Merry-go-round
영화 속에서 목이 메도록 슬프고 아름다운 시절이 지난 후 양조위는 앙코르와트 사원의 한쪽 구석에 서서 기둥의 파인 홈에 무언가를 속삭인 후 풀과 흙으로 봉인을 한 후 떠났다. 그 시절 그가 봉인한 것은 놓아버린 사랑일까 아니면 다시 시작되기를 간절히 바라는 희망이었을까? 살면서 문득문득 그것이 무엇이었는지 궁금해질 때가 있다.
사랑하기에 꽃처럼 아름답고 빛처럼 화사한 나날들이 누구에게나 있다. 나에게도 그런 날이 있었다. 아마 내가 글을 쓰게 된 것도 그와의 아름다운 나날들이 기억 속에 생생하게 남아 있었기 때문일지도 모른다. 교복을 입던 중학교와 사복을 입던 고등학교, 그리고 대학까지 함께한 시간이 아쉽게도 그런 날이었음을 나는 너무 늦게 깨달았다. 그래서 인생은 늘 ‘글쎄요’이다.
카페 <라일락>의 문을 열고 들어섰다. 제일 먼저 하얀 벽면에 걸린 영화 <태양은 가득히>의 포스터가 눈에 들어왔다. 칸느영화제에서 여배우 전도연에게 트로피를 건네던 그의 모습과 주인공 리플리로 분한 스물다섯 살의 알랑들롱의 모습이 순간 겹쳐진다. 조타석에 서 있는 그의 뒤로는 지중해의 푸른 바다가 펼쳐 있다.
그가 카페 바닥에 울리는 하이힐 소리를 듣고 고개를 돌리더니 나를 바라보며 씩 웃는다. 그러나 어쩐 일인지 그의 웃음이 평소와 달리 슬퍼 보인다.
"왜, 무리하고 그래?"
내 마음을 울리는 그의 목소리가 카페 안 흰 벽에 부딪히며 돌아와 가슴에 접어둔 추억을 들춘다.
"어휴, 그러게나 말이야. 이놈의 지상에서 12센티는 왜 포기가 안 될까?"
나는 의자에 앉자마자 하이힐을 벗어버렸다. 그런 나를 보며 그가 소년처럼 큭큭 거리며 웃는다. 여전하다는 눈빛이다. 나는 그런 그의 눈빛에 익숙하다. 말없이 변하지 않는 눈빛으로 지켜봐 주는 그가 있어서 참 다행이다. 만약 그가 없었다면 길지 않은 내 인생에서 몇 번은 사고 쳤을 게 분명하니까.
나는 그 앞에 서면 완전 무장해제 된 ‘맹추’의 자세로 돌아간다. 기억 속의 그는 항상 오빠이며 아빠이며 매니저였다. 당황해서 뒤돌아보면 항상 그가 서 있었다.
"같은 걸로 했다, 괜찮지?"
그가 어제도 보고 그제도 보고 늘 봐온 사람처럼 내게 아무렇지도 않게 말한다. 그와 나는 중학교, 고등학교, 그리고 대학까지 함께 한, 그야말로 전생의 인연이 아니었다면 거의 불가능한 세월을 공유했다. 심지어 엄마들끼리 만든 그룹과외까지 같이 했다.
"좋아"
나는 모처럼 신고 온 하이힐 탓이 아픈 발가락을 주무르며 말했다.
"수술도 했는데 기능성 신발을 받아들이는 게 그렇게 어렵냐?"
그는 내게 무릎에서 소리가 난다는 말을 들은 이후로 계속 할머니들이 신을 법한 베이지색의 기능성 신발을 추천했다. 하지만 운동화 신는 것도 거부하는 내가 디자인과 담을 싼 것 같은 그 기능성 신발을 받아들이는 것은 자존심이 허락하지 않는다.
"어. 죽을 때까지 나는 힐을 신을 거야. 관속에 들어갈 때까지도."
"누구한테 잘 보이려고?"
그가 웃으며 묻는다.
"누구에게 잘 보이려는 게 아니라 거울 속의 나를 위해서지."
"집사람은 늘 단화를 신었는데."
그의 목소리가 가늘게 흔들린다. 늘 환하게 웃으며 발레리나처럼 사뿐사뿐 걸어 다니는 그녀의 모습이 잠깐 스쳤다 사라진다. 그녀의 우아한 동작과 몸의 선을 늘 부러워했다.
"은주 씨는 키가 크고 다리가 길잖아. 그런 이들이 힐을 고집하는 건 키 작은 사람들에 대한 배려심이 부족한 거야."
그의 아내는 고급여성복 '막스마라'가 잘 어울리는 단아한 스타일에 키도 여자치고는 큰 168 센티미터이니 힐을 신을 이유가 없다. 외모로 따지자면 나는 그녀의 비교 대상이 아닌 셈이다.
"은주 씨는 잘 지내?"
그의 아내가 3년 전에 유방암 수술을 했기에 나는 안부를 물을 때마다 늘 긴장한다.
"그냥 그렇지. 생일이라서 크루즈여행을 두 달 전에 예약했는데. 싫다네. 정원 가꾸고, 성당 다니는 게 행복하다고."
그가 쓸쓸하게 웃는다. 순간 그의 아내가 부러워졌다. 어쩌면 그 크루즈여행의 주인공이 내가 될 수도 있었는데 가공할만한 청춘의 위력과 낯선 로맨틱에 무조건적 쏠림 현상으로 인해 날려버렸다는 생각이 들자 웃음이 나온다. 친정엄마의 말처럼 나는 부러워할 일말의 자격도 없으니까.
나는 그가 좋은 남편이 될 거라는 건 처음부터 알고 있었다. 그런데도 그를 선택하지 않았다. 엄마는 내게 천추의 한이라고 늘 말했다. 살갑지 않은 사위보다는 중 고등학교 때부터 친구였던 그가 엄마에겐 늘 사윗감 후보 1위였다.
"좋겠다, 은주 씨는. 나라면 그 크루즈 얼씨구나 하고 갈 텐데."
"부러워할 걸 부러워해. 병원 갈 일 없는 사람이 좋은 거야."
아무리 그가 그렇게 말해도 나는 친구의 아내가 부럽다. 암이기는 하지만 수술은 잘됐고 적어도 이년 후에는 완치판정을 받을 수 있을 터이니 말이다.
“나 같은 사람이 어느 날 한 방에 훅 갈 수 있어.”
“너, 에너지 방전되려면 한참 멀었어.”
그가 미리 주문한 에스프레소 두 잔이 나왔다. 그가 가방에서 작은 다크 초콜릿을 상자를 꺼낸다. 에스프레소를 먹을 때는 늘 은박지로 싼 물방울 허쉬 다크 초콜릿을 먹는 습관이 있는 걸 알고 만날 때마다 늘 챙긴다.
나는 그가 건넨 허쉬 초콜릿을 입에 넣고 짙은 초콜릿 향을 음미했다. 딱 초콜릿이 입에서 녹아 사라지는 동안만큼 행복했다.
“은주 씨는 전생에 나라를 구했어. 너 같은 남편을 만났으니.”
나는 입안에서 감도는 에스프레소와 다크초콜릿의 환상적인 조합에 감탄하며 말했다.
“그런 너는 나라를 말아먹어서 나랑 결혼 못 한 거냐?”
“그게 또 그렇게 되나? 내가 나라를 말아먹은 거는 확실한 것 같아. 요즘 보면 그래. 아주 제대로 실감하는 중이야.”
그가 말없이 웃는다. 그의 웃음은 아주 오래된 울스웨터를 입은 것처럼 나를 푸근하게 한다.
나는 에스프레소 한잔을 마신 후 다시 ‘끙’ 하고 한숨을 내쉬었다. 인생을 한 편의 소설을 읽듯 압축해서 경험할 수 없다는 사실이 슬프다.
역시 길게 보면 '테리우스' 스타일의 남자보다는 역시 '알버트 아저씨' 나 '안소니' 같은 스타일이 인생 편하게 사는 지름길이다. 시간이 지나면 터프하고 멋지던 나쁜 남자의 모델인 ' 테리우스 스타일'도 텔레비전 끼고 사는 아저씨로 변할 수 있다는 걸 알았다면 남편과 결혼했을까?
왜, 지름길 놔두고 산길을 헤매기로 작심을 했는지. 가능하다면 그를 만나러 가기 2시간 전쯤에서 스톱시키고 싶다. 친구가 영화 보러 가자는 말을 무시하고 남들 다 하는 미팅 좀 해보겠다고 철없이 따라나섰던, 중간고사가 끝난 오월의 늦은 오후쯤에서 스톱워치를 누르고 싶다.
"생일 축하한다."
작년과 똑같은 멘트지만, 여전히 뭉클하다. 그와 내 인생의 많은 부분을, 푸르고, 밝았던 시절을 공유하고, 같은 기억을 간직하고 있어서일까?
"땡큐."
"이거"
그가 작은 선물 포장을 내밀었다.
"뭔데?"
"풀어 봐. 출장 갔다 오다가 샀어."
나는 생일이면 해마다 그가 주는 작은 선물들을 다 보관하고 있다. 처음 줬던 아카시아를 말려서 만든 책갈피와 작년에 그가 사준 몽블랑 만년필까지.
나는 아침의 인스턴트 미역국 소동은 잊고 즐거운 한숨을 쉬며 포장지를 조심스럽게 뜯었다. 작은 라이터와 담배를 넣을 수 있는 비단으로 만든 작은 주머니였다. 싱가포르 출장길에 중국인 거리의 상점에 들렀다가 첫눈에 내 것인 것 같아서 구매했다며 웃었다.
"금연을 권하는 시대에 바람직하지는 않지만 너니까, 필요할 것 같아서."
"사약을 내려도 고맙지…."
나는 그를 보며 바보처럼 웃었다. 역시 나는 그의 도움과 배려가 필요한 영원한 ‘맹추’이다.
"몇 년이지?"
그가 담담한 얼굴로 묻는다.
"우리? 아, 그러니까…."
우리는 중학교 2학년 흑석동 족집게 선생 그룹과외에서 만났다. 남편보다 더 오랫동안 알아 온 셈이다. 그래선지 그와 나 사이엔 드문드문 만나도 어제 본 것 같은 편안함이 있다. 애초부터 나는 반장 그는 부반장으로 설정된 인연이었다. 그런 관계는 지금도 이어지고 있다.
대학 1학년 때였다. Nada의 <Il cuore e uno jingaro> 가 교정 스피커에서 흘러나오고 있었다. 해는 강의동 사이로 막 지려하고 있었고, 나는 처음 들어 보는 노래에 넋이 나가서 스피커가 설치된 나무 밑 벤치에 하염없이 앉아 있었다. 해는 후르츠 칵테일 빛으로 하늘을 물들이고 있었다. 내 머리 위에서는 보랏빛 라일락이 흔들리고 있었다. 그야말로 낭만 시대였다.
하얀 코코넛, 선명한 체리, 오렌지, 망고와 파파야 빛으로 물들어 가는 하늘을 바라보며 천천히 입맛을 다셨다. 그때 나는 좀 외로운 척하는 아이였다. 사랑을 꿈꾸지만, 사랑을 어떻게 시작해야 하는지도 모르는 여자아이였고, 센척하지만 누가 먼저 말을 걸어와 주길 바라던 소심하고 수줍은 아이였다. 물론 지금의 나를 보면 상상할 수조차 없는 일이지만 말이다. 그런 내가 미팅 한 번에 훌러덩 넘어가서 결혼하게 될 줄 그때는 몰랐다. 첫눈에 반한다는 말을 전설처럼 너무 믿은 부작용이라고나 할까. 그렇다고 해서 내가 남편을 사랑하지 않았다는 말은 아니다. 누구보다 사랑했고, 하루도 안 보면 그의 얼굴이 시계추처럼 왔다 갔다 할 정도였다. 하지만 지금에 와서 내가 느끼는 건 사랑한다고 해서 그렇게 꼭 미친 듯이 결혼할 필요는 없다는 것이다. 왜냐하면 사랑은 일생에 한 번 오는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코스모스가 가을바람에 흔들리면 덩달아 흔들리고, 오월 밤공기에 실려 오는 아카시아 향 때문에 기절할 것 같다고 했던 소녀는 이제 꿈같은 건 꾸지도 않는 '나이 든 여자'가 되어버렸다.
나이가 들면 소녀는 죽는 줄 알았는데, 그때의 소녀는 여전히 내 가슴속에 남아 지금의 내 나이와 종종 정면으로 충돌한다.
"아마도 30년 됐지?"
그가 감개무량한 듯이 말한다.
"너무 오래돼서 잘 기억도 나질 않네."
“나는 그 시간이 정말 즐거웠다.”
그가 담담한 눈빛으로 말했다.
살아봐야 안다는 말처럼 그와 나는 우정을 나누면서, 서로의 삶에 직접적으로는 관여하지는 않았지만, 그보다 못지않은 관심과 염려로 서로의 인생에 영향을 주어 왔다. 그와 나의 어떤 점이 그런 축복받은 시간을 나눌 수 있게 해 주었던 걸까? 그는 종종 그걸 전생에서부터 이어진 인연이라고 말한다.
그의 말인즉슨 전생에 나는 그의 애지중지하던 막내딸이 분명하단다.
“다시는 올 수 없는 시간이지.”
“노을이 지는 걸 보고 후루츠 칵테일 같다고 말하는 사람을 그전에도 그 이후에도 결코 본 적이 없었어. 더구나 위아래로 초록색 옷을 입고 파란 구두를 신은 청개구리 복장으로 나타났을 때는 모른 척하고 싶더라."
그가 기억하는 파란 구두는 아버지가 대학 들어갔다고 서초동에서 광화문까지 나가서 <에스콰이아>에서 사준 것이었다. 터키 블루에 가까운 파란색이었는데 발등을 가리는 좀 보이시한 구두였던 걸로 기억한다. 물론 그 블루가 분홍색 펌프스로 바뀌는 데 그리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았다. 정확히 3개월 후 남편과의 연애를 시작하면서 일본 패션잡지 NONNO와 앙앙 속의 소녀 취향의 구두로 바뀌었으니까.
"기억은 늙지 않나 보다. 그지?"
"어떤 기억은 소멸하기도 하지. 하지만, 어떤 기억은 정지된 채 시간의 커튼 뒤에 숨어 있지. 절대 늙지도, 소멸하지도 않은 채로. 기억해 주기만을 기다리면서 말이야."
공부하기는 싫어하고 강의 빠지기 일쑤고, 도서관에서 책만 읽고 지내는 나를 찾아내 수업에 끌고 들어가고, 리포트 준비시키고, 심지어는 시험 기간엔 붙잡고 공부까지 시키던 그였다. 내가 그를 위해 한 일이라고는 철학 같은 교양 과목 리포트 대신 작성해 주는 것이었다.
이른 결혼을 허락하는 대신 대학은 졸업해야 한다는 엄마의 강력한 주장에 휴학 없이 학교에 다니게 됐고 그 덕분에 무사히 졸업할 수 있었다. 심지어 학교가 같았던 그와 나는 군대 간 기간을 제외하고 내내 도서관에서 늘 함께 앉아서 공부했기에 모두 우리가 연인인 줄 알았다.
<화양연화> 이후 오랜만에 그와 함께 영화를 봤다. 그가 고른 영화는 <건축학 개론>이었다. 나이 탓인가. 영화를 보는 내내 김동율의 ‘기억의 습작’이 가슴에 와닿았다. 영화가 끝난 후 한참 동안 그는 자리에 앉아 있었다. 나이가 들어서 방광 기능이 약해졌는지 영화 앤딩씬이 나오자마자 화장실로 달려가고 싶은 마음이 굴뚝같았지만 그렇게 하면 낭만이 바닥을 친 아줌마처럼 보일까 봐 혼신의 힘을 다해 참으며 그의 옆자리를 지키고 앉아 있었다. 아무리 낭만이 가을볕에 말린 고추처럼 쪼그라든 나이라지만 그 앞에서는 적어도 한 스푼의 낭만은 남겨두고 싶었다.
“배고프다. 햄버거 먹으러 가자.”
결국은 참다못해 내가 먼저 말했다.
“어. 그래 가자.”
그가 아쉬운 기억을 거둬 내는 중인지 화면을 응시한 채 어둠 속에서 천천히 일어섰다.
영화관에서 나오자마자 화장실로 달렸다. 다급했던 생리적인 문제가 해결되니 패스트푸드점 앞에서 기다리고 있는 그, 윤재의 모습이 그제야 선명히 들어온다. 그의 얼굴이 전과 달리 어둡다. 무슨 일이 있는 걸까?
나이 든 티를 내는 것이 싫어서 사실은 짜장면과 짬뽕이 먹고 싶었지만 패스트푸드점에서 햄버거와 콜라를 주문해 먹고 있는데 옆 자리에 앉은 젊은 애들이 자꾸만 쳐다본다. 중년부부는 인 줄 알았는데 저희들처럼 대화하는 것이 이상한 눈치다.
"애들이 우릴 이상하게 보는데."
나는 옆의 아이들 보란 듯 콜라를 단숨에 들이키며 말했다. 하지만 역시 무리다. 차가운 콜라의 냉기 역류를 했는지 머리가 순간 빠지직한다. 게다가 얼마 전에 치료받은 어금니가 우적거리며 씹은 얼음 탓에 시큰하다. 정말 사라지는 젊음의 끝을 보여준다. 누군가 그랬다. 젊은이들과 경쟁하지 말라고.
나는 젊음이 여름의 빛처럼 강렬하게 빛나는 옆자리의 젊은 아이들을 보며 조용히 빨대로 콜라를 마셨다.
"보라지 뭐. 젊은 애들이 너무 이분법적인 시각으로 세상을 보네."
그가 웃으며 말한다. 건너편 옆자리의 젊은 애들을 바라보는 그의 눈에 부러움이 가득하다.
"부러워?"
"젊음이 부러운 게 아니고, 저 애들이 가진 아무 걱정 없어 보이는 시간이 부럽네.
그가 웃음 섞인 한숨을 푹 내쉰다. 역시 그는 나와 절대적으로 통하는 구석이 있다.
"웬 시간 타령이야?"
"오십을 목전에 두니까 숨이 턱 막힌다."
"그건 아닌데…. 무슨 일 있지?"
그가 말없이 콜라만 마신다. 다시 보니 햄버거도 반쯤 남았다. 어지간한 음식은 지구를 위해 다 몸에 버린다는 친환경 주의자(?)인 그 답지 않은 행동이다. 그에게 무슨 일이 일어난 게 분명하다.
"어디 아파?"
나는 농담처럼 직구를 날리면서도 불안한 마음을 지울 수가 없었다.
"어."
순간 주변이 음소거가 된 것처럼 조용해진다. 씹던 프렌치프라이를 뱉고 급하게 콜라를 들이켰다.
‘뭐지 이 불길한 느낌은?’ 머릿속이 서늘해진다. 이런 대답을 기대한 건 아니었는데. 농담이었는데 진실이 되어버린 순간 머리를 한 대 맞은 것 같은 충격이 파도처럼 덮친다. 너무 놀라서 나도 모르게 그 앞에서 평소 같으면 하지 않았을 트림을 해버렸다. 코가 찡한 건지 내 맘이 찡한 건지 종잡을 수가 없다.
"..........."
할 말이 없다. 나는 또다시 콜라만 벌컥벌컥 마시며 그의 눈치를 봤다.
"아내가 아파. 다음 주에 입원할 거야. 유방암이 재발했어."
“어?”
나는 바보처럼 얼이 빠져서 물었다. 오 년 후 완치판정을 받으면 부부가 여행을 가겠다고 했는데, 재발했다는 말을 듣는 순간 망치로 한 대 맞은 것 같아서 정신을 차릴 수가 없었다.
항암치료와 방사선 치료까지 잘 마치고 건강하게 잘 지낸다는 소리를 전해 들은 지 얼마 되지도 않았기에 충격이 컸다.
“뭐, 요즘은 워낙 의술이 좋으니까…. 너무 걱정은 하지 말고.”
그렇게밖에는 달리해줄 말이 없어서 한숨만 나왔다.
갑자기 뚜껑을 열어놓은 콜라 컵 위로 그의 눈물이 떨어진다.
남자의 눈물이 슬로우 모션으로 내 눈앞에서 콜라 컵 안으로 떨어지는 것을 보고 있자니 갑자기 또 할 말이 없어진다. 남편도 만약 내가 병에 걸리면 그처럼 눈물을 흘려줄까? 단언컨대 그는 울지 않을 것이다.
이사승진을 하고 교외에 그림처럼 아름다운 집을 짓고 아이들과 오랫동안 살 거라며 멋진 정원에서 가든파티를 한 게 작년 오월인데. 아이보리색 원피스를 입은 은주 씨가 햇살 아래서 펀치를 만들고 있는 모습이 떠올랐다. 그렇게 사고 싶었던 대형 유리 펀치볼을 샀다면서 체리 주스를 따르고 그녀의 행복을 닮은 색색의 후르츠 칵테일을 부으며 활짝 웃었다. 그날 나는 그녀에게 피츠제럴드의 단편집을 선물했다.
그녀가 만든 체리 펀치볼은 너무나 맛있었다. 햇살 아래서 선명한 체리 핑크색 음료를 마시며 참석했던 사람들은 두 부부의 성공을 축하해 주었다. 위기는 있었지만 잘 극복하고 누구나 한 번쯤은 살고 싶어 하는 집을 마련한 부부에게 더 이상의 위기는 없는 것처럼 보였다.
그런데 재발했단다. 갑자기 인생이 안을 절대 들여다볼 수 없는 쿠키 상자에서 달콤한 과자만 꺼내 먹다가 어느 순간 동이 나버린 줄도 모르고 웃고 있는 것과 다를 바가 없는 생각이 들었다. 시간이 나의 것이 아니라는 생각도 들었다.
주워 담을 수 없는 시간이 얼마나 허망하게 느껴진다. 특히 행복한 시간은 쉽게 녹아버리는 솜사탕과 같다. 영원히 살 것 같고 인생, 운명이 다 내 편 같은 착각에 빠질 즈음에 어김없이 빈틈을 파고드는 운명이라는 놈은 참 밉살스럽다. 거기에서 나 역시 예외일 수는 없다는 생각이 들자 등줄기로 한기가 흘렀다.
"......... 은주 씨는 알아?"
"아직은…."
"....... 착하게 살아도 소용없네. 얼마의 시간이 남은 거래?"
그가 말없이 고개를 젓는다. 더는 할 말이 없다. 그저 담배가 피우고 싶다. 하지만 흡연자의 권리는 건강이라는 모든 이의 공공의 목표 때문에 역시나 이곳에서도 행사할 수가 없다. 콜라만 마시고 있는 그에게 밖으로 나가자고 했다. 그가 말없이 일어서서 따라 나온다.
테라스 쪽엔 그나마 연인처럼 보이는 몇몇 커플들뿐이어서 의자에 앉자마자 담배를 피워 물었다. 살 것 같다. 건너편 커플이 나이 든 아줌마가 담배를 피우는 게 거슬리는지 흘끔거린다. 역시 흡연자는 그 어느 곳에서도 환영받지 못한다. 마를린느 디트리히나 그레타 가르보가 담배를 꼬나물면 좀 달라지려나? 아무래도 비주얼의 문제인 것 같은 느낌을 지울 수가 없다.
살아온 전력을 본다면 건강검진 제대로 받지 않고, 담배 피우며 살아온 내게 문제가 먼저 생겨야 하는데 바른생활하고, 커피는 마시지도 않고 다도를 즐기던 그의 아내에게 먼저 문제가 생겼는지 아이러니다. 예측할 수 없는 시간을 앞에 둔 그가 측은했다.
“최악엔 회사를 그만두고 제주도로 내려갈 생각이야. 어차피 해외발령을 받기로 되어 있는데 아내를 데리고 나갈 수도 없고. 사실 아내와 유럽에 가고 싶었어. 그 사람이 그러더라고 알랭 들롱이 나왔던 영화 <태양은 가득히> 속의 바다를 보고 싶다고 늘 말했거든. 그래서 더 이상의 승진은 포기하고 해외 근무로 직장생활을 마감할 생각이었는데. ”
벽에 걸린 영화 <태양은 가득히>의 포스터를 보는 그의 얼굴이 착잡하다. 재발이라는 소리 앞에서 나도 맥이 빠지는데 그는 오죽할까. 말 그대로 잘 나가는 전자 회사의 잘 나가는 임원인 그가 남들은 그 자리를 지키기 위해 가족까지 희생하고 달려가는데 아내의 결과에 따라서 회사에 사표를 내겠다고 한다. 그런 그가 안쓰러워서 눈물이 핑 돌고 목이 따가워진다.
“치료비랑 아들 교육비는? 미국에 송금하는 것도 만만치는 않잖아?”
넉넉하지 않은 그의 본가를 챙기느라 별로 모아둔 돈도 없다는 그의 아내 말이 생각나서 물었다. 목돈이 있었다 해도 작년에 집 짓는 데 다 썼을 게 분명하다.
“ 아들은 귀국시키고…. 나머진 어떻게든 되겠지.”
“미안해. 참, 명색이 글 쓴다는 여자가 돈 걱정부터 해서. 이래서 내가 베스트셀러작가가 못되나? 이젠 나도 감수성이 꽝인가 보다. 예전에 참 낭만에 죽었는데.”
"아니 내가 미안하지. 생일날 그런 소리 하고 싶지 않았는데. 달리 말할 데가 없데. 너 밖엔."
그가 입술을 지그시 깨물며 말했다.
그의 슬픔이 나에게 전염되었는지 가슴이 덩달아 답답해진다. 이젠 주식을 체크하는 것보다 건강을 체크하는 게 남는 장사가 되는 시절이 왔다는 게 서글프다.
"잘 될 거야."
"잘 되겠지?"
"두 부부 벽에 똥칠할 때까지 살 거야."
반드시 그래야 한다. 나는 결혼했으면서 친구 뺏기는 것 같아서 심통을 부리고 둘의 연애를 방해하며 엉터리 카운슬링을 빙자한 이간질을 해준 전력이 있기 때문이다.
그가 나를 보며 웃는다. 하지만 그의 눈은 전처럼 활짝 웃고 있지 않았다. 나는 그런 그를 바라보는 것이 불편하고, 달리해줄 수 있는 것이 없다는 사실 때문에 가슴 한편이 먹먹했다.
친구의 아내가 아프다. 아니 그가 더 아픈 것 같다. 그래서 돌아오는 내내 우울했다. 먹기로 했던 저녁은 나중으로 미루고 집에 들어가라고 했다. 그는 연락하겠다며 힘없이 돌아섰다. 나는 그가 차를 타고 주차장을 빠져나가는 모습을 지켜봤다. 한 치 앞도 볼 줄 모르는 어리석은 인간인 나는 어두운 지하 주차장을 돌고 돌아 빛이 비치는 출구로 나아가는 그를 보며 종종 기적이라는 것이 있는 것 같은 이 이 세상에 사는 동안 나의 오랜 친구 윤재와 그의 아내 은주 씨에게 운명이 좀 관대하기를 빌었다.
돌아오니 난장판 된 집이 나를 기다리고 있었다. 싱크대엔 무얼 해 먹었는지 프라이팬과 접시들이 가득 쌓여 있었고, 식탁 위엔 콜라병과 맥주 캔들이 구겨진 채로 뒹굴고 있다. 분명 이 난장을 만들어 놓은 주인공이 분명 어디엔가 있을 터인데 보이질 않는다.
나는 이 층을 올려다보며 겨울과 봄, 두 딸의 이름을 불렀다. 하지만 대답 없는 메아리일 뿐이다. 다들 어디를 갔는지 코빼기도 보이지 않는다.
매일 이 상황이니, 낭만은 실종되고, 나의 작가로서의 감수성은 씨가 말라버렸다. 무라카미 하루키는 그리스 어느 섬에 있는 호텔에서 한 달간 장기 숙박하며 글을 쓴다는데 나는 설거지하다가 생각나면 주방 옆 작업실로 달려가는 판이다.
난장판인 주방 식탁 앞에 서서 먹다 남긴 스파게티 접시와 패밀리 사이즈의 피자 상자를 치우고 긴 한숨을 내쉬었다. 가스레인지 위엔 남편이 스테이크를 구워 먹을 때 사용하는 두꺼운 테팔 프라이팬이 구운 야채들의 흔적을 남긴 채 말라가고 있었다. 이쯤 되면 절로 한숨이다. 분명 나는 노벨상을 탈만 한 문학성을 타고났는데, 저들 때문에 내가 이 지경이 되었다고 말도 안 되는 상상을 하며 먹다 남긴 피자 가장자리의 빵을 씹었다. 한 때는 말랑말랑했을 치즈가 입안에서 굴러 굴러다니며 퍽퍽 씹힌다. 나의 일상처럼. 그런데도 나는 누군가의 말처럼 소소한 일상과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는 날들에 감사해야 하는 건가?
신혼 초에 소를 두 번 죽이는 실력을 가진 놀라운 고기 굽는 솜씨에 경악을 금치 못하며 비명을 지른 후 그는 적어도 스테이크 요리는 직접 해 먹는다. 사실 그의 스테이크 요리 솜씨는 전문 요리사 수준의 솜씨라 토를 달 수도 없다. 무엇이든 한 가지에 집중하면 전문가 수준의 열정을 보여주는 게 남편의 장점이다. 단지 그게 음식과 오디오 기계에만 한정되어 있다는 것이 문제이다.
정리되지 않는 것을 참지 못하는 무한 강박증(물론 정리라곤 도무지 모르는 남편이 내게 부쳐준 별명이지만)이 있기에 난장판이 된 주방과 식탁을 서둘러 치웠다. 이 지경으로 만들어 놓고 낮잠 삼매경인 남편이 일어나 치울 때까지 도저히 기다릴 수가 없었다. 그릇의 물기를 닦고 있는데 안방 문이 열리며 남편이 나온다.
“일찍 들어왔네?”
잠이 덜 깬 그가 늘어지게 하품을 한 후 식탁 맞은편에 앉는다. 뺨 한쪽에 구겨진 침대 시트가 빗살무늬 토기 문양을 남겼다.
“애들은 어디 갔어?”
“봄은 점심 먹고 나갔고, 겨울은 학교 간다고 나갔고, 다 크니까 아빠하고 일요일에 놀아주는 법이 없네. 가을인 연애 하나? 요즘 얼굴 보기가 힘드네.”
가을이 요즘 얼굴 보기가 힘든 건 사실이다. 아무리 죽을 시간도 없는 레지던트라 얼굴 보기 힘들다고는 해도 일주일에 밥 한 끼 겨우 같이 먹는 그것은 좀 심하다.
“연애하는 것 같던데.”
“어?”
갑자기 잠이 확 깨는지 남편의 눈이 화등잔만 해진다.
“어, 어 그러면 안 되는데. 내가 회사에서도 보면 결혼할 자격이 없는 놈들이 결혼해가지고 문제를 일으키는 놈들이 얼마나 많은데. 가만히 있으면 정말 괜찮은 놈 내가 찾아 줄 텐데…. 그런데 시간이, 어디 있다고 한가을이 연애하지?”
놈, 놈, 놈, 타령하던 남편이 순간 당황했는지 말까지 더듬으며 묻는다.
“뭐야, 이조시대도 아니고. 누가 요즘 부모가 소개해준 남자랑 결혼해? 더구나 가을처럼 자아가 강한 애는 거의 불가능해. 나중에 머리 싸매지 말고 마음 비우고. 그리고 연애 안 해본 사람처럼 왜 그래? 시간이 없어서 못 하는 게 아니야. 마음이 없어서 못 하는 거지.”
“안 돼. 내 주변에 젊은것들 결혼 괜히 했다고 투덜거리는 놈들이 얼마나 많은데. 더구나 우리는 딸만 셋이라 혹시나 재산 좀 있나 싶어서….”
“어이구 옆집 강아지 초롱이가 다 웃을 일이네. 당신이 무슨 재벌이야?"
“아무튼 나는 내 딸들이 홀대받으며 결혼 생활하는 거 절대 못 봐”
“그럼 데리고 사시든지.”
“그것도 괜찮지.”
이쯤 되면 평생을 딸 짝사랑의 아이콘으로 살아온 남편이 어느 날 갑자기 딸들의 배신 아닌 배신으로 입을 상처가 걱정되지 않을 수 없다. 전생의 연인이 죄다 본인의 딸로 태어났다며 좋아 죽던 남편의 암울한 미래가 서서히 다가오고 있는데, 그는 준비가 전혀 되어 있지 않다.
찬장에 반짝반짝 윤을 낸 접시를 집어넣으며 남편을 흘낏 봤더니 시무룩한 얼굴이다. 그 얼굴을 보고 있으려니 나도 모르게 슬그머니 웃음이 나오려고 한다. 내 눈에 그는 딸 바보의 지경을 넘어서 딸 등신 수준이다.
“남자친구 있다는 소리는 없고?”
한동안 시무룩하게 앉아 있던 남편이 재차 묻는다.
“잘 모르겠는데.”
“큰일이네…. 내 맘에 쏙 드는 놈으로 데리고 와야 하는데.”
나는 정말 그에게 묻고 싶다. ‘당신은 우리 아버지의 마음에 쏙 드는 놈이었을 것 같아?’라고 말이다. 순간적으로 어째 인생은 돌고 돈다는 느낌이 강하게 드는 걸 보면 딸들에게 몰빵한 남편의 미래가 결코 순탄치, 많은 않을 것 같은 예감이 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