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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망고 Dec 31. 2024

4. 낯선 환경, 낯선 사람들

두려우면서도 안심되는 곳

입원 수속이 늦어진 탓에 병동에 들어올 때는 이미 하루가 저문 이후였다. 병동의 거실에는 불이 꺼져 있었고 복도에는 보행에 지장이 없도록 켜 둔 약한 불빛이 은은하게 빛나고 있었다.


실내화를 가져오지 않아 조무사 선생님께서 꺼내 주신 병원 슬리퍼로 갈아 신었다. 그리고 키와 몸무게를 측정했고, 이어서 병실을 배정받았다. 1인실이었다. 방 밖의 명단에 내 이름의 중간 글자가 가려져 쓰여 있었다. 주변의 다인실을 슬쩍 살펴보니 다른 사람들이 제법 많은 듯했다. 정신과 환자들은 어떨까 하는 걱정이 잠시 들었다. 뉴스 헤드라인에 종종 보고되는 정신질환자들의 범죄 소식도 떠올랐다. 쓸데없는 공상을 하는 것도 잠시, 응급실에서 면담을 했던 레지던트 선생님과 조무사 선생님이 나를 병동 밖으로 데리고 나갔다.


레지던트 선생님은 오늘은 본인이 당직이고, 필요한 사항이 있으면 본인이나 간호사실의 간호사 선생님 또는 조무사 선생님께 말하면 된다고 하셨다. 조무사 선생님은 흔히 볼 수 있는 입담 좋은 아저씨(?) 느낌이었다. 레지던트 선생님과 익숙하게 대화를 주고받으며 어딘가로 나를 이끌었다. 처음 가 본 병원, 처음 들어가 본 폐쇄병동, 처음 본 의사와 간호사, 조무사 선생님. 길게 이어지는 복도에서 마주친 것들은 모두 낯설었다. 레지던트 선생님과 조무사 선생님께서 잠시 대화를 멈춘 그 순간, 나는 궁금했던 점을 조용히 물어보았다.

-근데 지금 어디 가는 거예요?

-아, MRI 찍으러 가는 거예요.

-MRI를... 왜 찍어요...?

솔직히 많이 당황스러웠다. 수술 환자도 아니고 건강검진을 하는 것도 아니고, 아무런 신체적 외상 없이 멀쩡한 나인데 대체 왜 MRI를? 휠체어부터 시작해서 수액이며, MRI며, 모두 이렇게까지 해야 하나 싶을 정도로 과도해 보였다.

-혹시라도 뇌에 문제가 있으면 정신과 치료가 아니라 신경과 치료를 해야 하니까, 미리 검사하는 거예요.

아하. 저절로 고개를 끄덕이게 되는 명확한 대답이었다. 이윽고 두 선생님의 발걸음이 한 곳에서 멈추었다.


방으로 들어가니 커다란 기계가 그 존재감을 뽐내며 방 한가운데 자리 잡고 있었다. 또 다른 의료진이 간단하게 검사 방법을 알려 주었다. 그냥 가만히 누워 있으면 된다고 했다. 원기둥을 반 잘라 놓은 것처럼 생긴 기계에 들어가기 전 귀마개를 받았다. 뜬금없는 전개였다.

-이거... 귀마개는 왜 필요한 거예요?

-검사하는 동안 많이 시끄러워요. 귀마개가 필요할 거예요.

안내사항에 따라 귀마개를 끼고 침대에 누웠다. 천천히 침대가 원기둥 아래로 이동했다. 기기가 작동하며 소리를 내기 시작했다.


귀마개 덕분인지 기기 소리가 귀에 거슬린다거나 하지는 않았다. 그런데 뭔가 이상했다. 웅웅 소리로 들릴 법한 기계 소리는 말소리처럼 들렸다.

-죽어. 죽어. 죽어. 죽어.

죽으라는 소리로 계속 들려 나도 모르게 헛웃음을 내뱉었다. 내가 아픈 건 맞구나. 하는 생각에.

실이 아니라는 걸 알고 있음에도 수십 분간 죽으라는 소리를 듣는 건 분명 유쾌한 경험은 아니었다. 검사가 끝나자 묘한 해방감마저 들었다.


아까보다는 익숙한 복도를 다시 되짚어 왔다. 수액걸이 끄는 소리가 복도의 정적을 깨웠다. 달달달달. 바퀴 소리는 쓸데없이 크게 느껴졌다.

모퉁이를 돌다 몸이 순간적으로 휘청였다. 레지던트 선생님이 어지럽냐고 물었지만 왜 휘청였는지 잘 모르겠어서 잠이 온다고 둘러댔다. 지금 생각해 보면 안정제 효과가 그때쯤에야 나타난 것 같다.


조무사 선생님은 나무문을 열고, 나무문을 잠그고, 유리문을 열고, 다시 유리문을 잠그셨다. 나는 배정받은 병실로 돌아와 침대에 걸터앉았다. 저녁임에도 기운이 넘치는 듯이 보이는 간호사 선생님이 오셔서 잘 자라고 말씀하신 뒤 방의 불을 껐다. 주황색 흐린 불빛은 켜 두신 채로 방문을 닫으셨다. 저 불은 왜 있는 거지 궁리해 보다 수면등이겠거니. 하고 멋대로 결론을 내렸다. 익숙하지 않은 환경임에도 몸은 조금씩 긴장을 내려놓았다. 정신병동이라는 이름이 주는 위압감 속에서 가장 안심이 되는 것은 다름 아닌 CCTV였다. 1인실 구석 천장에 CCTV가 설치되어 있었다. 이상하게 감시당한다는 느낌은 전혀 들지 않았다. 주황 불빛 아래서 CCTV를 가만히 응시했다.


아. 나는 여기서 보호받고 있구나.


그 순간 종잡을 수 없이 널뛰던 감정이 조금이나마 차분해졌다. 예측할 수 없는 나를 누군가가 24시간 지켜보고 있다는 사실이 불안한 마음을 내려놓게 했다. 그제야 나 자신에 대한 두려움이 조금씩 사그라들었다.


그렇게, 낯선 곳에서의 하룻밤이 지나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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