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05. 햄스터 일병 구하기

니가 왜 거기서 나와

by 사랑 머금은 햇살

'아빠, 투투가 없어졌어.' 새벽 6시. 콘도에서 바라본 창 밖은 아직 짙은 커피색이었다. 아이가 떡진 머리를 하고 곤히 자고 있는 엄마와 아빠를 흔들어 큰 소리로 깨운다. 누가 봐도 쌍꺼풀 수술이 필요할 작은 눈에는 눈물이 그렁그렁하다. '아니 얘가 왜 벌써 일어났지?' 투투가 탈옥했다고? 아니, 탈출했다고?




투투는 딸아이가 키우는—아니, 키운다고 쓰고 괴롭힌다고 읽는—햄스터의 이름이다. 아이 엄마는 내가 쥐 수발까지 들어야 하냐며 근처에도 가지 않겠다고 했다. 하지만 형제가 없는 딸이 외로워 보이는 게 안쓰러워 얼마 전, 근처 펫샵에서 잘 살고 있던 놈을 데리고 오게 됐다.


펫샵에서 처음 만난 날, 펫샵 직원은 나도 못 먹는 해바라기씨가 이 녀석의 most favorite food라고 했다. 난 직원의 설명에 초집중하는 아이의 눈을 신기해서 쳐다보다가, 엉겁결에 해바라기씨뿐 아니라, 햄스터 건강에 좋다는 "햄스터용 비타민"과 "햄스터용 과자"까지 사버렸다. 참, 햄스터는 모래 목욕을 좋아한다고 해서, 목욕용 하얀 모래와 케이지에 깔아주는 "오가닉" 톱밥, 햄스터가 건강 관리할 수 있게 뛰고 달리는 휠까지 한 보따리를 사서 아이 품에 안겨줬다. 다행히도 햄스터 자체는 비싸지 않았지만, 이것저것 더하니 사료와 주변 기구에 햄스터보다 훨씬 많은 돈이 들었다. 처음엔 햄스터가 별로 비싸지 않길래 이 녀석들 팔아서 이 가게가 장사가 될까 했는데 연예인 걱정처럼 전혀 쓸데없는 걱정이었다.


'잘 키워야 돼. 이제 네가 얘 엄마야.'


사실 강아지를 한 마리 데리고 올까. 고양이가 좋을까. 애완동물을 키우면 아이가 책임감도 생기고 덜 심심해할 것 같아 이런저런 고민을 했었는데, 길에서 개나 고양이와 마주치면 그 자리에서 움직이지도 못하는 애 엄마 때문에 애완동물은 내가 다시 태어나면 키우기로 했다.


'나하고 강아지하고 둘 중 하나 선택하세요.’라는 아내의 말에 순간적으로 '강아지를 선택할게.'라고 답할 뻔했다. 하지만 그날따라 이성의 끈이 아주 튼튼하게 붙잡아줬다. 결국, 강아지 대신 케이지 안에 가둬놓고 키우는 햄스터를 데려오기로 했고, 나와 딸아이가 100% 돌보는 것으로 아름다운(?) 합의를 이뤘다.



A_cute_and_fluffy_hamster_sitting_on_a_soft_bed_of_converted.png


그러나 저러나. 케이지에서 탈출한 이 조그만 놈을 도대체 어디서 찾지? 게다가, 만일 못 찾으면? 집안 어디엔가에서 생을 마감할 수도 있는 일은 절대로 막아야 했다. 대참사를 막고 싶은 우리 가족과 아무 생각 없는 투투의 숨바꼭질이 시작됐다.


"햄스터 탈출"이란 검색어로 일단 인터넷을 찾아봤다. 대한민국의 대표 포털 "네**"에서 부모의 이혼문제까지 상담해 준다는 초등학생 지식인들은 역시 우리의 기대를 저버리지 않았다. 몇 년 전 집 나간 햄스터를 아직도 못 찾고 있다는 가슴 저린 내용부터 탈출하면 1시간 안에 검거할 수 있다는 초능력자들이 한국 곳곳에 숨어있었다. 이 초등학생들은 페트병으로 쥐덫 만드는 법부터 헤어드라이어로 햄스터가 숨어 있을 만한 곳에 뜨거운 바람을 불어넣는 방법까지, 나 같은 햄스터 집사 아빠를 위해 상세히 기록해두고 있었다.


햄스터 전문가들의 이야기들을 10개쯤 살펴보니 감을 잡게 됐다. 일단 햄스터는 우리 아내처럼 구석지고 어두컴컴한 장소를 선호했다. 우리는 바로 결정했다. 이 녀석이 숨어있을 장소로 가장 유력한 냉장고 밑을 먼저 찾아보기로 했다. 마침 방문은 모두 닫혀 있었고 햄스터 케이지는 부엌 쪽에 있었기 때문이다. 먼저 냉장고 밑을 핸드폰 손전등으로 비춰보았다. 보이기는 개뿔. 그런데, 냉장고 밑에서 뭔 김치냄새가 그렇게 나는지. 내가 햄스터라도 냉장고 밑에는 안 숨을 것 같았다. 다음은 식기세척기 밑을 비춰보았다. 불행히도 핸드폰 손전등으로는 빛이 비치지 않았다. 귀를 한껏 낮춰 햄스터 특유의 소리를 들어보려고 했으나 아무 소리도 들리지 않았다. 그래. 이렇게 쉬울 리가 없지. 쉬우면 햄스터가 아니지. 투투는 자신의 자존심을 걸고 숨은 것 같았다.


모두가 바쁜 아침이라 더 시간을 소요할 수는 없었다. Plan B를 실행하기로 했다. 투투가 좋아하는 해바라기씨를 일단 냉장고, 식기세척기, 그리고, 그 외 숨을만한 곳 주변에 뿌려 두기로 했다. 그리고, 일단 모두 외출하고 저녁에 돌아와 살펴보기로 했다. 집에 아무도 없으면 이 녀석이 경계를 풀고 어디선가 기어 나올 거니까. 해바라기씨를 보면 좋아 죽을 테니까. 그리고, 사료를 먹었다는 얘기는 일단 살아있다는 것이고, 집에 있다는 것이니까.


'아빠, 그 다음은?' ‘'몰라. 아빠도 햄스터 찾는 거 생전 처음이야.'




저녁에 집에 돌아와 보니 먹은 흔적이 뚜렷하다. 식기세척기 앞에 해바라기씨 껍질이 여기저기 흩어져있다. OK. 일단 살아있구나. 우선 식기 세척기부터 움직여보기로 했다. 아이 엄마를 불렀다. 그녀는 뭔가 귀찮은 일이 생길 것 같음을 본능적으로 느끼고 이미 도망갈 준비를 하고 있었다. 그러거나 말거나. 아내에게 말했다. 식기세척기를 이제 현 위치에서 앞으로 꺼내볼 테니 투투가 뒤쪽에 있는지를 살펴보라고. 그런데, 아내는 내가 잠깐, 아니 정말 잠깐 한눈을 판 사이 딸아이를 불러놓고는 홀연히 어디론가 사라졌다.


아이는 드디어 투투를 찾을지 모른다는 기대에 잔뜩 흥분해 있었다. 작은 눈을 나름 크게 뜨고서 어디선가 아빠 등짝만 한 잠자리채까지 찾아와서 만반의 준비를 하고 있었다.


'자. 아빠가 이제 하나, 둘, 셋 하고 세척기를 앞으로 뺄 거니까 뒤에 있나 잘 봐.' '하나, 둘, 셋!'


'YES!!! 아빠, 투투 여기 있어!'


투투는 갑자기 주변이 환해지자 놀래서 움직이지도 못하고 까만 눈만 굴리면서 어리둥절해하고 있었다. 투투는 곧 모든 것을 포기하고 딸아이의 작은 손에 순순히 자신의 몸을 맡겼다. 슬픈 숨바꼭질이 될까 걱정했었는데 다행히도 아이의 웃음과 함께 해피엔딩으로 끝났다.


추신 : 투투는 이후로도 또 한 번 탈출을 감행했다. 이번에는 아이 침대 밑 틈새에서 찾았다. 꽉 막힌 케이지를 매번 어떻게 탈출했는지는 우리는 아직도 모른다.




* 매달 한번은 탈옥하는 햄스터 찾느라고 고생하는, 나이 많은 아빠의 육아와 교육 이야기는 계속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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