토정비결을 보거나 오늘의 운세를 펼치다 보면 '귀인'이라는 단어와 마주치게 된다. 어느 방향으로 가면 귀인이 있다던가, 올해 몇 월달에 귀인의 도움을 받을 것이라는 등의 이야기들이다. 듣기만 해도 기분이 좋아지는 말이다. 귀인을 만날 것이라고 하면 ‘나의 귀인은 언제 나타나려나’ 하고 막연히 기대하게 된다. 하지만 그 귀인은 이름표를 달고 나타나는 것이 아니어서, 정작 만났을 때는 나를 도와줄 사람일지 나를 귀찮게 할 사람일지 알 수 없다.
원장으로 재직하는 동안 많은 선생님들과 직원들을 면접하고 채용했다. 그중에서도 오래 기억에 남는 사람들이 있다. 요즘 들어 특히 생각나는 사람은 25인승 셔틀을 운전하던 기사님이다.
셔틀기사를 모집한다는 공고를 내고 한 분을 소개받았는데, 여행사를 운영하셨던 이력이 눈길을 끌었다. 대부분의 셔틀 기사님들처럼 60대 정도 되어 보였고, 면접이라 긴장을 하셨는지 말씀이 많지 않았다. 여행사도 운영하셨고 셔틀 운수회사도 운영해 보셨으니 직원관리도 잘하실 거라 생각하여 셔틀 반장 직책을 제안드렸다. 하지만 기사님은 월급이 적더라도 관리자의 직책보다 일반 기사로 근무하기를 원했다.
평양감사도 본인이 싫으면 어쩔 수 없는 법이다. 아무리 설득해도 사양하시길래 결국 일반 기사로 채용하되, 기사 채용이나 노선을 짜는 데 도움이 필요하면 최대한 도와주시겠다고 하셨다. 나도 셔틀 운영에 경험이 많지 않으니 기사님의 도움이 필요했고, 조언을 구하기로 했다.
코로나가 한창이던 2021년에 근무를 시작하셔서 2022년, 2023년까지 무탈하게 근무해 주셨다. 동시에 원생도 점점 많아져서 셔틀도 추가하고, 어떤 요일은 셔틀 운행시간도 늘려야 하는 바쁜 적도 있었다. 유치원생들이 졸업하면서 초등부로 많이 유입되어 초등부가 매해 두 배씩 늘어났고, 모든 직원들에게 보너스를 드렸을 때는 정말 신이 났었다.
어느 여름날, 기사님이 시원한 음료를 한턱내시겠다고 하시며 나에게 뭘 먹고 싶은지 물어보셨다. 그날은 특별한 일도 없었지만 '날씨가 더우니 음료수를 사주시려나 보다' 하며 나이 드신 분의 아량이라고 생각했었다. 그런데 셔틀 하원시간에 마주친 기사님은 아주 자랑스럽게 이야기를 하는 것이었다.
"오늘로써 제가 근무한 지 꼭 1년 되는 날입니다.
저는 어느 회사에서도 1년 이상을 일해본 적이 없어요.
우리 집사람한테도 이야기했는데, 참 이런 일도 다 있구나 하면서 신기해하더라고요”
나는 오랫동안 회사 근로자로 일했기 때문에 1년 근속에 큰 의미를 두지 않았는데, 사업만 해오셨던 기사님은 아주 신기해하며 스스로를 기특하게 생각하고 있었다. 그랬구나, 벌써 1년이… 나는 감사하다고 하며 앞으로도 잘 부탁드린다고 했다.
그 뒤로도 여러 기사님들이 오가고 여러 선생님들이 오가며 정신없이 몇 학기가 흘렀다. 3월 새 학기를 맞이할 때가 되어 연간 계획도 세우고 채용계획, 예산 수립 등으로 눈코 뜰 새 없이 바빴는데, 학생 수는 예전 속도로 늘지 않아 큰 고민에 빠진 시기였다. 갑자기 늘어난 학생 수와 수업을 처리하느라 파트타임도 늘리며 채용을 많이 했었는데, 지금 상황으로 보면 다음 연도에는 조직개편을 해야 할 판이었다.
어디서 뭘, 어떻게 줄여야 하나… 본사와 예산회의를 할 때마다 학생 수를 이만큼 늘리든가 아니면 비용을 이만큼 줄여야 한다는 뻔한 원론적인 이야기만 오갔다. 학생 수가 늘긴 했지만 비용은 훨씬 더 늘어나서 다음 연도를 버틸 획기적인 방안이 있어야 했다. 엎친데 덮친 격으로 신입생 유입은 예전 같지 않았고 주변 학원들도 폐원한다는 이야기가 심심치 않게 들려왔다. 학생 수는 점점 줄어들고 있어서 우리의 연간계획은 옴짝달싹할 수 없었고, 나는 숨이 막혔다.
어느 날 기사님이 나를 잠깐 뵙자고 하더니, 개인적인 일로 이번 학기까지만 근무하시고 다음 학기에는 빠져야 할 것 같다고 하신다. 그러면서 이런 말씀을 하셨다.
"지금 학생 수가 많이 줄어서 원장님이 고민 많이 하신다고 들었습니다.
제가 대충 눈대중으로 보더라도 어떤 요일에는 셔틀 타는 학생이 아예 없고, 10명도 안 타는 셔틀도 있고… 이렇게 해서 수익이 날 수 있나 싶겠더라고요. 그리고 요즘은 회사에 일도 많이 늘어서 제가 더 신경 써야 할 게 많거든요. 원장님만 괜찮으시면 제가 이번에 빠지고 다른 기사님들은 그대로 운행할 수 있도록 해주세요."
그리고 이어지는 말에서 나는 깊은 감동을 받았다.
"코로나 때는 사람들이 여행을 안 다니니까 일이 없었는데, 지금은 다시 여행도 많아지고 바빠져서 아주 좋습니다. 제가 코로나로 일이 없었을 때 여기서 일하면서 우리 사무실 월세도 내고 관리비도 내고 참 감사했습니다. 여기서 2년 반 있으면서 아주 잘 지냈고, 아이들도 예쁘고 즐거웠습니다."
이렇게 이야기를 들으니 오히려 내가 더 고마운 마음이 들었다. 필요에 의해서 기사님을 채용하게 되었지만 기사님에게도 도움이 되었다는 것에 큰 감동을 받았다. 기사님은 '귀인'이라는 표현은 쓰지 않았지만, 오히려 기사님이 나에게 귀인이 되었다는 생각이 들었다. 의도치 않게 기사님이 힘들었을 때 내가 도움이 되었다니, 뭔가 보너스를 받은 듯한 기분이었다. 그리고 조직개편이라는 어려운 결정을 내려야 하는 상황에서, 기사님은 스스로 물러나 주셨다. 마치 내 고민을 알고 계셨던 것처럼.
귀인은 화려한 등장과 함께 나타나지 않는다. 평범한 일상 속에서, 예상치 못한 순간에, 서로에게 필요한 존재가 되어준다. 때로는 내가 누군가의 귀인이 되고, 때로는 누군가가 내게 귀인이 되어준다. 중요한 것은 그 관계가 일방적이지 않다는 점이다. 진정한 귀인의 관계는 서로가 서로에게 도움이 되고, 서로가 서로를 성장시키는 상호적인 것이다.
돌이켜보면 그 기사님과의 인연은 단순한 고용관계를 넘어선 것이었다. 코로나라는 어려운 시기에 서로에게 버팀목이 되어주었고, 각자의 어려운 순간에 서로를 이해하고 배려해 주었다. 귀인은 우리 인생의 보너스다. 예상하지 못한 순간에 나타나 우리에게 도움을 주고, 때로는 우리 자신이 누군가에게 그런 존재가 되어주기도 한다. 중요한 것은 그 순간을 알아보는 것, 그리고 감사할 줄 아는 마음이다. 운세에서 말하는 귀인은 멀리 있는 것이 아니다. 바로 우리 곁에서, 평범한 일상 속에서 서로를 향한 따뜻한 마음으로 존재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