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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억을 적시는 메밀차

소박한 행복이 떠오를 때

by 녕인 Jan 22. 2025

창밖으로 스며드는 햇살이 제법 따뜻해졌다.

이른 아침의 차 경적소리도, 아이들의 왁자지껄한 웃음소리도 잦아드는 조용한 오후가 되면, 나는 찬장에서 메밀을 한 움큼 꺼내어 따뜻한 메밀차를 끓이곤 했다.


촤르르-

메밀을 주전자에 흩뿌리고, 찬물을 가득 채운다.

보글보글 끓는 소리가 들리기 시작하면 뚜껑을 덮는다.


얼마나 지났을까, 불을 끄고 조심스레 주전자를 기울인다. 연한 빛깔의 메밀차가 빙글빙글 찻잔을 채우고, 고소한 향기가 공기 중에 스르르 퍼진다.

브런치 글 이미지 1

메밀차 한 잔을 마주하면 항상 마음이 한 박자 느려지는 것 같다. 따뜻하게 일렁이는 물결 속에 배어있는 고소한 향기가 시간을 느리게 잡아당기기라도 한 걸까. 메밀차를 한 모금 마실 때마다 내 마음은 느긋한 온도로 달그락 맞춰졌다.


메밀차는 마치 어머니와 같아서, 항상 같은 자리에서 나를 따스하게 안아주고 이마를 짚어주곤 했다. 그래서일까, 나는 그 옅은 향기만으로도 마음이 곧잘 포근해졌다.




어린 시절, 어머니께서는 밥을 지을 때 가끔 메밀을 넣어주곤 하셨다.

부엌을 가득 적시던 고소한 메밀의 향기. 파스스 소리를 내며 증기를 내뿜던 밥솥. 그 몽글하고 익숙한 향기에 나는 종종 눈이 스르르 감기며 졸려오곤 했다.


그 흐릿한 장면은 오래도록 기억에 남아 있다가, 메밀차를 끓일 때면 뿌옇게 다시 올라와 마음속을 이리저리 헤엄쳐 다녔다.

브런치 글 이미지 2

따뜻한 기억을 환기시키는 음식은 이렇듯 가끔씩 꺼내먹어야 의미가 있다. 너무 자주 접해버리면 어린 날의 소중한 기억이 현재에 묻혀버릴지도 모르니까.


세상은 늘 바쁘게 돌아가고 나는 그 속에서 쉼 없이 걸어가지만, 이 작은 찻잔 안에서만큼은 시간이 멈춘 듯하다. 끓는 물에 천천히 우러나는 메밀처럼, 나도 이렇게 천천히 나를 채워가면 되는 걸까.


메밀차 한 잔을 앞에 두고 생각해 본다.

지금 이 순간, 나는 행복한가.

소박함 속에서 작은 기쁨을 찾을 수 있는가.


대부분의 나는 그랬다. 작은 것에서 행복을 놓치지 않으려고 노력했으며, 소중한 어린 날의 기억도 달아날세라 야금야금 아껴서 꺼내보곤 했다.


그러나 나는 어느새 훌쩍 커버렸고, 그리 달갑지 않은 순간들을 살아야 하는 나이가 돼버렸다. 어른이 되면서 너무나 많은 행복한 순간들이 잊히거나 덮여버렸다.


메밀차에 얽힌 나의 소중한 기억도 묻혀버리지 않도록, 차 한 잔에 가만히 기대어 잊고 있던 시간을 꺼내본다.


입술에 닿는 찻잔의 온도, 목구멍 가득 퍼지는 은은한 풍미. 화려하진 않지만, 소박하고 고소한 향기가 마음 한구석을 채운다.


마지막 한 모금이 지나가자 마음속 응어리졌던 감정들이 스르르 풀리는 게 느껴졌다.

브런치 글 이미지 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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