딸, 아빠가 대학생 때 일이야. 아빠는 그때 영어를 정말 잘하고 싶었어. 그런데 그 시절에는 지금처럼 인터넷도 없고, 유튜브도 없었어. 그래서, 당시 주한 미군 대상의 영어 방송 - "AFKN(American Forces Korea Network)" 이라고 불렸지. - 이나 지금은 할아버지가 된 민병철 선생님의 "생활 영어" 같은 교재에 의존해서 공부했었어. 길을 다녀도 지금과는 달리 외국인을 만나기도 어려웠던 호랑이 영어하던 시절 얘기야.
아빠는 돈을 모아 자그마한 TV를 하나 샀어. 그리고 그 AFKN방송을 그저 하루 종일 방에 틀어놓았었고, 또 회화 카세트테이프를 워크맨으로 들으면서 열심히 영어를 공부했었단다. '영어야, 제발 좀 들려라'라고 간절히 바라면서 말이야.
하지만 매일 노력해도 영어 리스닝 실력은 늘지 않았어. 늘지를 않으니 영어공부는 즐겁지가 않고, 점점 지겨워졌었어. 그러던 어느 날, 고속버스를 타고 강릉인가 속초로 가는 길이었어. 왜 갔는지는 기억이 안나는구나.
여하간 고속도로를 달리는 버스 안에서 워크맨에 녹음했던 팝송을 듣고 있는데... 그 노래는 Elton John의 "Daniel"이라는 노래였어.
Daniel is traveling tonight on a plane I can see the red tail lights heading for Spain And I can see Daniel waving goodbye Oh it looks like Daniel, must be the clouds in my eyes... (하략)
그런데, 갑자기, 정말 갑자기, 그날 이 가사가 또렷하게 다 들리는 거야. 마치 한국어처럼.'아, 이 노래가 이런 뜻이었구나.' 아빠는 그 순간의 감격을 지금도 잊을 수 없단다.
"아빠, 피아노 너무 어려워. 연습해도 잘 안 늘어. 맨날 틀려."
며칠 전 네가 피아노 연습을 하다가 투정 부리던 모습에 내 젊은 시절이 문득 떠올랐어. 네가 겪는 그 답답함이, 오래전 내 답답함과 참 많이 닮았더구나.
그래. 피아노 연습을 많이 하는 것 같지만 잘 안되지? 메트로놈 박자도 놓치고, 계속 틀린데 또 틀리고, 악보는 여전히 눈에 안 들어오고. 그래서 아빠가 물어봤지.
"딸, 그래서 그만하고 싶어?"
그랬더니 너는 이렇게 말했지.
"아빠, 아직 그 정도는 아냐. 잘 치고는 싶은데 잘 안 된다고."
딸, 잘 치고 싶다는 마음이 아직 있다면 중요한 건 딱 하나야. 그냥 계속하던 대로 하는 것.
사실 무슨 도전이든 다 똑같더라. 악기를 배우거나 외국어를 공부하거나, 다이어트를 하거나, 사람들이 중간에 포기하는 이유는 간단해. 노력의 결과가 바로 나타나지 않기 때문이지.
오늘 2시간 운동했다고 해서 체중계 눈금이 바로 변하지 않고, 이번 주에 외운 영어 단어 100개가 이번 주말 내가 보는 외국 영화의 자막을 필요 없게 만들진 않아.
변화는 내가 알 수 있게 오지 않더라고. 변화는 아주 조금씩 느리게 쌓이다가, 어느 날 갑자기 마치 계단을 점프하는 것처럼 크게 찾아오더라. 꾸준히 노력하다 보면 어느 순간 노력이 갑자기 네 귀에 속삭이지.
'그동안 정말 수고 많으셨어요. 이제 한 계단 올라가시죠.'
그리고, 그 첫 계단을 일단 오르면, 두 번째 계단은 더 빠른 속도로 찾아오더라.
딸, 아직은 네가 실력이 늘지 않는다고 느낄 수 있어. 하지만 노력하다 보면, 어느 날 갑자기, 네 손가락들은 알아서 움직일 거야. 메트로놈 박자는 널 따라올 거야. 너의 손가락들이 건반 위에서 모두 각자 멋지게 춤추는 날이 올 거야.
그러니 딸아, "오늘"도 "어제"처럼 한 번 더 연습해 보렴. 그리고 "내일"도. 아빠는 네가 첫 계단을 만나는 그날까지, 네 곁에서 응원할게. 사랑하는 딸에게, 아빠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