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린 친구들을 만나다
점심식사 후 딱히 병실 안에서 할 일도 없고 바깥은 어떤지 궁금해서 슬쩍 나가 보았다. 소파와 의자가 많았고, TV에서는 평범한 예능이 방송되고 있었다. 그리고 어린 친구들 두 명이 함께 방송을 보는 중이었다. 보행운동 시간도 아니고 프로그램이 있는 것도 아닌데, 나가기가 어색했다. 그런데 유빈 언니가 병실에만 계속 있으니 답답하다며 밖으로 나가며 나를 함께 끌고 나갔다. 병동 거실(?)은 생각보다 한산했다. 영미 언니가 창가에 설치된 실내자전거를 타고 있었고, 중년 아저씨가 TV를 보다가 정수기에서 물을 한 컵 떠서 병실로 들어가셨다. 그리고 두 아이가 우리 쪽으로 돌아보더니 유빈 언니를 보고 반색했다. "유빈 누나, 놀아 줘!!"
어쩌다 보니 그 아이들과 통성명을 했다. 둘 다 또래보다 몸집이 작은 편이어서 실제 나이를 듣고 조금 놀랐다. 파란색 아동용 환자복을 입은 남자아이는 '서제영(가명)', 이제 초등학교 4학년에 올라간다고 했다. 그런데 생일이 아직 지나지 않아서 그런지 손목에 찬 환자번호표에는 9세로 적혀 있었다. 옆에 있던 조금 더 덩치가 큰 남자아이는 '이찬혁(가명)', 올해 중학교 2학년이라고 했다. 초면이라서 그런지 둘 다 여기 있는 이유를 짐작하기 어려웠다. 내가 낯설었는지 제영이와 찬혁이는 잠시 조용히 있다가, 유빈 언니가 낮잠을 잔다며 병실로 돌아가고 나서야 조금씩 내게 말을 걸었다.
둘은 그림을 그리고 있었다. 테이블에는 종이 몇 장이 어지럽게 놓여 있었다. 색깔 펜으로 로봇 그림을 그리던 찬혁이가 갑작스레 내게 물어보았다.
"근데 누나는 여기 왜 왔어? 정상인데."
뭐라고 대답해 줘야 할까. 순간 말문이 막혔다. 그러면서 한편으로는 '정상'이라는 말이 머릿속을 계속 맴돌았다. 이곳에 환자로 와 있는 일이 '정상'은 아닐 텐데. 하고 생각하면서도 내가 지금껏 정의했던 '나'는 한 번도 정상인 적이 없었기에, 다른 사람의 입을 통해 듣는 그 단어가 낯설었다. 정상 범주에 들지 않는 사람에게는 비정상이라는 말을 하지만, 정상 범주에 드는 사람에게는 정상이라는 말을 하지 않는 것이 당연시되던 세상이었는데. 그래서 내가 나를 비정상이라고 정의한 그런 오류가 계속해서 남아 있었던 건데. 처음으로 '정상'이라는 말을 듣는 건 너무나도 새로웠다. 그리고, 조금 기뻤다.
어떻게 대답해야 이 친구가 납득할까. 생각하다 그냥 두루뭉술하게 대답했다. "응. 그냥 여기서 좀 쉬다 가려고 왔어." 잠시 나를 쳐다보던 찬혁이가 다시 그림에 눈을 고정하며 말했다. "나는 여기 두 번째야."
궁금했다. 대체 왜?
"찬혁이는 여기 뭐 땜에 왔어?"
"나는 ADHD야."
"ADHD 때문에 왔어?"
"응. 누나는 처음이야?"
"나는 처음이야."
"어떤 입원이야?"
"응?"
질문을 이해하지 못해 머뭇거리는 순간, 잠시 나와 정수기에서 물을 떠 가던 유빈 언니가 병실로 돌아가며 다시 나를 끌고 들어갔다. 언니에게 질문을 하려 했지만 유빈 언니는 안에서 얘기해 주겠다고 했다. 병실 침대에 다시 앉아 언니에게 물었다.
"언니, 아까 찬혁이가 무슨 입원이냐고 묻던데, 그게 무슨 뜻이에요?"
"여기 입원하는 경우는 자의입원, 동의입원, 응급입원 뭐 이런 방식이 있는데 어떤 입원인지 묻는 거야."
"찬혁이는요?"
"걔는 응급입원. 경찰이 와서 입원시켰나 봐."
"......"
"걔는 이번이 두 번째 입원이래. 부모님도 포기하신 것 같아."
"ADHD 때문에 두 번 입원한 거예요?"
"ADHD 영향도 없진 않겠지만, 밖에서 사고를 좀 많이 치고 다닌 것 같던데."
"아. 그럼 저는 무슨 입원이에요?"
"잘은 모르겠는데... 응급실 통해서 입원했으면 응급입원 아닐까?"
(실제로는 보호자와 본인이 동의해서 동의입원이었다)
"그렇구나. 근데 제영이는 여기 왜 왔대요? 혹시 학대당하거나 그랬던 건 아니죠?"
"나도 잘 모르겠어. 찬혁이는 떼도 쓰고 말썽도 부리고 여기 왜 와 있는지 좀 알 것 같은데 제영이는... 애도 너무 착하고 부모님한테도 사인펜 갖다 달라고 전화도 하고, 너무 밝고 예쁜 애라서 진짜 이유를 짐작도 못하겠어."
"물어봤어요? 왜 왔는지?"
"물어봤지. 근데 대답을 안 해 줘. 얘기하기 싫은가 보지 뭐. 더 이상 캐묻지는 않았어."
다시 병실 밖으로 나갔다. 제영이와 몇 마디 대화를 나누어 보았다. 유빈 언니 말대로 정말 밝고 착한 아이였다. 나를 알게 된 지 얼마 되지도 않았는데 곧 나를 편하게 대했고, 말도 초등학교 4학년 남자아이라고는 짐작도 하지 못할 정도로 고운 말만 사용했다. 유빈 언니가 찬혁이와 제영이 둘이 있는데 제영이만 더 예뻐해 주는 이유를 알 것 같았다. 잠깐 제영이와 함께 놀다가 슬며시 물어보았다.
"근데 제영인 여기 왜 왔어?"
"음..."
제영이가 잠시 뜸을 들이다가 씩 웃었다. 혹시 제영이가 여기가 어딘지도 모르고 온 건가? 너무나도 순수한 표정을 보니 어쩌면 그럴지도 모르겠다는 생각도 들었다.
"제영이는 여기 왜 오게 된 건지 알아?"
"응."
"왜 오게 됐어?"
"밖에서 사고 쳐서."
더 이상은 말해 줄 생각이 없는 듯했다. 따로 놀잇감을 챙겨 오지 않은 탓에 심심해하던 둘을 데리고 그림 맞추기 놀이를 했다. 한 사람이 단어를 적으면 다른 사람이 그것을 그림으로 그리고 마지막 사람이 그것이 무엇인지 맞추는 게임이었다. 내가 맞추는 역할이었다. 게임 캐릭터를 못 맞추니 둘이 잠시 속닥거리더니 좀 더 쉬운 문제를 냈다. 포켓몬스터의 등장인물(?)이나 유튜브 채널 이름 등이 그런 경우였다. 제영이와 찬혁이는 나이보다 더 순수했다. 둘이 떠들고 노는 모습을 지켜보다 보니 시간이 생각보다 빨리 흘렀다. 환하던 창밖이 어느새 조금씩 어둑어둑해지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