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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의 결혼식 환장스토리

사회자는 노쇼! 그래도 무사히 끝난...

by 이에누

1988년 5월 15일, 일요일.

그날은 내 결혼식 날이었고, 동시에 스승의 날이기도 했다.

잊으려야 잊을 수 없는 날이다.




그저께 대학 학과 동기모임에서 그날의 일이 엉뚱하게 소환됐다. ‘황당하지만 재밌는 해프닝’이라는 주제로 돌아가며 이야기하는 자리였다. 한 친구가 최근 아들 장가보낸 날, 양가 혼주의 역할을 혼동한 사회자의 실수로 신부 아버지 대신 임기응변으로 덕담을 하게 된 황당스토리를 들려주었다. 내 차례가 되자 "그건 별 일 아니지. 내가 장가 갈땐 사회자가 아예 안 나타났더라" 라며 그날 있었던 조금은 웃픈 이야기를 꺼냈다. 때마침 결혼기념일 다음날이기도 해서 별생각 없이...


결혼식 사회를 맡기로 했던 대학 동기 친구가, 그날 예식장에 나타나지 않았던 일.

그 친구는 심지어 주례 선생님을 직접 모시고 오기로 한 중요한 임무까지 맡았었기에, 난 예식 시작 직전 정말 환장할 지경이었다.

물론 당시엔 핸드폰도 없어서 연락이 두절되면 정말 답이 없던 시절이었다.


난 그냥, 그날 있었던 에피소드 하나로 웃으며 이야기했는데—

친구의 반응이 의외였다.

"내가? 네 결혼식 사회? 주례 선생님을 모셔오기로? 금시초문인데?"

그는 오히려 어이없다는 듯 반문했고,

"그 시기라면 아마 삼성전자 다닐 때일 텐데, 근무 때문에 휴가도 못 내고 서울에서 대구로 내려갈 수 없었을 거야." 라며 딴소리를 했다.


그때부터 요일 논쟁이 붙었다.

나는 자신 있었다.

일생일대의 중요한 날이었고, 분명히 일요일이었고, 동대구역 인근 예식장도 또렷이 기억났으니까.

하지만 괜히 더 이야기하면 관계가 어색해질까 싶어, 곧장 다른 친구에게 말할 차례를 넘겼다.


그리고 혼자 조용히 그날을 다시 떠올려 봤다.




결혼식은 5월 15일, 스승의 날.

일요일 정오 12시에 시작되었고, 돌아가신 대학 은사님이 주례를 맡아주셨다.

지금 생각해도, 그분께 스승의 날에 폐를 끼친 것 같아 죄송하면서도, 평생 잊을 수 없는 감사의 마음이 남아 있다.


예식 시작 30분 전인 11시 반쯤 결혼식장 사무실로 전화가 왔다. 신랑을 찾는 전화라기에 급히 달려가 받아보니, 주례 선생님이셨다.


"자네 결혼 축하하네. 12시 귀빈 예식장 맞지? 그런데 신부 인적사항을 잘 몰라서 몇 가지 물어보자고. 대학 전공이랑 직업 같은 거 있으면 알려주게."


"아, 네. 00 대학 수학과 졸업했고, 교사로 일하다가 지금은 잠시 쉬고 있습니다. 그런데요 교수님, 사회 맡기로 한 학과 동기 000이 교수님 댁으로 미리 가서 예식장까지 모셔오기로 했는데… 편지도 맡겼는데 혹시 아직 안 왔나요?"


"그래서 내가 기다리다 전화했네. 무슨 사정이 있는 모양이니 당황하지 말고, 사회는 다른 사람에게 부탁하게. 자네가 준 청첩장 보고 지금 바로 택시 타고 갈 테니, 늦진 않겠네."


그렇게 해서 교수님은 결혼식 시작 5분 전에 도착하셨고, 사회는 급하게 다른 친구가 맡게 되었다.

예식은 무사히, 그리고 묘하게 더 성대하게 치러졌다.


"신부 000 양은 명문 00 대학 수학과를 우수한 성적으로 졸업한 재원으로..."

"신랑 이현우 군은 제가 재직 중인 00대 00 학과를 무사히 졸업한 제자로서..."


하객들의 웃음이 터졌다. ‘우수한 성적’도 아니고 ‘무사히 졸업한’이라니.

그래도 나는 그날, 그렇게 한 사람의 배우자가 되었고, 한 사람의 제자로서 축복을 받았다.




지금 와서 보면 그 모든 소동이 내 청춘의 장식 같기도 하다. 좌충우돌이 없었다면, 그날을 이렇게 오래오래 기억하지도 못했을 테니까.

사라졌던 사회자 친구는 기억이 없다고 하고, 주례 선생님은 당일 택시 타고 오셨고, 나는 그저 무사히 결혼을 했다.


그 모든 일이 일어난 날은

1988년 5월 15일, 일요일.

스승의 날이었다.




결혼식이 끝난 뒤, 정신없이 인사하고 사진 찍고 웃다 보니 어느덧 해가 기울고 있었다. 예식장 밖으로 나오니 5월의 햇살은 부드럽고, 봄꽃은 마치 아무 일 없었다는 듯 활짝 피어 있었다. 마치 "뭐가 그렇게 대단한 사건이라고 그래?" 하는 듯, 나무들도 그저 나른하게 서 있었다.


그날 있었던 우여곡절이 현실이었는지, 꿈이었는지 헷갈릴 정도로 어안이 벙벙했던 기억. 사회는 급하게 부탁한 친구가 얼떨결에 맡아 줬고, 주례선생님은 택시를 타고 결혼식 직전에 도착하셨고, 나는 예식 내내 속으로 ‘000 녀석, 대체 어디 간 거야…’ 하며 이를 앙다물고 있었다.


돌이켜보면, 그런 일이 있었기에 내 결혼식은 더 특별했는지도 모른다. 모든 게 매끄럽게 흘렀다면 오래 기억에 남지도 않았을 거고, 대학 은사님이 신부 이력을 현장에서 전화로 물으시는 장면도 없었을 거다. 그 와중에 ‘무사하게 졸업한 제자’라는 멘트는 평생의 개그 소재가 됐고.


친구 000에 대한 원망 같은 건 없다. 아니, 그땐 좀 억울했지. 하지만 시간이란 게 그렇게 미운 감정도 웃음으로 바꿔놓는다. 어제 그 친구와의 대화에서, 그는 “기억이 안 나는데?”라며 어리둥절해했고, 나는 그 모습이 너무도 엉뚱하고 웃겨서 도리어 웃음이 나왔다. 우리가 그런 시절을 살아냈구나. 가난하지만 뭔가 꿈틀대던, 수많은 좌충우돌이 있었던 우리 청춘.


그리고 무엇보다도, 그날 나는 결혼을 했다. 내 인생의 가장 중요한 약속을 지켰다. 예식장은 동대구역 근처였고, 시간은 12시, 그리고 날은 1988년 5월 15일 일요일, 스승의 날. 돌아가신 은사님은 그날의 혼란 속에서도 한마디 불평 없이 내게 축복을 내려주셨다.


“자네, 잘 살게. 행복하게.”

그 말씀은 여전히 내 마음에 살아 있다.


그리고 지금, 몇십 년이 흘러 그날을 다시 떠올리며 웃을 수 있다는 건 아마도, 내가 정말 잘 살아왔다는 증거 아닐까?




어느덧 결혼 37주년.
기념으로 동네에서 맛있는 초밥을 먹었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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