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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각난 유과의 사랑

명절에 숨겨진 따뜻한 배려

by 녕인 Feb 01. 2025

아주 옛날부터, 명절이 되면 우리 집 거실 탁자 위에는 늘 새하얀 유과 한 접시가 소복이 놓여 있었다.


마치 옅은 국화꽃 같던 은은한 노랑, 분홍, 그리고 초록빛의 바삭한 유과는 어린 내가 설날을 손꼽아 기다리던 이유이기도 했다.


그중에서도 내가 특히나 좋아했던 것은, 한입 크기로 비뚤비뚤 잘려 있던 조각난 유과였다.




손주들을 끔찍이 아끼시던 할머니께서는 항상 큼지막한 유과를 한입 크기로 촘촘히 부러뜨려두시곤 하셨는데, 덕분에 내 머릿속에서 유과는 언제나 부스러기가 이리저리 흩어진 채 조각난 형태로 존재했다.


이와 같은 이유로 조각난 유과가 더 익숙했던 나는, 유과는 원래 잘게 부러뜨려 내어야 하는 과자인 줄로만 알았고, 뜻밖에 집에 방문한 손님몫의 유과를 모조리 조각내어 부모님께 혼이 난적도 있었다.


그 후로 나는 왜 할머니께서 온전한 형태의 유과를 주시지 않는지 의아해졌지만, 달큰한 유과를 바삭바삭 깨물어 먹을 때면 그런 생각들도 하얗게 잊히고는 했다.


어린 손주들이 혹여나 유과를 허겁지겁 먹다가 목에 걸리지나 않을까, 명절마다 일일이 손으로 조심스럽게 눌러 잘라주셨던 할머니의 하얗고 부슬부슬한 마음.

브런치 글 이미지 1

예전에는 그저 ‘이렇게 나눠두면 먹기 편해서 그러시나 보다’라고만 생각했었다.


하지만 어른이 되고, 명절에 마냥 놀기만 하던 나이를 지나, 정신없이 돌아가는 부엌에 들어서게 되자 나는 알게 되었다.


수많은 음식을 차려내기에도 바쁜 명절 아침, 손주들이 좋아하는 유과를 따로 덜어내어 촘촘히 잘라두는 것은 단순히 쉽게 나눠먹기 위해서가 아니었다는 사실을.


세심한 마음으로 사랑을 담아야 하는 일이라는 것을 깨달았다. 손주들의 입에 들어가는 음식 하나하나 정성껏 매만지고 다듬어 먹이고 싶은 마음이었다는 것을, 나는 아주 많은 날들이 지나고 나서야 알게 되었다.


매번 그저 바삭하고 달콤한 맛이 좋아 아무 생각 없이 손을 뻗었지만, 이제와 돌이켜보면 그 작은 조각들 하나하나에 할머니의 따뜻한 배려가 묻어있었던 것이다.

브런치 글 이미지 2

유과를 입에 댈 때마다 시끌벅적한 명절의 기억이 몽글하게 떠오른다.

반가운 친척 어른들의 호탕한 웃음소리,

어느새 훌쩍 자라 어색하게 날 대하는 사촌동생,

영문을 모르고 눈동자를 굴리는 한 살배기 조카까지.


온 가족이 모여 앉아 유과를 나누어 먹으며 이야기를 주고받다 보면, 제 아무리 사소한 농담이라도 배꼽을 잡고 웃게 되고, 시시콜콜한 근황 이야기도 밤새도록 나눌 수가 있었다.


그 한없이 밝고 즐거운 순간을 감싸주던 조청의 달달한 향기와, 부스스한 실밥처럼 늘어지던 쫄깃한 껍질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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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과를 쥔 손에 힘을 바짝 주면, 파삭- 달콤한 소리를 내며 갈라진다. 너무 세게 누르면 고운 형체가 뭉개지고, 너무 약하게 누르면 원하는 크기로 나뉘지 않는다.


마치 가족과의 관계처럼, 너무 가까이 다가가면 상처가 되고, 너무 멀어지면 그 의미가 흐려진다.


잘게 부서진 유과 조각을 하나씩 집어 먹다 보면, 어느새 입안 가득 끈적하면서도 쫀득한 식감이 우물우물 모였고, 혓바닥엔 구름처럼 달콤한 엿기름이 녹아들었다.


그래서일까, 유과는 마치 바람처럼 마음속에 스며들어 명절의 들뜬 공기도 함께 새겨놓고 떠나고는 했다.




올해도 나는 정성껏 유과를 잘라 접시에 담는다.

아주 오래전, 나의 할머니가 그랬던 것처럼.

그 주름진 손끝에서 배웠던 따뜻한 배려를 천천히 되뇌면서, 파사삭- 유과를 조각낸다.


누군가가 먹기 편하도록 마음을 담아 잘라낸 유과는 단순한 과자라고 하기엔 깊고 진득하다. 그것은 추억을 나누고, 배려를 나누고, 마음을 나누는 또 하나의 방식이다.


이제는 내가 아닌 무릎만 한 어린 조카들을 위해, 큼직한 유과를 골라내어 하나하나 조각내며 생각해 본다.


‘그래도 너희는 나중에 크면, 남들에게 드릴 때 꼭 조각내지 않은 온전한 것으로 드려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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