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괜찮아 인생이잖아 2

당연과 당혹 그 사이 어디쯤

by Dear Lesileyuki


모처럼 만에 남편과 함께 나란히 앉아서 저녁을 먹었다. 남편이 식탁의 촛대에 오랜만에 불을 밝히고, 애지중지하는 와인을 땄다. 단맛의 와인을 좋아하는 나의 취향은 전혀 고려하지 않은 와인을 한잔 따르더니 잔을 들어 건배한다. 나는 남편이 하자는 대로 잔을 들었다가 다시 내려놓았다.

신혼 초에는 촛불 하나에 슈퍼에서 산 진로 와인 하나로도 충분이 행복했는데, 지금은 그때보다 더 비싼 와인을 마시며, 더 넓은 평수의 집에서 사는 데도 행복 지수는 한 참 다운된 기분이다.

“맛 괜찮은데.”

남편이 한껏 분위기를 잡으며 와인을 마신 후 감탄한다.

시원한 맥주 한잔 마시며 원고를 쓰는 것이 지상 최대의 낙인 나와 달리 남편의 와인 사랑은 무한대다. 너무 사랑해서 마시는 와인보다 보관하고 있는 와인이 더 많고, 은퇴하면 보르도 지방을 여행한 후 와인에 대한 책을 내겠다고 벼르고 있다.

“난 무조건 달콤한 와인이 좋아. 제일 싼 거. 마트에서 파는 달달한 그것 좀 마시면 안 돼?”

“명색이 소설가면서. 포도주스 같은 와인만 좋아하냐? 수준을 높여.”

“나는 포트와인을 좋아할 뿐이야.”

나는 와인 잔을 한쪽으로 밀며 말했다.

그에게 내 와인의 취향은 아무 상관이 없다. 오직 지금 마시는 한잔의 와인이 자신을 행복하게 하는 것이 중요할 뿐이다. 그리고 나 역시 당연히 행복할 것으로 생각한다.

아이들이 다 빠진 남편과 나의 조촐한 생일 축하는 식탁의 촛불이 다 타기도 전에 끝이 났다. 그 흔한 선물 증정식이라든가. 몰래 반지를 준비하는 것 같은 깜짝쇼는 없었다.

“나이 들면 여행이나 다니자.”

세상에서 제일 등신 같은 사람이 칠십에 여행 다니려고 돈 모은다면서 벼르고 있는 사람이다.

“늙어서까지 붙어서 여행 다닐 생각이 없네요.”

나는 식탁을 정리하며 말했다.

“이 사람이 나의 진정성을 무시하는 거야?”

“각자 다녀.”

“같이 다니기 싫어?”

“여행지의 낭만을 날려버리고 싶지 않은 사람이야.”

“당신을 향한 나의 진정성을 너무 몰라준다. 암튼 유람선 여행이나 다니자고. 애들 시집보내고.”

정말 유람선 여행 중에 배가 뒤집히는 소리를 하고 있다. 항상 통 크게 나오면 반드시 조건이 붙는 남편의 습관을 아는지라 의심의 눈초리로 그를 봤다.

“뒷정리는 내가 할 테니까 당신은 원고 넘길 거 있으면 들어가서 써.”

갑자기 남편이 선심을 쓴다. 나는 버리기 아까워 마시려던 와인을 내려놓고 그를 봤다.

“당신이 선심을 쓸데는 분명 이유가 있어. 뭐야?”

“귀신이네.”

남편이 한때는 내가 반했던 미소를 지으며 나를 본다.

눈꼬리를 가늘게 하며 씩 웃는 모습에 반했던 적이 있다. 하지만 지금은 그 웃음에 넘어갈 내가 아니다. 나는 팔짱을 낀 채 남편을 봤다. 그와 눈이 마주친 순간 이미 나는 완벽한 방어 자세로 들어갔다.

“......... 당분간 어머니 우리가 모시면 안 될까?”

그는 에라 모르겠다는 듯이 단숨에 말해 버린 후 안경 너머로 나를 본다.

그럼 그렇지. 내 예감은 한 번도 틀린 적이 없다. 드디어 그날이 오려나 보다. 치매인 시어머니를 장남인 그가 책임지겠다고 선언하는 그날이 말이다. 지금은 단기기억상실이 심하지만 어느 날 모든 기억이 증발하는 순간이 닥쳐오면 어쩌나 하는 생각은 늘 하고 있었다. 물론 예전이나 지금이나 나의 답은 효율성과 합리성이다.

“그건 이미 그나마 남은 어머님의 전 재산이 아들이 있는 서방님 네로 넘어간 순간 결판 본 거 아닌가? 말이 좋아 투자지."

방금 전 와인이 오가던 분위기는 공기 중 어딘가로 날아가 버리고 알코올을 바른 듯 서늘한 공기가 남편과 나의 주변을 맴돈다.

일찍 남편을 여의고 억척스럽게 동대문에서 원단 장사로 작은 부를 이룬 시어머니는 장남에게 아들이 없다는 사실은 전적으로 늘 나의 책임이라고 생각했다. 그러니 입버릇처럼 아들이 있는 집에 재산을 몰아주겠다는 으름장 아닌 으름장을 놓으셨던 시어머니에게 내가 묵은 감정이 없다는 것은 새빨간 거짓말이다.

한 번은 밭이 신통치 않다는 선사시대적 발언을 하는 바람에 시어머님 면 전데 대고 ‘어머님 말씀처럼 딸만 줄줄이 낳은 건 생물학적으로 죄다 남자 탓이라고, 밭 타령은 하지도 마세요’라고 했다가 기염을 하게 만들지 않나, 아들 낳게 해 준다는 병원을 소개해줘도 콧등으로도 듣지 않는 며느리가 고울 리 없었겠지만 나 역시 세상이 바뀐 모르고 아직도 아들 선호사상에 빠진 시어머니가 납득이 되질 않았다. 90년대는 딸이면 지우는 여아불법낙태가 공공연하게 행해지던 시절이었다. 오죽하면 성감별을 금지했을까. 그런 시절에 나는 딸 셋을 광명천치에 내놓았으니 지금 생각해도 대단하다고 생각한다.

글줄이나 쓰면 뭐 하냐고, 병신처럼 계획 임신도 못 한다고 한마디 하시고, 후렴구처럼 목욕탕 가면 동네 아줌마들이 그 집은 또 딸 낳았냐고 물어서 민망스럽다고 덧붙여 말하던 결혼 10년 차에 나는 자발적으로 시간이 흐르지 않는 조선 시대 아류 같은 시월드를 탈퇴했다.

“내가 분명 이야기했지? 나는, 천하에 죽일 년이라고 해도 절대 어머님이랑 내 집에서 같이 살 수 없어. 이 집은 당신의 월급과 담배 연기에 절어 가면서 번 내 원고료, 등등의 돈으로 만들어 우리 집이라고. 그러니 그냥 그들이 죽 모시라고 해. 아님, 어머님이 주신 재산 하나 처분해서 요양원 알아보든가.

인제 와서 왜들 그래?”

“당신 맏며느리 맞아?”
“내가 말도 안 되는 스무 살에 결혼해서 10년 동안 시월드의 그 갑과 을의 관계 속에서 철저히 을로 살았으면 충분하다고 생각해. 뭐 대단한 명망가 집안도 아니면서 아들 타령에, 거대재벌도 아니면서 아들 낳는 집에 몰아주겠다고 공공연히 만천하에 알리신 거로 정리는 됐다고 보는데.”

“말 잘한다. 언제 우리 엄마가?”

“당신 나이가 몇인데 아직도 엄마라고 그러냐? 아무튼, 나는 못 모신다고. 멀쩡할 때도 잘 못 지냈는데, 지금이라고 나은 보장도 없고. 대신 도의적 차원에서 요양원비는 댈 수 있어. 그것도 우리 몫의 절반 중 당신이 3분의 2, 내가 3분의 1. 그리고 서방님이 반. 왜 그런지 당신이 잘 알 거야”

“이야, 그 사랑하면 결혼해야 한다고 외치던 낭만주의자는 어디로 사라진 거냐? 당신 시집살이도 자청했었어.”
“그러니까! 사랑의 동아줄로 제 두 손, 두 발 다 묶은 년이 있기는 있었다네. 그런데 어떡하지? 그 미친년이 예전에 죽었다네.”

“진짜 안 모실 거야?”

어머니와 나 사이를 잘 아는 남편이 미련을 버리지 못하고 집요하게 묻는다.

“나, 새로운 작업 하면 어머니 돌볼 수도 없고. 그러고 싶지도 않아.”

“왜 그래 당신?”

“뭘? 봄이 가졌을 때 뭐라 했는지 알아? 70만 원 주면 아들, 딸 성감별 해주는 데 있다고, 딸이면 내 아들 등골 빼먹지 말고 지우라고 그렇게 말씀하셨던 분이야. 그걸로 우리 엄마랑 어머니랑 대판 싸우신 거 당신도 기억하잖아.”

“그래서 복수혈전 하는 거냐?”

“촌스럽기는. 복수혈전이 아니라, 내가 왜 치매인 시어머니 모시기를 거부하는지 이야기하는 거라고.”

그간의 사정을 잘 아는 남편은 말이 없다. 대가 센 어머니와 어린 아내 사이에서 남편은 늘 애매한 입장이었다. 아니 정확히 말하면 어머니 쪽으로 살짝 기운 애매한 입장이었다.

남편은 그냥 마시기도 아까운 비싼 와인을 석 잔째 원 샷 하는 중이다. 난 그런 그를 팔짱을 낀 채 바라보기만 했다. 천하에 죽일 년이 돼도 씨알도 안 먹힐 일이다.

“누가 그랬지? 사랑의 완성은 결혼이라고!”

나는 남편을 힐난하듯이 바라보며 물었다. 한때는 사랑의 빛이 나왔던 나의 눈에서 비난의 레이저가 발사된다. 그렇게 된 이유를 누군가가 나에게 묻는다면 나는 유구무언이다.

“내가 그랬지.”

연애시절에 본인이 했던 말은 까먹지도 않는지 무덤덤한 얼굴로 말한다.

“근데 이게 사랑의 완성이자 결과물이냐? 일방적인 양보라는 건 없거든. 누가 뭐래도 어머닌 서방님이 모셔야 하는 게 정답이야. 선사시대 이래 죽 제사장은 전권을 갖는 대신 의무도 확실히 했잖아.”

“ 무슨 제사장씩이나?”

“아들 낳은 집은 제사를 지내는 대신 전권을 다 주겠다. 이게 제사장 아님 뭐야? 그래서 군말 없이 다 포기하고 그런 거 아닌가? 당신 지금 나를 보는 눈빛이 ‘어이구 저 속물’ 하는 것 같은데, 나는 그저 사실적 판단에 근거해서 책임과 의무를 말하는 거야. 지금도 나는 21세기에 그런 가치관이 존재했다는 게 놀라울 뿐이야.”

“그래도 진심은 아니지?”

“누가 아니래? 나 진심이야. 진실로 나쁜 년 될 거라니까.”

나는 새삼스럽게 시어머니와 잘 지내고 싶은 생각이 없다. 예전에도 안 좋았던 시어머니와 관계가 새삼스레 좋아질 리도 없고, 내가 구청이나 나라에서 주는 효부상을 탈 작정을 하지 않은 바에야 있을 수도 없는 일이다.

그러나 남편은 우리 집이 주택이니 아파트에서 사는 동생네 보다는 치매시어머니를 모시기 편할 거라고 생각했는지 은근히 집요하게 나를 설득하려고 노력 중이다. 하지만 나는 아무리 생각해도 모를 일이다, 왜 30평대 이층 단독주택이 60평대 아파트보다 시어머니 모시기가 편한지.

“나는 어머님 돌아가시기 전에........”

“정 그러면 방법은 있다.”

“뭔데?”

풀이 죽어 있던 남편이 솔깃한지 물어온다.

“당신이 회사 그만두고 집에서 어머님 모셔. 그러면 되겠네.”

“이야, 당신 정말 너무 한다. 내가 사랑한 그 여자 맞아?”

“아, 글쎄 그년은 죽었다니까!”

나는 과거의 나만을 기억하며 아직도 그 전설 같은 연애시절을 읊어대는 남편을 두고 주방 옆에 있는 작업실로 들어왔다.

창문을 열자 분위기와는 어울리지 않게 만개한 오월의 장미향이 맴도는 밤공기가 부드러운 바람에 실려 들어왔다. 갑자기 사월과 오월의 노래처럼 당신에게서 장미향이 난다고 하던 남편의 말이 기억나 코웃음이 절로 나왔다. 그때 내가 남편을 만나러 갈 때 장미향을 풍기기 위해 전날 밤 고모의 향수를 가져다 옷에 모기약 뿌리듯 살포를 하고, 자연스럽게 배어 나오는 장미향을 만들기위해 선풍기를 돌렸다는 걸 남편은 지금까지 모르고 있다. 그리고 그 향수는 나의 오랜 친구 윤재가 고등학교 졸업선물로 사준 것이었다는 사실도 남편은 영원히 모를 것이다.

남편과 나 사이에 한동안 무거운 침묵이 내려앉았다. 아이들은 들어오지 않고 있다. 남편은 뒤늦게 효자아들 놀이가 하고 싶어서 나를 설득하려고 했는데 그게 잘 되지 않자 애지중지하는 와인을 한 병 다 비우고, 블루라벨 밸런타인을 마시고 있는 중이다. 나는 침묵의 커튼을 친 채 작업실에서 꼼짝도 하지 않았다.

나쁜 년 되기도 힘들다. 장미향 때문에 살짝 약해지려는 마음을 다스리기 위해 차가운 맥주 한 캔을 따서 거침없이 마셨다. 장미는 장미고 사랑은 사랑이고 현실은 현실이니까. 셋 사이에는 정말 아무런 상관이 없다. 장미 같았던 우리들의 사랑에 시어머니의 현실이 버무려지면서 그와 내가 말하던 사랑은 지취를 감췄다.

출근하기 전에 항상 선식을 우유에 타서 마시는 남편은 출근 준비를 마친 후 식탁 앞에 서서 선식을 쉐이커에 우유와 함께 넣고 흔들고 있었다. 그는 어제 마무리 짓지 못한 시어머니 문제를 이야기하고 싶어 하는 눈치였지만 모른척했다.

“엄마 건강검진 결과 나왔어?”

이 층에서 내려오던 가을이 갑자기 내게 물었다

“아니 이번 주쯤 나올 거야.”

“보통은 문제 있으면 그전에 연락이 오기도 해.”

“걱정하지 마. 우리 집 마마는 나보다 오래 살 거야.”

선식을 마시던 남편이 끼어들며 말했다.

나는 남편을 노려보았다. 종종 뇌와 입에 필터가 없는 사람들이 있다. 바로 남편 같은 사람들인데 이제는 무뎌질 만도 한데 여전히 시시때때로 그는 나의

분노를 유발한다.

나중에 그날의 남편, 선식 가루를 입에 묻힌 채 나의 장수를 장담하며 말하던 남편의 입을 왜 한 대 치지 않았을까 두고두고 후회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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