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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후 3시, 아무것도 아닌 시간

오후 3시의 잔디밭

by Dear Lesileyuki

이러면 반칙이다.

태풍이 오기 전에 바람이 불듯이 세상의 모든 일에는 징조가 있는 법인데, 예고도 없이 완전히 뒤통수를 맞았다. 암이라는 말을 듣는 순간 내 영혼이 스르륵 빠져나간 것 같았다.

그야말로 '오 마이갓!'이다. 한국 여성 10만 명 중 278명이 암에 걸리는데, 어느 개그우먼의 말처럼 기가 막히고 코가 막히게도 내가 당첨됐다. 너무 놀라서 내가 한국인이면서 한국적인 감탄사를 쓰지 않고 있다는 사실도 인식하지 못할 정도의 쇼크였다. 나는 한동안 의사 앞에 앉아서 학교 규칙을 어긴 학생처럼 발끝만 내려다봤다. 머리가 하얗게 된다는 말은 막내 봄이 말처럼 개뻥이다. 오히려 멀쩡했다. 의사의 말에 머리를 끄덕이며 바라봤다. 그 와중에도 의사가 톰 크루즈를 닮았다고 생각했다. 톰 크루즈를 닮은 의사가 물었다. 증상이 있었냐고

아무런 증상도 없었다. 생리도 규칙적이었고, 하혈 같은 징조도 없었기에 남의 이야기를 듣고 있는 것 같은 착각이 들었다. 그저 모처럼 건강검진 한번 받았을 뿐인데 이런 일이 발생했다. 의료보험관리공단 통계에 올라가게 생겼다. 아마도 그들은 그들이 만든 제도의 우수성을 나를 통해 다시 한번 확인하게 됐다며 좋아할 것이다.

멋있게는 생겼으나 뱀파이어 후손 같은 의사선생이 나를 바라봤다. 그의 표정은 시종일관 굳건하다. 질문할 것이 있으면 하라는데 나는 할 말을 잊었다. 그나마 다행이라면 할배가 아닌 정말 괜찮게 생긴 의사에게 그런 말을 들었다는 것이다. 나에게 그건 상당히 중요하다. 왜냐고 묻는다면 그냥 내 취향이라고 말하고 싶다.

한동안 나는 얼핏 냉혈한처럼 보이지만 어딘지 열정이 담긴 눈빛의 의사 앞에서 로댕의 생각하는 사람포즈로 턱을 괸 채 앉아 있었다. 의사 선생이 말했다.

“이른 시일 안에 입원해서 검사받고 깨끗하면 수술 들어갑니다.”

‘아 냉정하게도 말하네’라는 생각을 하며 반쯤 넋이 빠진 채 의사선생을 바라봤다. 하긴 하루 종일 이런 일이 다반사일터니 당연한 일이다. 그에게 나만 암환자가 아닌 것이다. 이제부터 나의 생사여탈권을 가진 선생이다.

“자궁을 들어내나요?”

나는 입술을 깨물며 물었다.

“수술이 더 복잡해질 수 있어요. 자궁 들어내는 건 오히려 간단합니다. 그게 문제가 아닙니다.”

그럼 뭐가 문젠데요?라고 묻고 싶었지만 일순 발이 수렁에 빠지는 느낌이 들어할 말을 잊었다. 나름 쿨 하게 살아왔다고 자부했는데, 암이라는 소리 앞에서 요렇게 쪼그라들 줄은 몰랐다.

“열어봐야 알겠지만, 다행히 오래되지는 않은 것 같습니다. 그리고 올라가 보시면 더 심한 사람도 있다는 게 위로가 될 겁니다.”

위로치 고는 너무 논리적이어서 귀에 들어오지도 않는 위로지만 그나마 다행이었다. 그의 말대로라면. 그러나 그 위로는 별로 도움이 되지 않았다. 왜냐하면 그렇게 오기 싫어했던 산부인과에서 진료용 치마를 입고 앉아서 나는 한동안 바보처럼 할 말을 잊었었기 때문이다.

진료를 마치고 나오니 긴 복도에는 나와 비슷하거나 나보다 어린 여자, 아침 남루한 차림의 노인, 잔뜩 치장한 여자들이 거의 비슷한 표정으로 앉아 있었다. 저들 중에 몇이나 자궁을 들어내야 하는 걸까? 자궁경부암 직전의 고위험군에 속해서 운 좋게 들어내지 않는 여자들은 몇 퍼센트나 될까? 나처럼 10만 명 중 287명 중에 속하게 될 여자는 이 복도에서 몇 명이나 더 있을까?

사이렌 소리가 귓가에 들리더니 머릿속이 아득해진다. 이미 기다리고 있던 간호사가 따라오면서 ‘중증암환자’로 등록을 하면 국가 지원을 받을 수 있다고 말했으나 그녀가 하는 말이 전부 다 건성으로 들렸다. 치료비의 5%만 내는 의료의 혜택을 받을 수 있다는데 이렇게 반갑지 않은 건 처음이다. 간호사의 ‘암’이라는 말 한마디에 대형벽걸이 tv 속의 아침드라마에 쏠려있던 사람들의 시선이 내게로 온다. 순간 다리가 병원 바닥으로 빨려 들어 들어가는 것 같고, 주변이 잠시 음소거가 된 것처럼 아무런 소리도 들리지 않았다.

실제로 이런 것이었구나. 암 환자의 기분이. 텔레비전의 암 환자는 다 오버액션이었다. 막내 봄이가 잘하는 말로 ‘개뻥’이었다. 진료실 문을 닫고 나오자마자 울음을 터트리는 가녀리고 불쌍한 환자는 나와 어울리지 않는다.

절차에 따라 암환자 등록을 마친 후 병원 로비에 있는 카페에 앉아서 천천히 커피를 마셨다. 무엇을 하기에도 무엇을 끝내기에도 부적절한 오후 세 시. 내 나이 마흔 하고도 여덟을 닮은 시간이다

병원로비를 오가는 사람들이 영화 속의 느린 장면처럼 스친다. 드라마에서 봤던 것처럼 손수건에 얼굴을 파묻고 우는 것 같은 짓은 체질상 하지도 못하고, 하고 싶은 마음도 없어서 천천히 커피와 함께 블루베리 머핀을 먹었다. 최악이다. 블루베리 머핀 맛이.

‘처음부터 이럴 줄 알았어.’ 뭐든지 결과가 나와 봐야 한다는 말씀을 금과옥조로 여기는 사람처럼 부르짖을 때부터 그랬다. 조금 전까지 그토록 싫어하는 산부인과 진찰대 의자에 진찰용 치마를 입고 앉아 있다는 것도, 어울리지 않게 그 와중에도 빨간 스카프를 걸치고 정장 재킷을 입은 채 얼빠진 표정으로 있었다는 것도 죄다 거짓말 같았다.

운명은 아주 교묘한 시점에 나의 뒤통수를 한방에 날렸다. 젠장, 정말 이러기야?라는 말이 절로 나왔다. 자다가 날벼락을 맞았다고 해도 이보다는 놀랄 수 없을 것이다. 건강이란 측면서는 비교적 운 좋은 사람이라고 자부해 온 내 인생이었는데, 그것 자체도 오만의 극치였다는 이야기다. 순간 막내 봄의 얼굴이 떠올랐다. 눈물이 방울방울도 아니고, 대성통곡은 너무 오버고, 기절은 말 그대로 ‘꼴값’이라고 여겨질 만큼 나이를 먹었다.

갑자기 블루베리 머핀이 목에 탁 걸린다. 나는 급하게 커피를 마셨다. 순간 나의 얄팍한 반사 신경이 꼴사납게 느껴졌다. 암이라는데 블루베리 머핀 때문에 사레가 들려 캑캑대는 꼴이라니. 정말 후진 반사 신경이다.

기억을 되돌려보니 한숨만 나온다. 한국의 프랑수아 사강이란 타이틀을 달아줄 만큼 어린 나이에 등단했지만 늘 카피라이터란 직업을 가진 탓에 시간을 다투는 광고 문구를 쓰고, 애 셋 키우는 동안 사보에, 칼럼까지 글이란 글은 죄다 쓰느라 정작 내 글에는 몰두할 시간이 없었다는 것이 첫째로 한심했고, 친정엄마에게 토끼 부부냐는 소리까지 들어가며 줄줄이 애 낳느라고 보낸 시간이 아까웠다. 지금까지 내가 흘려보낸 시간이 모두 다 아까웠다. 세 권의 장편과 단편의 제목들이 내 머릿속에서 플래시 카드처럼 떴다 사라지기를 반복한다.

‘대체 애 낳는 것 빼고 그동안 나는 뭘 했을까?’

가을이 예약해 놓은 건강검진을 취소하고 책상 서랍 한구석에 처박힌 건강 검진표를 들고 센터를 찾았을 때만 해도 이런 시나리오는 전혀 예상하지 않았다. 오랫동안 피운 담배 탓에 폐나 혹은 암중에서 그나마 이쁜 암 축에 속한다고 누가 말한 갑상선을 걱정했다. 건강검진을 한 것조차 깜빡하고 있던 오월 어느 날 운명에 내게 도전장을 제 맘대로 날려버렸다. 지금도 그날 일만 생각하면 땅속으로 꺼질 것 같다.

먼 곳의 북소리처럼 핸드폰 소리가 들렸다. 발신 번호를 보니 윤재였다. 은주 씨도 나와 같은 기분이었을까? 아니 아마 나보다 더했을 것이다.

“어.”

갑자기 울컥하며 목이 멨다.

“왜 목소리가 그래?”

역시 예민한 윤재다.

“감기 기운이 좀 있네. 어디?”

나는 일부러 목소리를 높였다. 그에게 나도 네 마누라처럼 암이라고 말하고, 위로받고 싶은 마음이 굴뚝같았지만 차마 말을 할 수가 없었다.

“제주도야.”

“회사는?”

“아내가 반대해서 사표는 안 내고 휴가 냈어. 당분간은 서울과 제주도를 오가려고.”

저편의 그의 목소리에 힘이 빠진다. 내 마음을 내가 추슬러야 하는데 옛날처럼 흥분해서 미주알고주알 다 말해야 속이 시원할 텐데 그럴 수가 없다.

“최상의 선택이네…. 은주 씨에게 잘해줘.”

“시간이 얼마 남지 않은 것 같아........”

“어? 은주 씨 어떡하냐?”

순간 갑자기 눈물이 쏟아졌다.

나는 한동안 로비의 카페에서 전화를 붙들고 울었다.


나는 앞으로의 인생이 오후 3시의 잔디밭처럼 나른하고 아무런 일도 일어나지 않기를 바란다고 입버릇처럼 말했다. 그러나 그런 나의 바람과는 달리 마른하늘에 날벼락이 떨어진 것은 정말 거짓말처럼 오후 세 시였다.

오랫동안 함께 일해 온 허 편집장이 삼청동에서 점심이나 같이하자고 해서 줄 서서 먹을 정도로 유명하다는 수제비 집에서 파전을 곁들인 막걸리를 마시고 있었다. 막걸리 한 잔을 급하게 마신 후 그가 대뜸 내게 연애소설을 출판하자고 했다.

“연애소설?”

나는 막걸리를 마시고 열무김치를 한 젓가락 입에 넣은 후 말도 안 된다는 듯이 웃으며 말했다. 즙은 다 빠지고 섬유질만 남은 것 같은 나의 일상 속에서 연애소설은 쓰는 것은 거의 불가능이다.

이제 나에게 연애소설을 쓰라는 건 판타지 소설을 쓰라는 것과 같다. 연애는 사라지고 그 빈자리를 지독한 현실주의가 차지한 나의 결혼 생활을 살펴봐도 그렇다. 결혼 신고를 하는 순간 연애의 사망신고도 동시에 되는 것이다.

“그거 당신 특기잖아. 감각적이고, 낭만적이고, 때론 시니컬한 연애소설. 알고 보면 제인 오스틴의 소설도 연애소설이야. 그 시대엔. 암튼 나는 당신 첫 소설을 읽고 ‘이 여자는 쭉 연애소설로 가야 한다.’라고 단언을 했었는데, 당신이 이상한 길로 빠지는 바람에 통탄을 금하는 바야. 결혼은 왜 해가지구. 당신은 ‘결혼 같은 건 괜찮아’라고 하면서 살아야 했는데 애는 줄줄이 둘도 아니고 셋씩이나 낳고. 아이고.”

그의 표정이 애통해 죽겠단다. 나는 그의 오버가 섞인 행동을 보며 아무렇지도 않게 파전을 먹었다. 그도 그럴 것이 죄다 맞는 말이기 때문이다.

“동감! 내 안의 연애 바이러스는 아주 오래전에 죽었는데. 하지만 낭만의 시대는 가고 서사의 시대가 왔으니 역사소설은 자신 있다. 차라리 내게 허균에 대한 소설을 한번 써보라고 해. 그럼 아주 퍼펙트하게 쓸 수 있는데. 아니면 정약용, 아니면 연암 박지원. 그들 멋있어. 아주 갑족이드라.”

나는 열무김치의 섬유질을 잘근잘근 씹으며 말했다.

“아, 진짜, 김치 씹는 소리 하고 있네. 그건 다른 님들이 쓰라고 해. 당신만이 쓸 수 있는 연애소설이 있다니까.”

“연애를 안 한 지 너무 오래돼서 되려나? 나 생계형 작가야. 요즘 인생 자체가 리얼 다큐멘터리인 사람이야. 그런데 연애소설을 어떻게 쓰냐고.”

“당신 예전에 쓴 연애소설 보면 죽였는데…. 암튼 남편 몰래 연애를 하든 뭘 하든 해서 확 뒤로 넘어갈 연애소설 딱 한 번만 내자? 로맨틱 다큐로 가는 거지. 내가 그러면 선인세 준다!”

순간 그가 외친 ‘선인세’라는 말에 혹했다. 동시에 내 머릿속에는 엑상프로방스의 호텔과 지중해의 산토리니가 빛의 속도로 머릿속을 스쳤다. 그리고 영화 <태양은 가득히>에 나왔던 푸른 바다와 절벽 위의 아름다운 도시가 펼쳐진다.

“내 나이에 연애는 불륜인데. 후진 남녀상열지사 그런 스토리를 원하나. 친구?”

“메디슨카운티 그거는 불륜 아니냐? 하지만 그 메릴 스트리프 때문에 로망이 됐잖아. 그리고 사람들은 원래 저급한 남녀상열지사를 좋아해.”

이젠 학번이 같다고 반말로 접고 나오는 허 편집장을 바라보며 나는 회심의 미소를 지었다. 하지만 그 순간 나는 몰랐다. 운명도 그 순간 나를 보며 회심의 미소를 짓고 있었던걸.

“연애소설로 제대로 한번 날려보자.”

“좀 걸릴 텐데. 그거….”

“삼 개월 줄게”

편집장이 내 앞에서 손가락 세 개를 흔든다.

“미친 거 아냐? 내가 복사기도 아니고….”

“그럼 얼마면 되니? 얼마면 될까?”

원빈 아버지뻘 쯤 되는 얼굴의 허 편집장이 원빈 흉내를 내며 웃는다. 나는 그런 그를 보며 오랜만에 어린애처럼 깔깔 웃었다. 하지만 그 웃음도 갑자기 걸려온 전화 한 통화로 금방 공기 중으로 날아가버렸다.

테이블 위에 놓인 핸드폰에서 이기찬의 <아니기를>이 컬러링으로 흘러나왔다. 평소라면 그냥 흘려버렸을 모르는 전화번호를 그날따라 재빠르게 받았다. 경쾌한 나의 목소리엔 조금 전의 웃음기가 남아 있었다. 하지만 낯선 여인의 낮은 음성을 듣는 순간 머릿속에 이상한 전류가 흘렀다. 나의 남다른 촉이 발동한 것이다.

“접니다만 누구시죠?”

건강검진 결과 때문이라는 여자의 차분한 목소리를 듣는 순간 왠지 안 좋은 예감이 스쳤다. 남다른 촉을 자랑하는 나의 예감은 역시나 적중했고 순간 두려움이 먼지처럼 가슴 밑바닥으로 조용히 내려앉았다. ‘자궁 쪽에 유소견’이라는 말을 듣는 순간 나는 당장 가겠다고 말한 후 전화를 끊었다.

“나, 지금 가봐야겠는데….”

나는 급하게 자리에서 일어나며 말했다.

“가긴 어딜 가? 마무리는 짓고 가야지! 무슨 전환데 그래?”

어이없는 얼굴의 허 편집장이 속사포처럼 말하며 물었다.

“내가 지금 마무리 지을 사람은 당신이 아니라 의사인 거 같다. 이 시점에서 연애소설 건은 당분간 보류다, 응?”

나는 서둘러 가방을 챙기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박완서 선생님이나, 박경리 선생은 한 획을 그으셨지만 나는 한 획은커녕 한 샤프도 못했고 애들 아직 시집도 못 보냈다는 생각, 살짝 치매 걸린 시어머님 생각 등등이 머릿속에서 불량 팝콘처럼 터지다 만다.

“아니 말은 하고 가야지?”

계산하고 급하게 따라서 나온 허 편집장이 팔을 잡으며 묻는다.

“허편, 강남까지 한 시간 안에 갈 수 있어?”

“죽자고 가면 되겠지만…. 나, 회개도 안 한 사람이야!”

“가주면, 당신이 원하는 그 남녀상열지사, 그 망할 연애소설 쓴다.”

심정과 머리가 다 복잡한 나는 멍하니 하늘을 올려다보며 말했다.

“정말이지? 나중에 딴소리 없기다!"

그는 내 말이 끝나자마자 자동차 키를 흔들며 주차장으로 달려갔다. 나는 그런 그의 뒷모습을 불온한 기운에 사로잡힌 채 바라봤다.

그가 급하게 얼빠진 내 앞에 차를 세웠고, 나는 정신없이 차에 올라탔다. 잠실까지 달리는 내내 차 안에서 나는 한마디 말도 할 수가 없었다. 오만가지의 상상과 모든 경우의 수를 생각하며 창밖을 내다봤다. 내가 운이 나쁜 건가? 아니면 현대인이면 결국 암 아니면 심장질환으로 죽는다는데 나 역시 시간의 차가 있을 뿐, 그 대열에 합류한 것일 뿐, 있을 수 있는 일이라는 등등의 생각들이 머릿속에서 오락가락했다. 그러면서도 암이라고 확진이 될 경우를 생각하니 머릿속이 하얗게 됐다.

죽이는 연애소설 써준다는 조건에 그날 허 편집장은 목숨 걸고 강남까지 내달렸다. 덕분에 퇴근 직전의 의사로부터 자궁경부암이 되기 직전인 ‘고위험군’에 속한다는 결과를 듣고 상담 간호사의 안내를 받아 아산 병원을 예약하고, 무조건 특진이라고 옆에서 우기는 허 편집장 때문에 특진 의사까지 정했다. 모든 것이 순식간의 일이라 정신이 없었다. 그 와중에도 남편 생각은 전혀 나지 않았다. 그저 내가 암일지도 모른다는 사실이 두려움과 엉겨서 한 없이 커지고 있을 뿐이었다. 대신 그 틈을 타서 허 편집장은 최대한 빠른 기간 안에 연애소설을 써서 넘겨준다는 계약서를 손에 넣었다.

연애소설을 쓰는 것이 이젠 한 번도 안 가본 근사한 여행지를 상상만으로 쓰는 것보다 더 어렵다는 걸 알면서도 나는 허 편집장과 계약서를 썼다. 암과 연애소설은 그 어떤 연관성도 없는데 하루 동안에 그렇게 되어버렸다.

어쩌면 날이 무딘 칼로 동태를 토막 내는 것 같은 연애소설을 나올 수도 있는데도 일식 마니아인 허 편집장은 칼은 갈면 되는 것이고, 동태가 아니라 최고급 회를 뜨는 기분으로 다시 시작하자고 바람을 잡았다.

다시는 연애소설 쓸 일이 없을 거라고 큰소리쳤는데, 또 연애소설을 쓰게 될 것 같아서 한숨이 나왔다. 내가 다시 연애소설을 쓰는 것은 기만이라는 생각이 들어 첫 소설 이후 쓴 적이 없었는데. 순식간에 그렇게 되어버렸다.

상담하는 동안 심각한 표정으로 지키고 있어서 의사가 남편으로 오인할 정도였던 허 편집장이 나에게 말했다.

“연애소설 시리즈로 내자. 작가정신도 좋지만, 독자에게도 가끔은 친절해야지. 독자는 공부를 원하는 게 아니라 즐거움을 행복함을 원할 수도 있어. 왜? 요즘 살기가 너무 힘들잖아.”

딴에는 위로라고 하는 말인데 도움이 되질 않는다.

“뭔 소리야?”

옆에서 횡설수설하는 그의 목소리를 있자니 더 심란했다.

“의사가 걱정하지 말라니까 그런 일은 없겠지만 어떤 경우에도 파이팅 하자구. 우리 환상의 복식조잖아. ‘망해도 같이 망하고 살아도 같이 살자’가 우리의 모토잖아?”

안경을 콧등에 걸치고 작은 소파에 큰 덩치를 욱여넣어서 대형 곰 인형 같은 허 편집장이 코를 씰룩이며 웃는다.

“당신이 남편 같네.”

나는 건강검진센터의 노란 전광판 번호를 보며 말했다.

“내가 늘 말하지만, 당신은 가계부 쓰는 그분이랑 결혼해서는 안 됐다니까. 당신 엄마는 말리지도 않았어?”

“말렸지. 죽도록.”

나는 전광판의 번호를 노려보며 말했다. 도대체 오늘 나처럼 불려 온 사람이 몇이나 될까? 순간 번호가 죽음과 가까이 다가가는 티켓의 번호처럼 느껴져 온몸에 소름이 돋았다.

“근데?”
“사랑은 종종 이상한 짓을 하게 만들잖아. 무모하고 용감하게.”

“그렇지. 안 그랬으면 내가 왜 이혼을 세 번이나 했겠어.”

세 번 이혼하고 각각의 부인들에게 위자료, 양육비 지급하고 정작 자신은 오피스텔에서 사는 ‘세 번 돌아온 싱글남’인 허 편집장이 고개를 끄덕인다.

“갖다 붙이긴. 당신은 바람이고.”

“누가 그래? 내 사랑이 바람이라고?"

허 편집장이 발끈하며 묻는다.

“당신의 전처들에게 물어봐. 머물지 않고 멈추지 않는 사랑은 죄다 바람이라고 할걸”

그의 요란한 세 번의 결혼과 이혼을 옆에서 지켜봤지만 그래도 허 편집장은 미워할 수 없는 남자다. 그놈의 빈번한 사랑을 주체 못 해서 일상이 피곤하기는 하지만.

“집에 모셔다 드릴까? 이 작가?”

그가 평소 늘 하던 대로 당신, 혹은 자기라고 농담처럼 말하지 않고 ‘작가’라는 타이틀을 붙여서 묻는다. 이젠 진지한 허 편집장으로 돌아왔다는 이야기다.

“아냐 그냥 걸어서 갈래. 집이 바로 근천데 뭐.”

나는 가방을 들고일어나 엘리베이터로 향했다. 그가 천천히 뒤를 따라왔다. 엘리베이터 안은 허 편집장과 나뿐이었다. 그도 나도 아무런 말 없이 그저 앞만 보고 서 있었다.

“괜찮을 거야. 고위험군이라며.”

“아마 그럴지도.”

어쩐지 나는 고위험군에서 끝날 것 같지 않은 예감이 들어 시큰둥하게 말했다. 예감이 좋지 않았다. 혈관을 타고 온몸으로 퍼지는 불안감 때문에 심장의 피가 평소보다 열 배쯤 빠르게 도는 것 같다.

“이 작가, 사심 100% 빼고 하는 이야긴데, 한 번 안아 봐도 될까?”

허 편집장이 울 것 같은 얼굴로 나를 보며 물었다.

“허 편이야 말로 소설 써?”

“아니 그냥 묻지도 말고 따지지도 말고 그냥 그러면 안 되나?”

“........”

나의 말 없음을 긍정으로 들었는지 허 편이 나를 와락 안았다.

“혹시라도 나에게 있을지 모를 좋은 기운을 주고 싶어서. 좋은 기운! 파이팅이다. 이 작가.”

그가 울컥하며 말했다.

“그만하지 좀 있으면 문 열릴 건데.”

나는 엘리베이터의 천장을 올려다보며 말했다.

생긴 것과는 달리 소심한 허 편집장이 뒤로 물러나며 슬그머니 눈물을 닦는다.

“남들이 보면 암 말기인 줄 알겠다. 그렇게 마음이 약하니 이혼을 세 번씩이나 하지.”

나는 아무렇지도 않은 듯 말했지만 이미 나의 마음 한구석에서는 여전히 정말 암이면 어쩌나 하는 불온한 바람이 불고 있었다.

허 편집장을 보내고 집으로 돌아오는 내내 천 가닥만 가닥으로 갈라지며 ‘왜 날까?’라고 묻고 싶은 불안한 마음을 달랬다. ‘네가 아닐 특별한 이유도 없다’라고 말하면서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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