누구나 땅 속에 있는 시간은 필요하다
유난히 입맛이 없는 날이 있다.
그럴 때면 무언가 먹어야 한다는 생각마저 폭력적으로 다가와, 텅 빈 위장을 고스란히 느끼며 소파 한켠에 널브러져 있고만 싶어 진다.
한참을 어둠 속에 웅크리고 있다가,
어스름한 노을이 지고 하늘이 부드럽게 옅어지면, 그제야 나는 부엌으로 비척비척 걸어가서 냉동실의 아스파라거스 몇 줄기를 꺼내어 깨끗이 씻곤 했다.
물기 맺힌 아스파라거스의 두꺼운 줄기 끝부분을 잘라낸다. 텅-텅- 소리를 내며 칼질을 할 때마다 살짝 녹은 얼음조각이 튕겨져 나온다.
감자칼로 아스파라거스의 줄기를 벗겨낸다. 거칠고 질었던 겉 부분이 사악-삭 소리와 함께 깎여나가고, 맑은 밑동이 드러난다.
낡은 팬을 달구어 올리브오일을 천천히 뿌린다. 버터도 조금 덜어 떨어뜨린다. 지글거리는 표면 위로 편 썬 마늘과 아스파라거스를 조심스레 넣는다.
항상 이때를 조심해야 한다.
미처 털어내지 못한 물방울들이 팬에서 튀어나와 피부에 닿으면, 제대로 요리되지 않았음에도 그냥 뚜껑을 덮어버리고 싶어 지므로.
소금과 후추를 번갈아 뿌려 센 불에서 구워낸다. 뚜껑을 닫고 약불로 골고루 익힌다.
아스파라거스는 우리나라 기후와 잘 맞아 전국 어디서든 키울 수 있는 식물이라고 한다.
특이한 부분이 하나 있다면, 씨앗을 뿌리고 최소 3년 동안은 뿌리를 발달시키기 위해 수확하지 않는다.
만약 뿌리가 꽉 들어차기 전에 냉큼 수확해 버리면, 생산량이 확 줄어들어버리는 결과를 초래한다. 그러나 3년이라는 긴 시간을 차분히 기다려주고 좋은 환경에서 관리해 준다면, 이후 15년 가까이 과실수처럼 반복적으로 수확할 수 있다고 한다.
사람 또한 그렇다.
감자나 고구마처럼 비교적 단기간에 성장하여 결실을 맺는 사람이 있는가 하면, 아스파라거스처럼 조금 더디더라도 기다림과 인고의 시간이 더욱 풍부한 결과물을 만들어주는 경우도 있는 것이다.
누군가 했던 말처럼, 사람들은 모두 같은 시간을 살아가고 있지만 각자 빛나는 전성기는 제각기 다르게 찾아온다.
또한 그곳에 도달하기까지의 시간 또한 천차만별로 다르다. 누군가 먼저 해냈다 하더라도, 빨리 뿌리를 뽑아 결실을 쟁취하고 싶다 하더라도 흔들리면 안 되는 것이다.
우리는 모두 다른 종류의 채소와 같다.
각자에게 맞는 최고의 환경이 있으며, 혹여나 자라나는 도중에 마음을 다쳐 병충해를 입지 않도록 스스로를 잘 돌보아 주어야 한다.
생김새와 분류는 같지만 그 외의 모든 것이 다른 인간이기에, 누군가와 비교해서도, 비교될 수도 없는 고유한 존재인 것이다.
식탁에 앉아 구운 아스파라거스를 씹다 보면, 내일을 살아갈 용기가 생기곤 한다. 나도 어쩌면 이 아스파라거스처럼 기다림의 때를 겪고 있을지도 모른다고.
이렇게 단단하게 꽃 피워 사람들에게 즐거움을 선사할 때가 올 것이라고 말이다.
제가 아스파라거스를 좋아하게 된 계기는 재미있게도 한 동화책 때문이었어요. 바로 서머셋 몸의 '점심'이었는데, 어찌나 맛깔나게 표현되어 있던지 부모님을 졸라 그날 바로 아스파라거스를 구워 먹었던 기억이 납니다. 동화책을 한 손에 끼고, 아스파라거스를 냠냠 먹으며 세상에서 가장 행복한 아이가 된 듯한 기분이 들었었죠. 세상에는 참 군침 흐르는 표현을 잘 살려내는 작가님이 많은 것 같아요. 그때 이후로 아스파라거스는 여전히 제 최애 야채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