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삼수회'에 게스트로 초대받다!
대한민국의 시니어들은 경이로운 세대다. 굶기를 밥 먹듯 하다가 세 끼 식사를 시작한 세대, 고층 빌딩을 처음 본 세대, 엘리베이터를 타고 아파트에 살기 시작한 세대. 자가용을 몰고 스포츠센터에서 운동하며 세계여행을 떠나기 시작한 첫 세대이기도 하다.
그들은 부모를 모시고 자녀를 키운 마지막 세대이자, 노후를 스스로 책임져야 하는 첫 세대다. 이제는 자식에게 기대기보다 자신의 노년을 스스로 꾸려야 한다. 원하는 소비를 하고, 건강을 챙기고, 즐기면서 사는 것이 중요하다. "젊음에 미치듯이 늙음에 미쳐야 한다"는 말이 그 어느 때보다도 와닿는다.
시니어 세대를 묘사하는 키워드들은 많다.
지공거사, 꼰대, 참견러, 오지라퍼,
틀딱, 연금충, 할배미 할부지, 디지맹,
뒷방 세대, 지박령...
하지만 60대는 OPAL세대이기도 하다. 58년 개띠생 그런 거 하곤 상관없다. 'Old People with Active Life'라는 뜻이다. 놀라울 정도로 활기차고 박력 넘치는 삶을 사는 장년들.
그런 경이로운 사람들과 하루를 지내다 왔다.
50년이 넘도록 우정의 인연을 이어가고 있는 친구들. 홍안의 나이에 만나서 반세기가 넘도록 말을 섞고 몸을 엮고 잔을 맞대고 희로애락을 나누는 도반들이다. 1958년 언저리에 태어나 경북고등학교를 58회로 졸업했지만 아직 마음은 교정에 머물러 있는 사내들. 등산 동호회? 수영 클럽? 여행 친구들? 아니다!
그들의 대화 속으로 들어가 보자. 정체가 금세 밝혀질 것이다.
-대단하다. 에이지 슈터가 코 앞이네?
-숏게임이나 퍼팅이 신의 경지에 왔어.
-나이스 샷. 예술이다 예술!
-아까비. 깻잎 한 장 차이네.
-무슨 버디를 밥 먹듯 하냐?
-우와, 빨랫줄 드라이브!
-벙커 로브샷이 거의 필 미켈슨 급이야.
-벌써 홀인원이 몇 번째야?
나하고는 상관없는 얘기다. 죽을 때까지 한 번이라도 들을 수 있을까? 시작한 지 15년 됐지만 여전히 골프는 설렌다. 심장이 뛴다. 아드레날린 뿜뿜이다. 하지만 여전히 어설프다. 게임이라기보단 고된 노동이다. 마음 따로 몸 따로다.
그래도 친구들과 치는 골프는 즐겁다. 신명 난다.
지역에서 직장 생활하느라 20년 이상 헤어져 있던 친구들과 일 년에 서너 번씩 만나 한 나절 같이 걷고 낄낄대면서 찬사와 탄식을 나누다 보면 그 옛날 십 대의 시절로 돌아가 있는 느낌이다.
골프 모임도 많이 해보고 다양한 부류의 사람들과 플레이해봤지만 이토록 경이로운 모임은 겪어보지 못했다. 육십 대 후반의 나이가 무색할 만큼 팔팔한 체력과 기량을 갖춘 여전히 홍안의 노장들이다.
나갈 때마다 필드 게임이 서툰 나는 늘 민폐 수준이다. 그래도 불편해하거나 내색하는 친구는 없다. 학창 시절 이야기, 일상 이야기, 시국 이야기, 취미와 소일, 무슨 얘기든 종횡무진 티키타카가 끝없이 이어진다.
50년이 넘도록 우정을 이어온 친구들, 학창 시절을 함께한 동창들이 만든 골프 모임. ‘경고 58 삼수회’다. 같은 해에 경북고를 졸업한 친구들이 매월 세 번째 수요일마다 어김없이 모여 골프를 치고 인생을 나누는 자리다. 산전수전 즐기면서 산판 들판 뛰어노는 스무 명 남짓의 놀패들이고 선수들이다.
그들과 하루를 함께한 날, 필드는 늘 그랬듯이 설렘과 긴장으로 가득했다. 같이 플레이하다 보면 여기가 프로 대회장인가 싶을 정도다. 나는 여전히 초보 티를 벗지 못했지만 친구들과 함께하는 라운드는 그 자체로 즐겁다. 직장과 가정에 치여 서로 소식조차 모르고 살던 시절도 있었지만, 이제는 1년에 서너 번씩 만나 필드를 함께 걸으며 옛 추억을 되새긴다.
화창한 초봄. 생각보다 포근해서 라운딩 하기 좋은 날씨였지만 내겐 쪼매 혹독한 날이었다. 3번 우드로 해저드 앞 내리막 라이를 공략하다 공을 물에 빠뜨린 것도 모자라 엄지손가락을 접질려 버렸다. 순간 통증이 심했지만, 미스 샷의 통한이 더 컸다. 그다음부터는 그립을 제대로 하기 힘들 정도로 인대 손상을 직감했다. 얼음찜질을 하고 통증 완화액을 뿌렸지만 손가락은 퉁퉁 부어올랐다.
허리통증을 호소하면서도 여전히 장타와 정교한 그린 플레이를 시전하는 상목. 독특한 배치기 기술을 구사하면서 간간이 시원한 다이빙 샷과 함께 성격만큼이나 호쾌한 티샷을 날리는 고영. 안정된 포즈와 타이밍으로, 부드럽지만 임팩트를 겸비한 무한. 나는 매 홀마다 민폐 플레이를 했지만 내색 않고 오히려 부상을 염려해 준 친구들 덕분에 쌀쌀한 초봄의 꽃샘추위는 거의 느껴지지 않았다.
그래도 포기하거나 아픔을 내색하긴 싫어서 남은 15홀을 부상투혼으로 버텼다. 심한 위크 그립인데 샷이 제대로 될 리가 없었다. 뒤땅 치기, 훅 샷과 연속적인 쌩크. 늘 그렇듯이 이번에도 스코어는 엉망진창을 면치 못할 것이다. 다음 5월 라운딩을 기약하면 되지 뭐. ㅎㅎ
손가락은 점점 더 퉁퉁 부어올랐다. 그립을 제대로 잡을 수도 없었다.
“괜찮냐?” “손가락 봐라, 부었네.”
친구들은 걱정스러운 눈길을 보내면서도 내색 없이 배려해 주었다. 골프 실력이야 늘 꼴찌를 면치 못하지만, 이런 친구들과 함께하는 순간이 더없이 소중했다.
저녁 시간의 대화와 흥취도 그 어느 때보다 무르익었다. 누가 어떤 얘기를 꺼내도 빛의 속도로 맞장구를 치고 조크를 쌓아 올리면서 낄낄대는 토크쇼가 끝없이 이어졌다. 단체 톡방의 흔한 풍경과는 비할 바 없이 정겹고 훈훈한 분위기.
모임의 좌장이자 총무역을 맡아 헌신적으로 봉사하는 홍목 총장이 한껏 달아오른 분위기를 깰까 조심하면서 자리를 정리한다. 월례회 시상식은 따로 없지만 그래도 이례적인 성적 발표를 했다.
경정 프로가 버디를 다섯 개 잡으며 언더파 스코어를 기록했다는 라운딩 결과를 전하자 탄성과 박수가 쏟아졌다. 싱글 스코어를 낸 친구들도 열 명 남짓. 이렇게 멤버 중에서 높은 성적을 직관한 것은 처음이었다. 나는 당연히 꼴찌였겠지만 개의치 않는다. 이런 경이로운 모임에 초대받아서 함께 운동하는 것만 해도 영광스러운 경험이었다. 정식 멤버도 아닌데 기꺼이 불러 준 김총장의 배려와 과분한 소개, 친구들의 따뜻한 환대가 황송할 뿐이었다.
여전히 홍안의 기운을 가진 노장들, 이들과 함께하는 하루는 인생의 선물 같은 시간이었다. 어설픈 샷도, 접질린 손가락도, 쌀쌀한 꽃샘추위도 아랑곳없이 우리는 청춘의 순간으로 돌아가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