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랑에 빠지면 곰보 자국도 보조개로 보인다"
예전에 우리 외할머니가 말씀하셨다.
곰보 자국은 수두 같은 피부병을 앓고 난 뒤 얼굴에 생기는 흉터를 말하는데, 결코 보기 좋은 것이 아니다. 그럼에도 사랑에 빠지면 그 곰보 자국이 보조개로 보인다니, 말 그대로 눈에 콩깍지가 씐 것이다. 평소라면 절대 그렇게 생각하지 않았을 일도, 콩깍지가 씌면 홀린 듯 마음 가는 대로 결정하고 만다. 이사, 결혼, 취직 등 큰 결정을 앞두고 있을 때 우리는 온갖 정보와 이성적 분석을 바탕으로 합리적인 판단을 내리려 한다.
하지만 곰보 자국 같은 보조개는 결국 나의 결정에 영향을 미치고 만다.
17년 전쯤, 처음으로 내 공간을 갖고 독립하려고 집을 알아보고 있었다. 교통편과 주변 인프라, 그리고 제한적인 예산 안에 들어오는 집은 몇 개 없었다. 많은 사람들이 이미 경험했으리라. 집을 알아보러 다닐 때 갑자기 초라해지는 내 모습을. 그리고 이 많은 집들 중에 왜 내가 살 집은 없는지를.
두 달 가까이 집을 알아보다가 교통이 좋은 사당역 근처 낙성대역을 알게 되었다. 역 주변에 다가구 주택들이 모여 있는 곳이었다. 집들은 낡았고 좁은 골목에 30~40도 가까이 되는 경사진 언덕길도 있었지만, 내 예산에 맞았고 주변에 시장과 여러 인프라가 있었으며 교통도 좋았다. '이 정도면 나쁘지 않겠다' 싶어 부동산과 약속을 잡고 서너 군데 추천받은 집을 보러 다녔다.
항상 주인공은 마지막에 나타나는 법이고, 톱스타들은 마지막 무대를 장식하듯, 그날 마지막으로 본 집에 나는 마음을 빼앗기고 말았다. 역시나 다가구 주택이 촘촘히 들어선 주택가였는데, 지하철 역에서 한참을 걸어 올라가 마지막에는 30도 경사진 골목을 올라가야 하는 집이었다. 등반은 거기서 끝나지 않았다. 건물에는 엘리베이터가 없었는데, 내 마음에 든 집은 5층 건물의 맨 꼭대기 층이었다.
부동산 아주머니와 집을 보러 갔을 때는 인테리어를 새로 하는 내부 공사가 진행 중이었다. 5층에는 4 가구가 살 수 있게 되어 있었고, 공사 중이라 아직 부동산 매물로 나오지 않은 곳이어서 내가 먼저 원하는 집을 선택할 수 있었다. 4집을 모두 둘러보고 그중에서 나는 정남향의 빛이 잘 들어오는 집을 골랐다. 햇살이 너무 잘 들었고, 맨 꼭대기 층이라 앞에 시야를 가리는 건물도 없었다. 여러 집을 보러 다녔지만 가장 싫었던 것은 창문을 열면 옆 건물 벽이 보이는 벽장 같은 집이었다. 나는 더 이상 고민하지 않고 그 자리에서 계약했다. 홀가분한 마음으로 집을 나올 때, 그 집이 서 있던 경사진 골목은 샌프란시스코처럼 보였다. 나의 샌프란시스코 둥지에서 나는 6년 넘게 살았다.
남편을 만났을 때도 비슷한 일이 일어났다. 나는 늦은 나이까지 결혼을 안 하고 부모님 속을 썩이는 큰딸이었다. 연애는 하는데 자꾸 헤어지기만 하고 집으로 데려오는 사람이 없자, 엄마는 나를 듀오 회원에 가입시켰고 그것도 모자라 중매쟁이를 통해 선 자리를 만드는 등 엄마는 많은 노력을 했지만, 고집 센 큰딸은 만나는 사람마다 퇴짜를 놓았다. 엄마도 이제 네가 알아서 하라며 포기하고, 나도 소개팅과 선 자리가 더 이상 기대되지 않을 무렵, 지인의 소개로 지금의 남편을 만났다.
특이하게도 약속 장소가 극장이었는데, 마침 내가 보려고 했던 영화를 보자고 해서 '뭐, 같이 봐도 상관없겠다' 싶어 약속을 잡았다. 그날은 토요일이었는데 근무를 하는 날이어서 내가 남편에게 많이 늦게 연락했다. 8시 약속이었는데 5시 넘어서 회사를 나오며 연락했다. 일부러 늦게 한 건 아니고 아마 잊어버렸던 것 같다. 너무 늦게 연락드려 죄송하다고, 일이 늦게 끝났다고 사과하고 지금 출발했는데 8시까지 극장으로 올 수 있냐고 했더니 남편은 그러겠다고 했다.
나도 거의 영화 시간에 임박해서 극장에 도착했다. 표를 사놓고 전화하니 조금 늦을 수도 있다면서 입구 직원에게 영화표를 맡겨 놓고 먼저 들어가서 보고 있으란다. 알겠다고 하고 먼저 극장에 들어가 자리를 잡고 영화를 보기 시작했다. 20분쯤 지났을까? 남편은 내 옆자리에 앉으며 고개를 살짝 숙이고 눈으로 인사했다. 깜깜한 극장에서 스크린에 반사된 불빛에 비친 남편의 모습은 미키 루크 같았다. 나는 미키 루크의 팬도 아니었는데, 남편을 보자마자 희한하게도 미키 루크가 떠올랐다. 아마도 그만큼 첫인상이 강렬했던 것 같다. 젊은 꽃미남 시절의 미키 루크가 아니라 영화 <레슬러> 이후 세월이 묻어나는 미키 루크의 모습이었다. 많은 선 자리가 있었지만, 다른 누군가를 떠올릴 만한 인상을 준 남자는 없었다.
남편은 중동 남자들처럼 숱이 많은 콧수염과 턱수염이 입 주변으로 이어져 가지런히 정돈되어 있었고, 머리는 댕기를 땋을 만큼 긴 장발을 하고 있었다. 뿔테를 쓰고 긴 장발과 수염을 기른 모습은 <아이언맨>에 이반 반코 역할로 나오는 미키 루크 그 자체였다. 우리 남편은 성형수술을 받은 적이 없는 말끔한 얼굴인데, 왜 미키 루크의 모습이 겹쳐 보였는지는 모르겠다. 나중에 남편한테도 첫인상 이야기를 했는데, 남편은 꽃미남 시절의 미키 루크를 닮았다고 생각하고 혼자 좋아했다. 아무튼 기억에 남을 만한 인상이었다.
이 콩깍지는 최근에도 씌었다. 새로 옮긴 직장은 을지로에 있었는데, 면접을 보러 갔을 때 청계천을 끼고 있는 빌딩 숲 속을 걷고 있자니 뉴욕에 온 기분이 들었다. 아이러니하지만 나는 뉴욕을 가본 적이 없다. 그저 이렇게 생겼을 거라고 짐작만 하는 내 마음속 뉴욕이었다. 점심시간에 청계천을 내려다보며 점심을 먹는 내 모습은 그렇게 힙할 수가 없었다. '이런 곳에서 직장생활을 하는 것도 참 좋은 경험이다'라고 생각하며, 엄청난 불공정 계약에도 불구하고 콩깍지가 씌어서 일하고 있다.
그렇다고 콩깍지가 씐 채로 내린 이 결정들을 후회하는가? 전혀 그렇지 않다. 그리고 과거 그 시점으로 돌아가 다시 결정해야 한다면, 나는 분명 같은 결정을 내렸을 것이다. 결국 나는 폼생폼사다. 그리고 그 폼은 다른 누가 아닌, 오직 나만이 결정할 수 있는 것이다. 외할머니 말씀처럼 사랑에 빠지면 곰보 자국도 보조개로 보인다지만, 어쩌면 그게 인생을 살아가는 가장 솔직한 방법이 아닐까. 백번을 따져 보고 여러 사람의 조언을 듣고 내린 결정이 과연 나를 행복하게 할 수 있을까? 확신할 수 없다.
때로는 콩깍지가 씐 채로 내리는 결정이, 나를 더 행복하게 만들어주기도 하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