰ. 홈메이드 인생

by Dear Lesileyuki

대체 누가 인생은 아름답다고 했을까?

나는 그 아름다움을 아직 경험하지 못했다. 그저 시간이 흘러가는 것이 지루할 뿐이다. 염치와 도리를 외면하면 천하무적이라고 했는데, 염치를 내동댕이치지 못해서 천하무적도

되어 본 적이 없다. 이도 저도 아닌 그렇고 그런 인생인 셈이다. 이쯤 되면 나의 유일한 목표, 현상 유지에는 근접했다.

요즘은 홈메이드가 대세이다. 심지어 대량생산을 통해 최고의 이익을 추구하는 식품회사조차 홈메이드를 강조한다. 가정에서 만들어지는 모든 것은 정성과 사랑이 가득 들어간 최고인 것처럼 말한다. 글쎄 나는 과연 21세기에 홈메이드가 있기는 한지 묻고 싶다. 그저 유사 홈 메이드가 판을 칠 뿐이다. 우리의 인생에서도 홈메이드는 생각보다 달콤하고 편안하지 않다는 것을 나는 아주 오래전에 이미 알아버렸다.

나는 매일 아침에 일어나면 제일 먼저 커피믹스를 타서 마시고 주방 한쪽에 마련한 작은 책상에 놓인 노트북을 켜지만 접신이 안되는 탓에 한 줄도 제대로 못 쓰고, 큰 스테인리스 통에 담긴 사골국에 불을 지른다. 마치 내 마음에 불을 지르듯이 말이다.

며칠 동안 끓이고 있는 사골국은 간편한 식생활을 위한 가장 좋은 선택이다. 요리는 잘하지도 못하고 잘하고 싶은 생각도 없으나 영리하게 하는 편이다. 대기업의 협찬을 받아서 만두 국을 끓이고 대기업의 된장찌개에 물타기를 하고 소금 간을 한 다음에 역시 대기업에서 출시한 두부와 파를 넣으면 가정식이 된다. 종종 주변 조력자의 도움을 받는다. 그 조력자는 자주 가는 반찬가게 주인이다.

일찌감치 다니던 광고회사에서 독립해 자신만의 회사를 차린 예전의 직장동료가 아르바이트로 준 광고 문구 작성을 하거나 아직도 홍보실에 발붙이고 있는 친구 덕에 고정칼럼을 맡아 한 달에 한 번 쓰고 칼럼을 쓴다. 주로 가족 이야기 이거나 혹은 쟁여 둔 여행지의 추억 같은 것이 주제이다. 이른바 제살깎아먹기식 글쓰기라고 할 수 있다.

마음에 한기가 들 때면 나는 타이거밀크를 마신다. 동생이랑 나는 어릴 때부터 화가 나거나 우울할 때 혹은 마음이 춥거나 씁쓸할 때 타이커밀크를 마셨다. 꽤 오래된 습관이다.

‘타이거밀크’는 이란성 쌍둥이 동생이 좋아하는 미국 시리얼 업체 ‘켈로그 콘프로스트’를 우유에 말아 먹고 남은, 달콤한 우유를 말한다. 시리얼은 대학교 다닐 때 아침이면 내 옷을 입고 먼저 학교로 줄행랑을 치는 것이 다반사인 동생이 기동성 확보를 위해 선택한 아침 메뉴였다. 늘 동생은 전날 내가 골라 놓은 원피스를 입고 튀었고, 나는 동생에게 쉴새 없이 진주만 폭격에 버금 하는 문자 폭탄을 날렸다.

‘네가 아주 영정사진 찍고 싶어서 미쳤구나!’

‘너 병풍 뒤에서 향냄새 맞고 싶지. 당장 벗어 놔라’

아마도 욕도 추가했을 것이다. 시베리아허스키부터 열여덟 마리 강아지 이야기까지 포함해서 육두문자를 날렸으나 동생은 언제나 그렇듯 답이 없었다. 내가 강철 이빨이라면 동생은 강철 얼굴이었다. 그래도 참아주는 것은 장사하는 엄마 대신 살림을 거의 맞아서 하기 때문이었다. 주방엔 얼씬도 안하던 나와 달리 동생은 10대부터 밀가루를 직접 반죽해 만든 손칼국수로 식구들의 입맛을 사로잡은 솜씨 덕에 어지간한 죄는 무죄였다. ‘입맛을 잡은 자 집안을 잡는다’라는 말이 우리 집에서 통했다. 그러나 옷만은 양보를 못 했다, 경제 관념이 투철한 친정엄마는 항상 2인 1복의 원칙을 고수했기 때문이다. 두 명 중 하나가 옷을 입고 나가면 다른 사람은 다른 옷을 입을 입고 나가야 했다. 그 쟁탈전에서 늘 패하는 사람은 나였다. 밤늦게까지 책 읽고, 글 쓴다고 새벽에 잠이 드는 탓에 유난히 아침잠이 많았기 때문이다.

분노 게이지가 상승해 주방을 어슬렁거리는데 식탁 위에 덩그러니 놓인 시리얼과 봉투와 컵이 눈에 들어왔다. 포효하는 호랑이가 아니라 활짝 웃는 호랑이가 그려진 컵이었다.

내가 처음 타이거밀크에 위로를 받은 것은 전날 내 친구와 사랑과 우정 그 어디쯤 있다고 생각했던 남사친이 사귄다는 소식을 듣고 깡 조수 한 병을 마신 탓에 뇌가 풍선처럼 팽창해 터질 것 같은 날이었다. 실연의 아픔보다는 배신감 때문이었다. 모두 다 알고 있는데 나만 몰랐다는 것이 분했다고나 할까? 지금에서 생각해 보니 사랑은 원래 치사한 건데 왜 그때는 사랑에 의리를 대입했는지 모르겠다.

아무튼 우연히 동생이 시리얼은 다 건져 먹고 남긴 타이거밀크를 마시는 순간 쓰렸던 속은 언제 그랬다는 듯 편안해졌고 했고, 지난밤 내 머릿속 가득했던 울분과 쪽팔림도 사라졌다. 그때 이후 나는 종종 우울할 때, 혹은 위로가 필요할 때 시리얼을 우린 ‘타이거밀크’를 마신다. 우유의 부드러움과 설탕에 코팅된 시리얼의 고소함이 우러난 맛이 일상에서 좌절하고 때론 부당하다고 느끼는 홈메이드들에게 속사포를 날리고 싶은 임계점에 달했을 때 적당히 나를 진정시켜준다.

그런데 이제 ‘타이거밀크’도 통하지 않는 시간이 내 앞에 불쑥 나타났다. 드디어 그렇게 부정하던 능력의 한계와 실패를 인정해야 하는 건가?

카타르 월드컵에서 축구 선수들이 태극기에 썼던 ‘중꺽마’, 중요한 것은 꺾이지 않는 마음이 개뿔이라는 것은 인정해야 하는 건가? 아마도 그래야 할 것 같다. 며칠 전 인터넷을 검색하다가 본 과거의 라이벌, 물론 나 혼자만 그렇게 생각했다. 어쨌든 작가로 잘나가는 그녀의 기사를 보는 순간 내 입에서 나온 말은 네 글자였다.

‘내가 졌다.’

인생에서도, 헤어진 첫사랑의 미련처럼 놓지 못하던 소설에서도 나는 그녀에게 졌다. 인정하고 나니 온통 소화불량인 것처럼 365일 아프던 배가 일순 정리가 된다. 이것이 그 고차원적인 무소유와 비움의 결과인가?

작가와 배우와의 만남이란 주제로 그녀가 나의 ‘인생 배우’ 오다기리 조와 한 매체에서 인터뷰했다. 그 기사를 본 순간 나는 너덜너덜 망가진 죽부인처럼 의자 밑으로 굴러떨어졌다. 그 와중에도 행복해서 죽겠다는 듯 햇살처럼 환한 웃는 그녀의 얼굴이 천정에 스티커처럼 붙어 있었다. 졌다. 인생은 역시 배려가 없다. 정상참작은 더더욱 없고.

등단은 같이했으나 길이 너무나 달랐다. 그녀는 결혼도 안 하고 달인 정신으로 글쓰기에 매진했다. 그리고 예약되어 있었다는 듯 그녀의 찬란한 글쓰기 시대가 열렸다.

그럼 나는 어땠냐고? 겁도 없이 대학 1학년에 등단하고 바로 결혼했다. 남편은 나의 두 번째 사랑이다. 스물의 나는 지금의 내가 생각해도 미치지 않으면 벌일 수 없는 일을 했다. 엄마는 나에게 공식적으로 ‘미친년’이라고 하며 죄 없는 마룻바닥만 손바닥으로 내리치며 통곡을 하셨고, 그 이후 엄마의 노래방 애창곡은 ‘배신자’였다. 이란성 쌍둥이 동생은 나와 정반대의 길을 갔다. 동생은 아직도 독신의 호황을 누리며 당당한 디자인 회사의 대표로 멋지게 살고 있다. 동생은 내 딸들의 ‘워너비 이모’이다. 돈 잘 벌고, 당당하며, 예나 지금이나 옷 잘 입는 동생은 내 딸들에게 멋지고 후한 이모다. 그에 비하면 나는 하루하루를 나른하고 지나치게 성실하게 살고 있다.

결혼해서 애를 셋이나 낳고, 돈이 되는 글은 다 쓰면서 정작 쓰고 싶은 글은 5년에 한 번 낼까 말까로 살았다. 출판과 동시에 빛의 속도로 사라진다는 것도 인정한다. 나만의 라이벌, 그녀가 글쓰기의 장인으로 살았다면 나는 생활의 달인으로 살았다는 것을.

그녀와 나 사이엔 엄청난 차이가 있다는 것을 진작에 인정해 나이 오십을 목전에 두고 잠시 현자가 되었다고 생각했는데, 그 기사는 나를 절망의 방석 한가운데로 가차 없이 날려버렸다. 여기서 ‘현자’의 의미는 깨달음의 깊이가 높은 사람이 아니라 현실을 자각한 사람이란 의미다. 1호 큰딸 가을이는 나를 ‘현자’라고 부른다. 일찌감치 현실을 자각해서 꿈이 사라졌다고. 맞다. 나는 잠실의 숨은 현자이다. 가끔 잠실철교를 야밤에 건너는 길 잃은 현자이기도 하다.

나는 딸이 셋이다. 의대에 다니고 있는 1호 가을, 행정학을 전공하고 있지만, 휴학의 나날을 보내고 있는 겨울, 그리고 예고를 나와서 주변의 시선은 아랑곳하지 않고 가고 싶은 대학을 가겠다며 삼 수를 하는 막내 봄이다. 원하던 대학을 1차 성적 컷을 통과하고 실기를 보고 온 난 봄이 ‘엄마, 옆에 계신 분이 이모와 나이가 같았어. 그러고 보니 예술을 하는데 나이는 필요 없는 것 같아. 필요한 것은 열정이지 때가 아닌 것 같아’라고 했다

그 말을 듣는 순간 나는 삼수쯤은 아랑곳하지 않겠다는 봄의 경고처럼 느껴져서 잠시 머리가 띵했다. 꿈을 실현하는 데는 역시나 돈이 필요하고 그것을 위해 나는 또 얼마나 많은 잡문을 미친 듯 써댈지 보였기 때문이다.

그런 나에 비해 딸들은 제 맘대로 살고 있다. 그러나 나는 그들을 지지한다. 나 역시 내 맘대로 살았기 때문이다. 무엇이 될지는 모르나 인생은 의외의 곳으로 안내하는 일이 종종 있다는 것을 알기에 무사히 목적지에 도착하기를 바랄 뿐이다. 누군가 너는 잘 도착했냐고 묻는다면 나는 할 말이 없다. 내 인생에는 약간의 오류가 있었기 때문이다.

딸들과 달리 나는 꿈의 소멸 시대를 살고 있다. 꿈 같은 것은 밤에 꾸는 악몽 정도다. 선녀가 하늘로 다시 돌아갈 수 있었던 것은 아이가 두 명이었기에 가능한 일이다. 21세기에 세 명의 딸을 키운다면 불가능하다. 그것도 각기 저마다의 개성이 만발한 아이들이라면 더욱 그렇다.

나는 창문을 열고 목을 반쯤 밖으로 내민 채로 담배를 피웠다. 딸 1호와 남편이 집안 공기를 오염시키는 유해 물질 배출자라고 하지만 오늘은 피지 않을 수가 없다. 이유는 아버지 때문이다. 어쩌면 아버지가 치매일지도 모른다는 이야기를 들었기 때문이다.

친정엄마가 며칠 전 아버지가 집을 나간 후 길을 잃었다가 겨우 찾아서 집에 왔다고 전화로 푸념을 했다. 차라리 요양원에 모시자고 주장을 했지만 나는 대답하지 않았다. 그런데 왜 아버지는 내가 사는 근처 잠실 석촌호수를 헤매다 길을 잃으셨을까?

친정은 가부장(家父長)보다는 살짝 가모장(家母長) 쪽이다. 엄마의 발언이 항상 셌다. 듣고 있는 사람은 언제나 아버지였다. 사업실패 이후 아버지는 점점 방어형이 되었다. 그에 반해 엄마는 늘 매사에 공격적이었다.

동생과 나는 한 달에 한 번씩 당뇨약 때문에 아버지를 병원을 모시고 간다. 엄마는 아버지에게 관심이 없다. 아버지가 복용하는 당뇨약을 챙기라고 해도 ‘치매도 아니라고 하는데 알아서 먹는 거지 뭐, 라고 한다. 남동생은 회사 때문에 평일에는 시간을 낼 수 없다고 하지만 ‘남의 집 아들’ 역할에 충실 하느라고 바쁜 그에게는 앞으로도 항상 시간이 없을 것이다. 아버지는 치매 진단 검사를 받은 후 노화로 인한 인지력 저하 진단을 받았다. 테스트 결과 올해로 여든둘이 된 아버지는 기억력도 좋았다. 그러함에도 엄마는 요양원을 찾아보라고 했다. 그 정도는 아니라고 조금이라도 아버지를 두둔하려고 하면 아버지 편만 든다고 화를 낸다. 전화도 혼자서 화를 내다가 끊었다. 엄마는 사람을 열받게 하는 신묘한 재주를 가지고 있는 것임이 분명하다. 어릴 때부터 엄마는 항상 의논의 대상이 아니었다. 의논을 해본 적이 없다. 오히려 나는 엄마의 푸념을 들어주어야 하는 존재였다.

아버지는 외아들이었다. 위로 고모들이 세 명, 아래도 나와 친한 막내 고모가 있었다. 엄마와 고모들과 사이가 안 좋아지면 고모를 만나지도 못했다. 일종의 ‘왕래 금지’인데 나는 아랑곳하지 않고 고모를 찾아가고 용돈을 받고 잘 지낸 탓에 욕도 많이 먹었다. 누구와도 잘 지내자 하는 것이 나의 원칙이었기에 엄마의 일방적인 ‘선포’를 거부했다. 특히 나는 막내 고모를 좋아했다. 나에게만 그랬을지 모르나 막내 고모는 너그러웠다. 나는 지금도 너그러운 사람이 좋다. 아직도 나는 고모가 키우던 꽃밭에서 바카스 병을 들고 서 있는 내 사진을 간직하고 있다. 흑백사진 속의 어린 나는 두 손으로 바카스 병을 들고 서서 앞을 노려보고 있다. 다섯 살에 바카스를 영접하고 삐딱하게 서서 앞으로 응시하는 나는 이미 그때 고모가 사준 바카스 때문에 카페인 중독 되었음이 분명하다.

멋 부리기 좋아하는 동생과 달리 엄마가 나에 대한 기대가 컸다는 것은 알고 있었다. 적당히 공부도 했고, 성깔도 있어서 아들로 태어났으면 좋았을 것이라는 말을 듣곤 했으니까. 대학 1학년 때 소설에 당선되어 작가가 되고 책을 냈을 때도 엄마는 미친 듯 좋아했다. 그러나 나는 엄마가 그런 소리를 할 할 때마다 아니라서 다행이라고 속으로 생각했다.

너무나 결이 다른 모녀지간인 엄마와 나는 전화할 때마다 싸운다. 마지막 마무리는 언제나 엄마의 ‘너는 누구 편이냐?’이다. 다시는 전화하지 않겠다고 일방적으로 끊고 언제 그랬냐는 듯이 전화를 해서 아버지 때문에 못 살겠다고 한다. 덜컥 치매라도 걸리면 엄마는 현대판 고려장을 감행할 작정인가? 라는 생각이 들 정도이다.

이래저래 우울한 마음에 담배를 피우게 된다. 새벽은 잡다한 생각을 소각하는 시간이니까. 나는 머릿속에 꽉 찬 생각들을 어릴 때 봄이 봤던 만화 속의 용가리처럼 담배 연기와 함께 내뿜었다.

나는 좋은 며느리가 아니었다. 맏며느리로서 위아래를 아우르며, 참고 인내하며 가족의 화목을 위해 희생하는 엿 같은 19세기 스타일의 며느리는 아니었는 말이다. 나는 그럴 생각이 전혀 없었다.

처음에 아니다 싶어서 돌아가고 싶었다. 그러나 누구나 탑승 가능한 결혼 열차에서 중도하차 하지 않았던 이유는 단 하나였다. 일말의 자존심. 그리고 언제 이혼하나 기다리고 있는 것 같은 시누이들 때문이었다. 나는 그들이 엄마 말처럼 깨춤을 추는 꼴을 보고 싶지 않았다. 사랑에 미쳐서 결혼한 내가 그들의 다른 언어를 이해하고 싶지 않다고 생각했던 것은 그들의 뒷담화를 듣게 되면서부터였다.

그들은 남자 형제의 배우자를 결혼한 이래 쭉 일관되게 씹었다. 아니 지금도 씹는다. 그러나 지금의 나는 그들은 루저쯤으로 취급한다. 왜냐고 묻는다면 나는 그들과 다르기 때문이다. 적어도 나는 내 일을 가지고 누구의 도움도 없이 내 삶을 꾸려왔고, 20세 이후 완벽하게 부모로부터 금전적으로 독립했다.

나는 아직도 정서적으로 19세기에 머무는 시댁에서 대처하기 위한 나만의 인생을 위한 설명서를 만들었다. 희로애락, 항목별로 분류되어 각각의 대처 방법이 있다. 그중 가장 좋은 방법은 ‘무관심’이다.

그런데 사랑에 관한 설명서는 만들지 못했다. 가족 간에는 무엇보다 사랑에 관한 설명서가 필요한 때 임에도 불구하고 말이다. 불면증과 한숨이 내 안에서 버무려지고 있는 요즘에는 더 필요하다. 까칠한 큰딸과 대화를 할 때면 내 안에서 꿈틀거리는 인내의 화산이 폭발하기 직전이라는 것을 감지할 때, 나는 엄마의 말을 떠올린다.

‘너 똑 닮은 딸 낳아서 고생 좀 해봐라’

가을과 나 사이의 정서적인 거리는 지구와 안드로메다 사이의 거리만큼 떨어져 있는 것 같다. 머리 좋은 자식은 역시 부모를 열받게 하는데 일가견이 있다. 무슨 말만 하면 ‘그 DNA가 어디서 왔겠어?’이니 엄마의 말이 현실이 된 것인가? 욕조에서 비누 장난을 하며 멋쟁이 토마토를 부르던 그 아이는 대체 어디로 사라져버린 것일까?

나는 종종 집안의 수신 불가 구역에 홀로 서 있는 것 같다는 생각이 든다. 무조건 나보다 오래 살 작정을 한 것처럼 미친 듯이 운동하는 운동중독 남편, 나의 알량한 헌신은 무시하고 저 혼자 컸다는 듯 제멋대로 사는 딸 셋과 사는 나에는 더욱 그놈의 안내서가 필요하다. 지진이 발생하면 대처하는 설명서가 있듯이 국가 차원에서 표준화시킨 설명서를 배포해 종종 지진에 버금가는 일상에 대처할 수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 그야말로 요즘은 맨붕이다.

마침내 아버지가 입원하셨다. 아버지는 오래전부터 당뇨를 앓고 계셨다. 그런데 당뇨약을 열흘 이상 드시지 않았다. 평소에도 약은 스스로 챙길 정도였기에 별다른 걱정하지 않았는데 왜 그러셨을까? 담당의는 고령으로 인해 약간의 인지장애가 있으나 검사 결과는 치매가 아니라고 했지만, 의사도 아닌 엄마는 아버지가 치매라서 약을 먹는 것을 까먹었다고 했다. 그러나 그것은 엄마가 믿고 싶은 것일지도 모른다.

“아니, 엄마가 아버지의 약을 챙겨야지 그럼.”

나는 최대한 감정을 억누르며 조용히 말했다.

“아니, 약을 자기가 챙겨야지. 약 먹었냐고 물어보면 먹었다고 하는데 내가 더 뭘 어떻게 해. 나도 늙어서 힘 빠지고 지겨워.’

‘아니 힘 빠지는 사람이 매일 산에는 가시나?’ 하는 말이 입까지 나왔으나 혀끝을 깨물어 튀어나오려는 말을 틀어막았다.

노년의 정이 야박하기 이를 데 없다. 엄마가 이기적이라는 것은 알고 있었지만 그래도 부부지정까지는 아니라도 일말의 의리가 있다면 약은 챙겨줘야 하는 거 아닌가?

그러나 나 역시 한 달에 한 번 병원에 모시고 가고 한 달 치의 약을 챙겨드리는 것으로 마음의 불편함을 해결하고 있으니 잘하고 있고 할 수는 없다. 아버지를 향한 나의 감정은 불편함과 안쓰러움이 공존해서 한 발자국 내딛기가 힘들다.

종종 나는 엄마와의 거리감이 있을 때 모친이라는 단어를 쓴다.

언제가 고3이라 아침 일찍 등교하던 큰딸 가을이 내게 물었다. 아침에 엄마의 커피 가는 소리와 엑스재팬의 ‘forever love'소리를 들으며 아침잠을 깬다고. 일어나면 집안에 커피 향이 가득하고 아침에 그 커피와 토스트 한쪽을 먹는 것이 유일한 고3의 낙인데 엄마는 어떤 소리를 들으며 잠을 깼냐고. 그날 내가 했던 말을 다음과 같다. 글자 하나 틀리지 않고 기억한다.

“나의 모친께서는 늘 아침이면 화를 내셨지. 외할아버지와 싸우는 소리가 알람이거나 아니면 문을 박차고 들어와서 대체 언제까지 쳐 잘 거냐고 전투적으로 물으셨지. 성적이 본인의 기대에 못 미치면 성적표에 도장을 기세 있게 찍고는 한 말씀 하셨지. 발가락으로 시험을 봐도 이보단 나을 거라며.”

그때 가을은 ‘대박, 할머니 무적인데’라며 자지러지게 웃었다. 그때 생각했다. ‘역시 괴로움도 지나고 나면 웃음거리구나’

요즘 같은 시대에 감히 집에서 담배를 피울 수 있는 것은 그나마 주택이라서 가능하다. 아직 남편과 애들이 깨기 전이고 피운 후에는 환기를 시키고 향을 한 대 피우면 그만이다. 그럼 남편은 능청스럽게 그럴 것이다.

‘아침 일찍 기도했구나’

나에게는 모든 면에서 위로가 필요한 시간이다. 그나마 담배가 있어서 위로된다. 사실 한동안 담배를 끊었었다. 그러나 배드민턴 치다가 다친 무릎이 이차 퇴행성관절염으로 진행되어 고생하다가 결국 추벽 수술을 한 후 한동안 목발을 짚고 다니게 되면서 다시 피웠다. 수술 후 의사에게 추벽 제거 수술 후 나타날 증세를 들으며 나의 우아한 노후는 물 건너갔음을 예감했다. 기다리고 있는 것은 인공관절의 시대이고, ‘내 안에 스테인리스 있다’라는 말을 하게 될 날이 도래한 것이다.

주방 창가에 서서 담배를 피우고 있는데 지구에서 가장 끈질긴 생명력을 자랑한다는 바퀴벌레가 냉장고와 싱크대 사이에서 기어 나오더니 잠시 어디로 갈 것인가 고민하는 듯 멈칫했다. 순간 나는 반사적으로 슬리퍼를 벗어서 내리쳤다.

“참으로 미안하구나. 나의 휴머니즘과 너의 생명과는 아무런 연관성이 없단다. 단지 나의 취향이다. 너를 싫어하는 것은.”

나는 죽은 바퀴를 휴지에 싸서 화장실로 달려가 변기에 집어넣고 물을 내렸다.

갑자기 막내가 어릴 적 키우던 금붕어가 생각났다. 어느 날 금붕어가 죽어서 어항 물 위로 떠 올랐다. 보통의 엄마는 아이와 함께 장례식을 한 후 작별 인사까지 하며 정원 혹은 아파트 화단에 묻어준다는데 나는 과감하게 변기에 넣고 물을 내렸다. 거창한 장례식을 기대했던 막내는 순식간에 물에 휩쓸려 사라지는 금붕어를 보는 순간 울음을 터뜨렸다.

‘이제 금붕어는 연어처럼 자기가 왔던 물로 되돌아야. 물에서 온 애들은 물로 가야지 땅에 묻는 것이 아니야.’

‘연어처럼?’

‘그럼. 배수관을 타고 아마 바다로 갔을걸?’

그랬던 막내 봄이는 예중, 예고를 나와서 3수를 하고 있다. 금붕어를 사랑하고 새를 사랑하고 햄토리를 사랑했던 봄이 말이다. 물론 사랑하기만 했고 키우는 것은 어제나 나의 몫이었다. 3수쯤 되니까 자연스럽게 봄에게 말하게 된다. 돈은 바람이 날라 오는 것이 아니라고. 이번에는 좀 가자고 웃으면서 말하는 것은 이미 둘을 대학에 보내고 마지막 3수생을 둔 엄마의 여유이다.

바퀴벌레를 보내버리고 다시 돌아온 주방은 10년이 넘은 주방 사우들이 채우고 있다. 밥솥, 냉장고, 커피머신, 전기오븐은 나의 오래된 지기들이다. 심지어 나는 그것들과 대화를 나눈다. ‘너무 부려 먹어서 미안해’라고. 그리고 정원의 꽃과 대화를 한다. ‘너는 예뻐서 좋겠다. 그러나 잊지 마. 화무십일홍!’ 또 어느 날은 빨래걸이와도 대화한다. ‘너는 매일 남의 옷만 걸치고 있구나’ 그렇게라도 하지 않으면 종일토록 입도 뻥끗하지 못하는 날이 부지기수다. 곰탕을 끓이는 동안 음악을 듣기 위해 핸드폰에 저장해 놓은 플레이리스트 중 비제의 <진주조개잡이> 중 ‘귀에 익은 그대의 음성’을 터치했다. 그다음 이어질 곡은 모차르트의 <피가로의 결혼> 중 ‘저녁 산들바람은 부드럽게’ 이다. 그리고 그다음은 <하울의 움직이는 성>의 OST ‘인생의 회전목마’이다.

10월에 태어나 ‘가을’이 되어버린 큰딸은 일관성 없는 선곡이라고 놀리지만 원래 그렇다. 나라는 사람이 일관성이 없다. 글도 그렇고, 사랑도 그렇고, 인생도 그렇고. 지금의 나는 그저 시류에 따라서 살아온 비겁한 인생이라고 할 수 있겠다.

두 개의 틀니로 남은 아쉬움 혹은 그리움

아버지가 결국 돌아가셨다.

코로나 시국이라 면회도 되지 않아서 아버지는 중환자실에서 홀로 사투를 벌이셨다. 온갖 의료기기를 몸에 부착한 아버지는 누구도 만날 수가 없었다. 너무나 급작스러웠다. 당뇨인데 약을 일주일째 안 드셨다는 것이 믿을 수가 없었다. 엄마 말로는 며칠째 자는 듯 누워만 계셨다고 한다. 그러나 인생의 암시는 있었다. 미처 깨닫지 못했을 뿐이지.

며느리, 사위, 외손주를 제외한 직계만 된다고 해서 비닐로 중무장을 하고 들어가서 겨우 눈만 마주쳤다. 버티시라고 했을 때 아버지는 입을 꼭 다물고 각오한 눈빛으로 나를 보셨다. 처음이었다. 아버지와 얼굴을 마주하고 눈 맞춤을 한 것은. 왜 진작 눈 맞춤을 하지 않았을까? 아버지와 나 사이에는 미묘한 거리가 있었다. 그것은 아마도 아버지가 모두 포기한 후 칩거하기로 작정했을 때부터였지 않았나 싶다.

춥고 썰렁하고 정신없는 응급실이 아니어서 그나마 다행이었다. 그리고 겨울이 아니라 아카시아가 만발한 4월과 5월 사이여서. 아버지는 늘 이 세상을 떠나게 된다면 오월이면 좋겠다고 하셨다.

겨울에 태어난 아버지가 눈처럼 왔다가 봄날 꽃과 함께 가버릴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눈물이 났다. 나는 비닐장갑을 낀 손으로 아버지의 손을 조심스럽게 만지며 귓가에 속삭였다.

‘미안해 아버지’

아버지는 아마도 꿈에도 몰랐을 것이다. 내가 태어나던 날, 첫 눈 맞춤을 하며 딸이 자라서 본인의 ‘연명치료 중단’ 서류에 서명하게 될 거라는 것은.

입원 직후 의사가 현재로서는 달리 방법이 없다고 했다. 모든 장기에 문제가 생겼기에 겨우 연장만 할 뿐 의미가 없다는 의사의 말에 처음으로 아버지를 제외한 가족회의를 했다. 병원 근처 스타벅스에서 태평하게 커피를 마시며 연명치료를 중단할 것인지 아니면 계속 갈 것인지 의논했다. 냉커피 잔에 남은 얼음이 거의 물이 되어갈 즈음 결론을 냈다. 일단 일주일은 버티어보고 만약 고비를 넘기시면 요양원으로 모시는 것이 났겠다고 동생이 말했고, 나는 치매 어머니를 얼마 전에 요양원에 보낸 후배로부터 정보를 카톡으로 받았다. 서울 근교에 있다는 시설은 대기업이 운영하는 것이라 믿을만하다고 후배가 강조했다.

그러나 아버지는 중환자실에서 나오지 못했다. 상황은 점점 안 좋아졌다. 결국 선택이라는 것을 했고, 직계가족 중 2명의 사인이 필요하다고 해서 동생과 내가 사인했다. 그런 후라서였을까? 울컥하며 눈물이 핑 돌았다. 다행스럽게 기계장치를 제거했음에도 아버지는 자가호흡을 하고 상태도 좋아져 중환자실에서 회복실로 옮겼다. 동생과 나만 말을 할 수는 없으나 의식이 있던 아버지를 엘리베이터 앞에서 잠깐 봤다. 동생이 아버지의 손을 잡자 꽉 움켜잡으셨다. 그게 불과 이틀 전이었다.

자가호흡도 가능해서 중환자실에서 다른 병실로 이동한 후 요양원도 갈 수 있을 거라는 의사의 말도 있고 해서 일말의 희망을 품었다. 동생들과 요양원을 정하고 그 비용은 어떻게 나눌 것인가를 의논하려고 했던 것은 일요일 아침 한 통의 전화로 부질없어졌다.

발신자가 표지되지 않은 전화번호가 떴다. 평소 같으면 무시했을 전화였지만 예감이 이상했다. 가슴이 빠르게 뛰었다.

“......지금 오셔야 할 것 같습니다. 임종하실 것 같습니다.”

나는 떨리는 손으로 동생들에게 전화한 후 남편과 함께 병원으로 향했다. 잠실에서 분당까지 달리는 동안 나는 차창을 스치는 풍경을 물끄러미 바라봤다. 분당 고속도로를 타고 가는 동안 주변의 숲에는 아카시아가 만발했다. 창문을 열자마자 아카시아의 달콤한 꽃향기가 바람을 타고 들어왔다. 아버지가 좋아한 향이다. 음주·가무를 좋아하신 분답게 꽃피는 계절에 세상을 떠날 준비를 하시는 건가?

다시 발신자 표기가 없는 전화번호가 다시 떴다. 거의 분당에 도착하기 직전이었다. 남편이 긴장하는 눈빛으로 나를 봤다. 나 역시 전화가 무엇을 의미하는지 예감했다.

‘임종하셨습니다’

너무나 담담한 목소리를 듣는 순간 입술을 깨물었다. 시속 100Km로 달려왔는데 결국 아버지의 임종을 지키지 못했다.

‘메멘토 모리’였든가? 하루 사이에 현실적인 의미를 입관식을 하면서 알게 되었다. 죽음을 기억하라. 매 순간 죽음과 닿아 있으며 그것을 피할 수 있는 것은 대단한 행운이 나의 주변에 있기 때문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죽음과 삶이 위성처럼 교차하며 내 주변을 돌고 있다. 내가 그 둘 중 무엇과 충돌할지는 누구도 알 수가 없다.

슬픔보다는 두려움이 앞서는 마음으로 들어선 입관식의 방은 차가움 그 자체였다. 차마 죽음을 대면할 수 없어서 눈을 감과 들어선 그 방에서 나는 완벽한 헤어짐의 정리를 경험했다.

기억을 봉인해버리듯 장례지도사 두 명에 의해 나와 아버지의 이승에서 만난 인연들이 꽁꽁 묶어지는 과정을 통해 봉해지는 과정을 거쳤다.

다문 아버지의 입으로 쌀알이 들어가는 순간 나의 흐느낌은 멈췄고, 이별을 실감했다. 그리고 누구도 개입할 수 없는 엄숙하고 차가운 죽음의 실체를 실감했다.

장례지도사가 건네는 흰 국화꽃 송이를 죽음에서 벗어날 수 없게 꽁꽁 묶인 아버지의 두 발 사이에 꽂았다. 부디 두 발로 걸어가는 세상이 꽃길로 시작되기를 간절히 눈물로 기원하며.

나의 그런 슬픈 바람이 실현되기를 바라는 마음과 달리 현실 속의 아버지 죽음은 모든 입관 절차를 끝낸 후 거대하지만 딱 아버지가 누운 관 크기만 한 냉동칸에 들어갔다. 아버지는 자신의 이름이 적힌 냉동칸에서 지상에의 마지막 밤을 보내는 것이다.

아버지는 화장 시간은 6시였다. 시간이 그 시간밖에 없었다. 코로나로 인해 죽음을 맞는 사람들이 급증한 탓이었다. 소멸을 위한 시간도 마음대로 정할 수가 없다니 어이가 없다. 시간에 맞춰서 태워지는 것이다. 지구에 인구가 많은 탓인지 아니면 코로나 시국이라 그런 것인지는 모르지만 인생에서 마음대로 할 수 있는 것이 하나도 없다는 것을 실감했다.

아버지가 알 수 없고 예측도 할 수 없는 곳으로 가기 전에 지상에의 삶을 태워버릴 곳은 ‘영생원’이다. 그것은 분당과 광주 사이에 있는 깊은 숲속에 있다. 초록의 터널을 지나 언덕을 오르자 영생원이 나왔다. 이른 아침의 숲은 서늘했다. 그리고 새벽에 내린 비 탓에 유난히 선명한 초록빛이었다. 깊은 어둠을 품은 그날의 초록을 잊을 수 없다.

아버지는 푸른 녹이 낀 오래된 틀니 두 개를 남기고 세상을 떠났다. 나는 그것을 보며 눈물을 삼켰다. 오월이었고 분당의 재생병원 근처 스타벅스의 창으로 보이는 세상은 온통 빛으로 가득했다. 그 빛은 대책 없이 나의 눈 속에서 눈물과 함께 출렁였다.

내가 기억하는 아버지의 마지막 색은 초록이고, 향기는 비에 절인 아카시아 향이었다. 문득 아버지가 사준 투피스가 생각났다. 아버지가 초등학교 입학식을 앞두고 사준 옷도 연둣빛이 감도는 초록 체크무늬의 투피스였다. 아버지는 초록을 좋아했다. 그래서 돌아가신 순간에도 세상이 온통 초록빛이어서 참 다행이다 싶었다.

내가 죽을 때 마지막으로 보게 될 색은 무슨 색일까? 감히 바란다면 오렌지빛 노을이었으면 좋겠다. 거기에 핑크빛이 한 방울 추가된다면 바랄 것이 없다.

아버지가 떠난 5월은 꽃과 함께 시간 속으로 바람처럼 사라졌다.

나는 매일 아침 눈을 뜨면 아버지가 좋아했던 맥심 커피를 한잔 타서 정원이 잘 보이는 창가에 놓아둔다. 혼이 있다면 흠향이라도 하시라고. 한동안 지하철을 기다리다가도 아버지 연배쯤 되어 보이는 노인을 보면 눈물이 핑 돌았다. 그리움이라기보다는 미안함에 가까운 감정이었다. 그러나 그런 감정도 시간이 지나면서 서서히 흐려졌다. 이런 것을 시간의 무정함이라고 해야 하나? 아니면 내가 아버지를 생각하는 마음이 딱 그만큼이었나? 어느 지점에서부터 아버지를 떠나보낼 때 느꼈던 슬픔과 회한의 농도가 흐려졌다. 일상으로의 복귀가 너무 빨라 양심의 가책이 느껴질 정도였다.

엄마는 아버지를 떠나보낸 후 어떤 감정이었을까? 마지막까지 아버지의 입관식을 보지 않은 엄마를 이해할 수 없어서 한동안 연락하지 않았다. 어쩌면 엄마도 나름의 정리가 필요하다고 생각했다. 동생의 말에 의하면 엄마는 아버지가 주무시던 방에는 들어가지도 않는다고 한다. 왜 방을 놔두고 거실에서 TV를 켜놓고 주무시냐고 동생은 짜증을 냈다.

“아버지 유령이 머물고 있을 것 같아서 그런가?”

나는 무심하게 말했다.

“언니야, 니는 무슨 그런 말을 하냐?”

“엄마 그거 오버야. 누구보다도 이 세상을 떠나서 속이 후련하실 분이 아버진데, 뭐 사랑과 영혼이라고 엄마 곁에 머물고 그러냐? 걱정 내려놓으시라고 해.”

“작가 맞아? 낭만이 씨가 말라버렸네?”

동생이 어이없다는 듯 수화기 너머에서 툴툴거린다.

맞다. 나의 낭만은 시리얼처럼 거칠고 바싹 말라버렸다. 푸른 수국 같던 나의 연애적 감수성은 종말을 고한지 이미 오래고 남편과 나는 세 딸을 둔 전우애 충만한 일상을 보낸다.

“나 참, 엄마 멘탈 나가게 하고 한 결혼의 열정은 대체 어디에 팔아먹은 거냐?”

“자체 소멸이지.”

“그럼, 접었던 천마리 학은 대체 어디로 날아간 것임?”

“그건 다른 사람인데. 네 형부가 아니라.”
“으하하, 그랬어? 중간에 또 누가 있었나? 언니야, 그 사실을 형부도 아냐?”

그는 모른다. 천마리의 학은 그의 것이 아니었다는 것을. 단지 나는 가지고 있던 천 마리의 학을 다시 포장해서 그에게 주었을 뿐이다. 주인공은 따로 있다. 동생은 누구냐고 나에게 집요하게 물었지만 나는 끝내 대답하지 않고 전화를 끊었다.

싱크대 앞에 서서 마시는 달달한 커피가 빈속으로 내려가는 느낌은 무엇이라고 표현할 수 없을 만큼 좋다. 나는 조용히 한숨을 쉬며 코로 올라오는 커피의 향을 즐겼다. 살아서 커피 향을 느낄 수 있는 이 순간에 감사해야 하나?

밤새 기절해 있던 뇌세포가 환호성을 치며 깨어나는 느낌이라고나 할까? 위벽 사이에 지방이 끼든 말든 나는 이 사악하고 농밀한 맛을 포기할 수 없다. 남편은 건강을 생각해서 아메리카노를 마셔도 크림 층을 걸러낸 후 마신다. 반면 나는 그 크림 층 때문에 아메리카노를 마신다. 그것이 아니라면 커피를 마실 이유가 없다.

남편은 아침부터 산으로 갔다. 코로나로 인해 전 국민의 입을 틀어막았던 마스크를 드디어 벗게 되자 그는 산으로 달려갔다. 그는 이 순간도 그 날렵한 몸으로 산속을 뛰어다닐 것이다.

월요일 아침, 인생은 도무지 아름답지 않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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