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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망고 Jan 05. 2025

처음 뵙겠습니다(1)

다른 환자들과의 첫 만남

*환자들의 이름은 모두 가명입니다.


일요일 아침부터 간호사 선생님이 자고 있는 나를 깨웠다. "오늘 병실 옮기는 거 알지? 짐 정리해서 저기 옆방으로 옮기면 조무사 선생님께서 시트하고 이불 세팅해 주실 거야." 1인실 외부가 궁금하기도 했지만 갑작스레 다인실에 가서 다른 환자들과 대면할 생각을 하니 겁부터 났다. 이제 막 이곳이 익숙해졌는데 다시 처음부터 다인실에 적응해야 한다니. 밍기적거리며 천천히 짐을 정리하고 있으니 간호사 선생님(하필 또 목소리가 큰 선생님이셨다)이 병실 안으로 들어와 재촉하셨고 조무사 선생님께서는 이불과 베개를 가져가셨다. 몇 번을 오가며 다인실로 짐을 모두 옮겨 놓았다. 4인실이었는데, 여자 환자 두 명이 있었다. 한 명은 20대쯤 되어 보이는 언니, 다른 한 명은 30대 후반~40대 초반쯤으로 예상되는 여성분이셨다. 4인실이라고 하기에는 지나치게 넓은 병실에 순간적으로 어색한 공기가 감돌았다.


다행히 그때쯤 아침 식사가 도착했다. 뭐라도 할 게 생기니 조금 덜 뻘쭘했다. 식판을 받아들고 다들 식사를 시작했다. 간간히 두 분은 이야기를 주고받았다. 서로 꽤 친한 듯했다. 아침식사를 마치고 양치를 하니, 할 게 없었다. 1인실에서는 병실 침대에 앉아 있곤 했는데 다인실에선 조금 어색했다. 그렇지만 병실 바깥에 나가는 건 더 어색했기에 침대에 앉아 있었다. 노트로 종이접기를 하던 20대 언니가 먼저 내게 말을 걸었다. 이름이 뭔지, 몇 살인지 같은 기본적인 질문이었다. 언니의 성격은 굉장히 밝았다. 왜 이곳에 들어와 있는지 모르겠을 정도로 밝은 표정과 목소리는 병동의 이미지와 배치되었다. 어색함과 미묘한 불편함은 그 언니 덕분에 빠르게 사라졌다.


언니의 이름은 '이유빈(가명)' 이었다. 스물여섯 살, 직업은 간호조무사라고 했다. 유빈 언니의 옆 침대를 사용하고 계신 분은 '이영미(가명)',서른아홉 살이었다. 유빈 언니가 그분을 '언니' 라고 불러서 나도 엉겁결에 따라서 언니라고 부르게 되었다.

유빈 언니는 이야기하는 것을 좋아했다. 다인실로 옮긴 지 불과 몇 시간만에 그 언니에 대해 많은 것을 알 수 있을 정도였다. 영미 언니는 침대의 테이블 위에 책을 펼쳐 놓고 공부를 하고 있었는데 종종 유빈 언니의 이야기를 듣다가 궁금한 점을 물어보았다.


유빈 언니는 다른 개인병원에서 우울증으로 진단받고 약을 여러 번 바꾼 경험이 있는데 아무래도 진단이 잘못된 것 같다며 검사를 하느라 이곳, 대학병원에 입원하게 되었다고 했다. 영미 언니가 옆에서 한 마디 했다.

"근데 나는 니가 여기 왜 있는지 모르겠다. 제일 정상처럼 보이는데."

"진단이 잘못된 것 같아서 검사받고 약 맞추려고 왔지. 근데 통화 언제 풀리냐. 이럴 줄 알았으면 오는 게 아니었는데."

"너가 생각하는 정확한 진단명이 뭔데?"

"조울증? 우울증은 아닌 것 같아. 언니는 조울증이라고 했지?"

"응."


조울증이라고? 평소 디지털 매체를 통해 접한 조울증 환자의 이미지는 과도하게 흥분해 중범죄를 저지른, 위험한 사람이었다. 그런데 같은 병실을 쓰는 한 명은 조울증 진단을 받은 환자고, 다른 한 명은 우울증에서 조울증이 의심된다며 약을 맞추러 온 환자라니. 덜컥 겁이 났다. 휴대전화 반입이 불가하니 검색을 해 볼 수도 없고. 정신질환에 대한 순도 100프로의 무지(無知)는 쓸데없는 걱정을 낳았다.


다행히도, 이야기하기를 좋아하는 유빈 언니 덕에 짧은 시간 동안 이 병동의 특징과 유빈 언니 그리고 영미 언니에 대해 많은 것을 파악했다. 유빈 언니는 곧 결혼 예정인 남자친구가 있는데 이곳 병동에선 휴대전화 반입 금지고 공중전화도 입원 후 일주일이 지나기 전까지는 사용할 수 없어 일주일이 지나기를 기다리고 있다고 했다. 그리고 학창 시절 자신의 썰을 여러 개 풀어 주었고 개인병원과 대학병원의 차이에 대해 말해 주기도 했다. 영미 언니는 지겹다는 듯 시종일관 시큰둥했다. 나는 1인실을 오래 사용해서인지는 모르겠지만 이야기가 꽤 재미있고 도움이 되는 부분도 많아 흥미롭게 들었다. 그러자 유빈 언니가 좋아했다. 영미 언니는 유빈 언니가 말이 너무 많다며 얘기를 해도 대답도 잘 안 해 준다고.


오전 11시쯤 되었을까. 조무사 선생님께서 병실 문을 노크하셨다. "보행운동 할게요." 보행운동? 보행운동이 뭐지. 잘은 모르겠지만 일단 밖으로 나갔다. 조무사 선생님께서 TV로 방송 대신 음악을 틀었다. 잘은 모르겠지만 멜x차트에서 자주 들어 본, 최신 k-pop 음악들이었다. 보행운동이 뭔가 했더니 조무사 선생님과 간호사 선생님, 그리고 환자들이 20분간 복도를 왔다갔다하는 걷기 운동이었다. 처음엔 잘 몰라서 복도 끝에서 끝까지 걸었는데 어떤 할머니 한 분이 "저기 바닥에 표시된 부분 안쪽은 남자 병실 주변이라서 여자들은 여기까지만 걷는 것" 이라고 가르쳐 주셔서 그 다음 바퀴부터는 남자 병실 주변의 표시선을 넘지 않고 걸었다. 처음으로 다른 환자들을 가까이서 마주했다. 60대 이상의 여성분이 많았고, 중년의 남성분, 대학생쯤 되어 보이는 남성 등 여러 나이대의 환자들 속에서 아주 어린 아이를 보게 되었다.


초등학교 1학년 정도밖에 되어 보이지 않는 남자아이였다. 일반 환자복은 너무 커서 그런지 아동용 환자복을 입고 있었다. '아니, 저렇게 어린애가 여기 왜 온 거지?' 유빈 언니에게 슬쩍 물어봤다. "언니, 저기 저 애는 여기 왜 온 거에요?" "마음이 아프니까 왔겠지." 이런. 유빈 언니도 이유를 모르는 듯했다.

이유를 짐작할 수 없을 정도로 밝고 활달한 아이였다. 유빈 언니가 그 아이를 며칠 전에 알게 되었는데 굉장히 착하고 귀엽고 밝은 아이라고, 그렇게 말해 주었다. 아직 병실 밖은 조금 어색해서 계속 침대에 앉아 있었다. 평소보다 더 빨리 초인종이 울렸고, 점심식사가 도착했으니 각자 병실로 들어가 있으라는 간호사 선생님의 목소리가 들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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