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침에요? 도대체 아침에 시간이 어딨 어요? 애 깨우고 밥 먹이고 책가방 싸서 학교 가기 바쁜데, 어떻게 아침에 스펠링을 공부해요?"
지난주 학교에서 실시한 스펠링 테스트에서 아이는 박살이 났다고 했다. 아이 엄마는 풀이 죽었다. 엄마들은 아이의 성적을 자신의 사업 실적으로 생각하는 듯하다. 여하간, 아이의 스펠링 테스트 결과를 보니... '어휴. 얘는 도대체 누굴 닮아서.' 물론 아무도 못 듣는 혼잣말이다.
"여보, 학원에 보내야 할까?" 또 학원 얘기다. 세상에 이렇게 다양한 학원이 있을 줄이야. "스펠링 가르치는 학원도 있어? 그런데, 어떻게 가르치지? 단어장의 단어 알려주고 외우라 그러고, 결국 나중에 시험 보고 그러는 게 다가 아닐까? 학원이라고 별 다른 방법이 있을까?" "그럼 어떡해요?"
"그럼, 어떡해요?"란 질문이 나오면 그것으로 협의나 대화는 끝이었다. 이 말은 "난 모르겠어요. 당신이 좀 어떻게 해봐요."란 아내의 깊은 뜻이다. 어떡하겠나. 오늘부터 스펠링 가르치라는 높은 분의 지시가 떨어진 거다.
"알았어. 내가 해보지 뭐."
세상에서 최고로 산만한 내 아이한테 중요한 것은, 단어를, 산수를, 역사를, 피아노를 가르치는 게 아니라, "이거 별거 아니네. 해보니 재밌네. 나도 잘할 수 있겠는데."라는 생각을 아이 머릿속에 심어주는 것이었다.
그러려면, 처음에는 무조건 "재미"가 있어야 하고, 공부라기보다는 "놀이"로 생각하게 해 주고, 거기에 확실한 "동기 부여"가 된다면, 아이는 알아서 하기 시작한다. 하긴, 그러고보니 어른들도 마찬가지긴 하네.
“여보야. 일단 애가 배우는 단어 교재가 있지? 그것 좀 구해봐.” 자기 손을 떠났다는 것을 느낀 아내는 밝은 표정으로 신나서 구해주겠다고 했다.
며칠 후 "Wordly Wise 3000"이라는 처음 보는 교재가 도착했다. 아내는 이 책을 건네주면서, 이것만 외우면 스펠링 시험은 어려운 게 아니란다고 강조한다. 엘라도, 메이블도, 도라도 다 이걸 공부한다고 했다. '그럼, 왜 우리 애는 이걸 안 시켰어?'라는 말이 입 밖으로 튀어나오려는 것을 꾹 참고, 교재를 훑어봤다.
총 300여 페이지고, 한 페이지에 대략 4~5개의 단어가 예문과 함께 적혀 있었다. 삽화나 중간 표지등 이것저것 빼면, 실제로 공부할 단어가 수록된 페이지는 대략 200페이지.
'오우케이. 그럼 대략 하루에 2페이지씩 외우면, 한 3달 걸리겠군. 그런데 아는 단어도 30%는 될 테니까. 대략 하루에 한 4-5개 정도만 외우면 되겠네. 아빠의 계산은 끝이 났다.
그 옛날 Vocabulary 22000 공부하던 가락이 그래도 살아있었다. '그래. 내가 예전에 Vocabulary 22000을 공부할 때도 비슷하게 계산했었지.' 역사는 반복된다더니.
아빠도 그 옛날 이런 책으로 단어 공부했었단다. 노란색 표지와 진한 검은색 글씨의 Vocabulary 22000.
"여보, 매일 아침에 학교 데려다줄 때 2페이지씩 외우게 하고, 매일 빼먹지 않으면 주말에 상을 주자. 상은 우리 외식할 때 식당 선택권이야. 애가 가자는 곳은 어디든지 간다고 하자고."
아내가 주말에는 나보고 설거지하라고 해서 - 그놈의 설거지 좀 안 하려고 - 주말에는 자주 외식을 하게 됐다. 아이는 마마 킴이라는 로컬 국숫집을 너무도 좋아했다.
아이가 좋아하고, 비싸지도 않고, 게다가 조미료도 안 쓰는 안 쓴다고 대문짝만 한 글씨로 홍보하는 식당이라, 자주 가게 됐는데, 한 3~4개월을 계속 가니 나와 아내는 이 식당에 신물이 나고 있었다.
하지만, 아이는 여전히 이 식당의 국수와 사랑에 빠져 있어서, 아이와 다툼이 종종 있었다. "딸, 오늘은 다른 거 먹자." "싫어."
그래. 식당 선택권 줘봤자, 내 아이는 이 식당에 가자고 할게 뻔했다. 어휴. 지겨워라.
어떻게 같은 식당의 똑같은 메뉴를 3개월을 먹을 수 있을까. 어떻게 같은 만화책을 보고 또 볼 수 있을까. 어떻게 같은 영화를 10번을 볼 수 있을까. 아이들은 볼 수록 참 경이롭다.
"여보, 근데 아침에 학교 가면서 공부가 될까요?"
아침에 스펠링 공부하기로 한 첫날 아침, 차 안에서 오늘 공부할 페이지를 펴보라고 했다. Mushroom 하고 몇 개의 단어가 오늘 외울 단어였다.
“Eating mushroom can be fatal. 이게 뭔 뜻이야?”
"버섯 먹으면 죽을 수도 있다고."
"맞아, 'Mushroom' 스펠링 한번 대봐."
"m-A-s-h-..." 어휴.
"그건 마쉬인데..."
"아, m-E-s-h'..."
"그건 메쉬인데..."
"아! m-U-s-h-r-o-o-m"
"맞아. 대단한데? Mushroom"의 'U' 발음이 '어'처럼 들리지? 사실 'Umbrella'도 'U'가 '어' 발음으로 시작하잖아. 그래서, 발음 규칙을 알면 다른 단어들도 더 쉽게 기억할 수 있는 거야."
"I know."
알긴 뭘 알아. 다 틀려놓고. 하늘보다 높은 자존심은 엄마를 빼닮았다.
"Mushroom 스펠링이 뭐라고?"
"m-U-s-h-r-o-o-m"
"그렇지. 우리 딸 정말 대단한데. 이거 진짜 어려운 단어인데. 다른 친구들은 아직 모를 거야... 그치? 그럼 다음 외울 단어는 뭐야?"
"Library야."
"스펠링이 뭐라고?"
이러다 보면 학교에 도착한다.
2주가량 지났을까. 2주 정도 꾸준히 아침마다 학교 가는 15분 정도의 운전 시간 동안 스펠링을 공부했더니, 이제 등굣길에 집을 나서면서 아빠가 복사해 놓은 자료를 직접 챙긴다. 나와 아내는 가끔 공부한 단어의 스펠링을 물어보고, 맞으면 폭풍 칭찬을 장마철 빗물처럼 쏟아부었다.
칭찬은 역시 고래도 춤추게 하고, 이 세상에 공부 말고 재미있는 게 너무도 많은 내 아이도 단어를 외우게 하게 한다. 내 아이는 아빠하고 있는 곳이 학교이자 놀이터다.
'딸, 단어 외우는 거 재밌지? 아빠는 굳은 머리 써가며, 너 공부시키고 축구하고, 설거지하느라 쪼끔 힘들다.'체력은 정말 국력이다. 특히 슈퍼 울트라 늦둥이 아빠한테는.
한 달쯤 지난 어느 금요일. 스펠링 테스트에서 아이는 80점을 받았다고 했다. 엄마가 전화해서 흥분한 목소리로 아이의 점수를 알려주며, 꼭 일찍 오라고 했다. 아이가 시험을 잘 봤으니 오늘 저녁은 마마킴에 가야 된다고 전에 없는 단호한 어조로 얘기했다. 통보했다. '여보, 오늘은금요일인데. 주말 아닌데. 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