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20. 아빠, 근데 가훈이 뭐야?

by 사랑 머금은 햇살

"아빠, 우리 집 가훈은 뭐야?"
"가훈? 갑자기 왜?"
"한글학교에서 가훈 적어오래."
"그래?"


"근데 가훈이 뭐야?"




매주 토요일 오전, 아이는 근처 한인 교회에서 운영하는 한글학교를 다닌다. 이 한글학교에서 아이들한테 "가훈"을 적어오라고 했던 모양이다.


"가훈은 우리 가족이 어떻게 살아가야 할지, 어떤 행동을 중요하게 여기는지를 알려주는 말이야. 우리 가족 모두가 따라야 하는 중요한 약속 같은 거란다."


호랑이가 한글 배우던 시절, 나의 젊으셨던 아버지가 만들어주셨던 가훈이 떠올랐다. '정직, 성실, 화목.' 학교에 제출된 뒤 자연스레 잊혀져버린 불운의 가훈. 난 그런 식으로 사라지는 가훈이 아니라, 우리 아이가 오래도록 기억할 수 있는 구체적인 가훈을 만들고 싶었다




배운 게 도둑질이라고, 회사에서 수행했던 Visioning Workshop이 떠올랐다. 사실 그때는 '쓸데없는 일로 시간을 뺏는다'고 생각했지만, 지금 돌이켜보니 그 과정이 가훈 만드는 데 큰 도움이 될 수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비전이 명확하면 목표가 생기고, 그 목표는 자연스럽게 동기 부여로 이어진다. 공부해라, 책 읽어라, 운동하라는 잔소리를 그저 반복하는 대신, 아이 스스로 방향을 정하고 나아갈 수 있도록 돕는 것이 더 효과적일 테니까.


'그래, 아이의 비전부터 알아보자. 없으면 이 참에 같이 만들면 되고.'


나는 회사에서 했던 다소 복잡한 Visioning Workshop을 내 아이를 위해 간략하게 바꿔서 흰 도화지 한 장에 옮겨보기로 했다.




"딸, 네 꿈은 뭐니? 어른이 되면 뭐가 되고 싶어?" 이 한마디로 우리 가족만의 작은 워크숍은 시작됐다.


Visioning Workshop을 간단히 설명하면 아래와 같다.

비전 설정 (Visionining): 목표를 명확히 정의한다. 비전이 구체적일수록 이해와 실천을 더 쉽게 만든다.

핵심 가치 확인 (Core Value Identification): 비전을 실현하는 데 필요한 철학이나 중요한 원칙을 도출한다.

전략 수립 (Strategy Development): 비전을 달성하기 위한 실질적인 방법과 방향을 설정한다.

행동 계획 작성 (Action Plan Creation): 실행 가능한 계획을 세워 목표에 다가갈 수 있도록 한다.


쓰고 보니 뭔가 복잡한 것 같은데, 사실 어려운 건 아니다. 아빠들은 그저 큰 도화지만 하나 있으면, 이빨로 말로 다 할 수 있다.


그런데, 이런 거 영어 써가면서 다 설명하면 아이 엄마가 극도로 싫어하기 때문에, 아내한테는 그저 "가훈을 만들려면 내가 당신 하고, 아이 얘기도 들어봐야지."라고만 했다. 이런 주제로 대화를 나누다 보면 "정직, 화목, 성실" 보다 좀 더 실질적인 가훈을 만들 수 있으니까.




Visioning 시작

"딸, 아빠하고 엄마는 네가 어른이 되면 하고 싶은 것부터 알고 싶어. 네 꿈은 뭐니? 아빠하고 엄마한테 말해볼래?" 거실에 하얀 도화지를 펴고, 아이와 엄마가 둘러앉았다.


난 도화지 위에 큰 원을 그리고 "우리 딸의 꿈"이라고 썼다.


아이디어 브레인스토밍

"아빠, 나는 요리사가 되고 싶어."
"어떤 요리사가 되고 싶은데?"

"맛있는 케이크이나 과자, 디저트 만드는 요리사."

"아, 베이커. (Baker)."

"아니, 파티시에. (Pâtissier)."
어쭈. 이놈 봐라. 파티시에도 알아? 나름 진지하네.


아이와 엄마는 각자의 생각을 적어 포스트잇으로 도화지에 붙이기 시작했다. 아이디어들이 가득 차니, 그럴싸하게 보이기 시작했다.


비전 초안 완성

나는 도화지에 이렇게 적었다.
"우리 딸의 비전 : 맛있는 디저트를 만드는 파티시에"
"좋아!"
"이게 우리 딸의 비전이야. 멋진데? 그런데 비전만 있어선 안 돼. 꿈을 이루려면 노력도 중요하거든. 멋진 파티시에가 되려면 뭐가 중요할까? 아빠, 엄마는 뭘 도와줘야할까? ."


가훈 만들기

"싱가포르에 가야 해."


이게 뭔 소리지. 뜬금없는 대답에 잠시 어리둥절했지만, 곧 이유를 알 수 있었다. 예전에 싱가포르 출장 갈때 아이를 데리고 갔었는데, 그때 먹었던 음식들과 국제적 도시 분위기가 아이에게 깊은 인상을 남긴 듯 했다.


그때 아내가 눈을 반짝이며 말했다.

"여보, 우리 싱가포르 가는 거야? 나도 싱가포르 좋아." 어휴. 지금 여행 얘기하는 게 아닌데. 수업 시간에 딴 생각하는 학생은 어디나 꼭 있다.


어쨌거나. 아빠도, 엄마도, 아이도 아이디어를 열심히 보탰다. 막연했던 비전은 점점 구체화됐고, 도화지에 붙은 노랗고 파란 포스트잇도 점점 많아졌다.



비전, 가훈, 해야 할 일 드디어 완성.

한 시간 정도 지났을까. 온 가족이 함께 고민한 끝에, 우리 집의 - 우리 딸의 - 비전과 가훈, 해야 할 일이 정해졌다. 도화지에 적힌 내용을 가족이 돌아가며 한 줄씩 읽었다.


"우리 딸의 비전

'싱가포르에서 맛있는 디저트로 사람들을 행복하게 하는 멋진 파티시에'이고,


그 꿈을 이루기 위한 우리 족의 약속

'하고 싶은 일을 하기위해, 해야 할 일을 먼저 하자.'야.


그리고 우리 딸이 먼저 해야 할 일은, 아빠, 엄마와 함께


영어와 중국어를 열심히 공부한다.

매일 조금씩 좋아하는 책을 읽는다.

꾸준히 운동한다.


가족 워크숍 결과물을 적은 도화지를 냉장고에 자석으로 붙이며 나는 말했다.


"딸, 오늘 만든 약속과 해야 할 일들은 네가 어떤 꿈을 꾸더라도 꼭 필요한 "기본기"가 될 거야.


네가 좋아했던 싱가포르도 좋고, 서울도 좋아. 그리고, 뉴욕이든, 베이징이든, 파리든 어디서든지 네 꿈을 마음껏 펼쳐봐. 아빠랑 엄마가 네 꿈을 이룰때까지 항상 같이 하고 힘이 되어줄께."




* "50대 늦둥이 아빠"의 육아와 교육 이야기는 계속됩니다. "중국어 1도 못하는 아빠가 중국어 르치는 이야기"도 기대해 주세요.


댓글, 라이킷, 구독해 주신 모든 작가님들께 늦었지만 감사드립니다.

keyword
이전 19화E19. 노력은 반드시 보답한다. 단, 계단식으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