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장 느린 템포의 격정>
가르델. 실종된 훌리오에게 수녀들이 붙여준 이름이다. 이 이름을 듣자마자 실소가 터져나왔다. 참으로 적절한 이름이 아닐 수 없다. 위대한 가수이자 배우, 뛰어난 작곡자인 미남. 이 위대한 아르헨티나인을 수식하는 단어들은 다음과 같다. 그러나 그 모든 수식어들에도 불구하고 비행기 사고로 비극적으로 그 삶을 마친 카를로스 가르델은 묘하게 훌리오와 그 이미지가 겹쳐보인다.
카를로스 가르델을 설명하기에 가장 적확한 음악을 꼽으라면 그의 대표곡 'Por una cabeza'를 들 수 있겠다. 제목을 직역하자면 '머리 하나 차이'로 경마장에서 말의 머리 하나 차이로 돈을 잃고 따는 상황을 빗대어 만든 곡이다. 얼핏 들어서는 굉장히 황당한 제목이겠으나 정확히는 그만큼 '아주 간발의 차로 나는 그녀를 놓치고 말았네.'라는 의미이다. 제목만 들어서는 생소한 이 음악은 사실 누구나 알고 있는 멜로디를 가진다. 바로 영화 <여인의 향기>에서 알 파치노가 분한 프랭크 중령이 무도회장에서 여인과 춤을 추는 장면에서 흘러나온 음악이기 때문이다.
탱고는 영화에서 중요한 역할을 담당한다. 미겔이 기억을 잃어버린 훌리오와 마주하는 순간, 미겔은 훌리오에게 '가르델'이라는 이름의 유래를 묻고 이윽고 노래를 청한다. 훌리오가 노래를 부르며 중간에 멈칫하자 미겔은 그의 노래를 받아 계속해서 이어간다. 훌리오의 눈빛에 생기가 돌고 그는 환한 미소를 지으며 미겔과 함께 노래를 부른다. 일견 음악의 기적을 목도하는가라는 생각이 관객의 머리에 들 때 즈음, 훌리오는 미겔에게 다음과 같은 질문을 던진다. '혹시 그 노래를 부른 가수신가요?' 당연하지만 그럴리가 없다. 카를로스 가르델은 이미 세상을 떠난지 오래니까.
이 영화의 묘한 포인트는 바로 그 '탱고'라는 음악에서 기인한다. 탱고를 설명하는 대표적인 수식어는 '격정'이다. '억누르기 힘들만큼 강렬한 감정'. 그것이 격정의 정의이다. 남미의 열정을 상징한다는 탱고는 얼핏 보아서는 이 영화와는 그 결이 맞지 않는다. 강렬한 감정을 불러 일으키기 위해서는 빠른 템포와 더불어 연주자의 격렬한 동작이 동시에 요구된다. 그런 탱고와는 다르게 이 영화는 호흡이 매우 느리다. 3시간에 가까운 러닝타임을 고려한다면 분량이 모자라 고의로 늘리기 위한 방법을 택한 것이 아님은 자명하다.
그러나 단언컨대 이 영화에는 격정이 있다. 잔잔하지만 맹렬히 일렁이는 영화의 격정은 시네마를 향한다. 롤라가 미겔을 향해 던지는 '넌 못 말리는 영화광이야.'라는 대사는 감독 그 자신에게도 해당하는 말이기도 하다. 점진적으로 사라져가는 아날로그적 필름 무비에 대한 등장인물들의 스탠스는 감독의 시네마에 대한 위기의식과 더불어 짙은 향수를 느끼게 한다. 그렇게 영화는 탱고의 격정에 뒤쳐지지 않는 강렬한 격정을 지녔음을 은연중에 드러낸다.
오프닝에서 선보이는 느린 템포의 영화 속 영화는 감독의 연출 스타일을 보여줌과 동시에 긴 호흡으로 자신의 격정을 녹여낼 것임을 예고한다. 그리고 영화는 러닝타임 내내 책과 음악, 그리고 필름 무비에 대해 연이어 카메라를 비추고 그에 대한 노스텔지어와 애정을 드러낸다. 지나간 옛 이야기를 옛 동료와 나누고 잃어버린 기억과 세월에 핀포인트를 맞추어 담담히 대화를 이어나간다. 사이사이 끼워넣어진 투정과 미련은 덤이다. 마치 3시간이라는 런닝타임마저도 감독은 자신의 모든 애정을 욱여넣기에는 모자라는 듯, 플롯이 진행되는 내내 카메라는 옛 것을 부지런히 비춘다.
그런 의미에서 영화는 내가 보아온 것 중 '가장 느린 템포의 격정'이다. 비극적인 결말을 맞은 카를로스 가르델과 훌리오, 둘의 연결고리에서 드러나는 음악과 시네마에 대한 애정, 그리고 영화를 통해 나타나길 바라는 기적에 대한 소망마저도 감독은 필름 안에 담아내고자 하였다. 격정이란 빠른 템포만으로 표현될 수 있는 것인가. 솔직히 격정을 표현한다는 음악, 탱고에서는 그러한 예를 본 바가 없다. 그러나 <클로즈 유어 아이즈>는 영화가 예외를 만들어낼 수 있음을 증명해보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