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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린 소보로빵에게

쉽게 바스러지는 소보로빵처럼

by 녕인 Jan 14. 2025

유리창 너머로 부드러운 햇살이 쏟아지던 어느 오후, 문득 식빵이 다 떨어졌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집 밖에 나가기엔 다소 꼬질꼬질했던 상태였으므로, 나는 모자 하나를 푹 눌러쓰고 빵집으로 향했다.


지이이잉-


익숙한 진동 소리에 주머니를 더듬었다.

화면에 뜬 이름이 다소 뜻밖이어서 액정을 습관적으로 두드리다 잠시 멈칫했다. 그 사이 부재중으로 변해버린 전화 한 통.


단순한 숫자와 글자 몇 줄이지만, 통화가 걸려오는 화면은 매번 다른 느낌으로 나를 두드린다.

가끔은 누군가의 전화가 반가울 때가 있고, 또 어떤 날은 두렵기도 하다. 그리고 지금처럼 괜히 마음이 복잡해져서 받지 못하고 멍하니 화면만 바라볼 때도 있다.


내가 이상한 걸까.


가끔은 누군가의 목소리가, 안부가, 때론 말없이 이어지는 침묵이 나의 숨통을 죄어올 때가 있다.

어릴 적의 나는 통화를 망설이는 아이가 아니었다.

내 키보다 조금 높았던 공중전화 앞에서 동전을 손에 꼭 쥐고 엄마의 번호를 누르던 때가 생각난다.

서툰 손가락으로 버튼을 누르면 전화기 너머로 들리던 어머니의 다정한 목소리. “여보세요, 영인이니?” 그 짧은 한마디에 마음이 그만 사르르 녹아내리고 웃음이 베실베실 나왔었는데.


지금은 공중전화가 없어도 어디서든 쉽게 연락할 수 있는 세상이지만, 어쩐지 마음은 더 멀어져 버린 것만 같다.


어른이 되어 직장에서 주고받게 된 전화는 마냥 반갑지만은 않은 순간들이 대부분이었고, 전화벨 소리만 울리면 파블로프의 개처럼 털이 바짝 솟아오르고 오들오들 떨리는 것이었다.


고심 끝에 완전한 문장들로 추려 보낼 수 있는 문자메시지와는 달리, 생각할 겨를도 없이 빠르게 목소리를 쏟아내야 하는 통화는 나를 온통 혼란스럽고 뚝딱거리게 만들었고, 전화를 끊으면 이내 비참해졌다.

부재중 통화 1건

걸려왔던 전화는 몇 년간 연락이 닿지 않던 친구였다.

다시 걸까, 잠시 생각을 했지만 곧 그만둬버렸다.



딸랑-

빵집에 들어가서 본래 목적이었던 우유식빵을 찾아 열심히 두리번거렸다.


”어서 오세요, 소보로빵 한 조각 드셔보시겠어요? “


직원은 커다란 쟁반에 갓 나온 소보로빵을 얼기설기 잘라내어 작은 종이컵에 담아 나눠주고 있었다.

요즘은 저렇게 적극적으로 시식을 권하는구나.

괜스레 고개를 숙이고 건네받은 소보로빵 한 조각을 입에 텁-물었다.


따뜻함이 바삭 스며들고, 고소한 냄새가 코끝을 간질였다. 달달한 부스러기가 입안 가득 퍼지고, 부드러운 빵 속살이 천천히 녹아내렸다. 겉은 오돌토돌, 속은 폭신한 그 익숙한 빵이 그날따라 맛있어서 두 개나 담아버렸다.

어린 시절, 학교를 마치고 집에 돌아오는 길목에 있던 작은 빵집이 떠올랐다. 문을 열면 은은한 버터 냄새와 따뜻한 공기가 몸을 따뜻하게 감싸주던 그곳. 엄마는 늘 내 몫으론 소보로빵을, 동생의 몫으로는 초코소라빵을 사시곤 했다.


나는 종종 건네받은 소보로빵의 달콤한 겉부스러기만 갉아먹었는데, 그럴 때마다 어머니는 눈을 흘기며 손등을 톡톡 치셨다. 꼭 이런 사소한 기억들이 버터 향기보다 짙어서 내게 오래도록 남았고, 떠올릴 때마다 공기 중을 몽글몽글 떠 다니며 세상을 온통 달게 만들었다.




소보로빵은 겉은 바삭하고 속은 부드러운 빵이다.

손끝으로 잡으면 버터 빛 부스러기가 후드득 떨어지고, 한입 베어 물면 속은 놀랄 만큼 촉촉하다.

마치 괜찮은 척 단단해 보이지만, 사실은 누구보다 여리고 부드러운 마음을 가진 사람처럼.


우리는 종종 겉을 단단히 감싸며 살아간다. 쉽게 무너지지 않으려고, 상처받지 않으려고. 하지만 아무리 단단해 보여도, 마음속 깊은 곳은 소보로빵 속처럼 말랑하고 따뜻하다. 때때로 작은 말 한마디에 바스러지고, 예상치 못한 일에 속이 쑥 꺼져버릴 때도 있다.


나도 어쩌면 겉으론 단단한 척하지만 속은 누군가의 온기를 기다리고 있었는지도 모른다.


‘그래, 조금 바스러지고 상처받으면 어때. 죽기야 하겠어?’


그런 생각을 하며 아까는 차마 받지 못했던, 빨간색 부재중 버튼을 휙- 눌렀다.


뚜르르-뚜르르르-달칵.


소보로빵을 우물거리며, 담담하게.

바슬거리는 가루들은 입에 탈탈 털어 넣으면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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