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 병동에서의 첫째 주
합법적으로(?) 1인실 사용
아침부터 간호사 선생님께서 병실로 들어와 안정제 수액을 제거하셨다. 어제와는 다른 선생님이셨다. 선생님께서는 이어서 혈압, 체온, 심박수, 산소포화도 등을 체크하시고 기록용지에 기록하셨다. 그리고 어제 응급실에서 했던 여러 검사 중에 독감이 양성이 나와서 이번주는 1인실에 있어야 할 거라고 하셨다. 독감으로 인해 다른 환자들과 불가피하게 격리하는 거니까 1인실 비용은 1일 30만 원대에서 2~3만 원대로 낮아질 거라고도 말씀하셨다.
아무런 증상이 없었지만 그래도 혹시 모른다며 새로운 수액을 달아 주시고, 타 환자들에게 감염 위험이 있으니 방 밖에 나갈 일을 최소화하라고 하셨다. 1인실에는 화장실이 딸려 있어서 크게 불편할 일은 없어 보였다.
오전 7시 반을 넘어가니 밖에서 다른 환자들의 인기척이 느껴졌다. 병실 문에 난 창문으로 환자복을 입은 사람들의 실루엣이 가끔 보이곤 했다.
닷새 동안 1인실을 사용했다. 어떨 때는 인기차트에 올라 있는 노랫소리가 들렸고, 사람들이 줄지어 걷는 모습이 보였다. 또 어떨 때는 난데없이 국민체조 영상의 음성이 들렸다. 어떤 할머니가 갑자기 병실 문을 벌컥 여시고 "야야, 니도 나와서 좀 걸어라. 답답하겠다."라고 말씀하셔서 당황하기도 했다. 닷새 동안 두 번 정도 조무사 선생님께서 간식 신청할 건지, 그리고 차모임 하는데 마시고 싶은 음료 있는지를 따로 물어보았다. 상황이 어떻게 돌아가는지 감도 잡히지 않아 이해가 가지 않는 질문엔 모두 괜찮다고 답했다.
입원 다음 날부터 주치의가 배정되었다. 젊은 여자 선생님이셨다. 전공의라고 하셨는데 몇 년차인지는 알려 주시지 않았다. 그러나 지난번에 응급실에서 만났던 교수님께서 회진을 돌 때 함께하는 다른 레지던트 선생님들을 보면, 주치의 선생님이 꽤 높은 연차라는 생각이 들었다. 다른 분들이 주치의 선생님을 좀 어려워하는? 분위기랄까. 동료라기보다는 선배로 대하는 듯했다.
주치의 선생님과 매일 면담을 했다. 나에 대한 이야기를 해야 했다. 그때까지 나라는 사람을 드러내 보일 기회가 없었기 때문에 많이 당황하기도 했고 자꾸만 말이 꼬여 버벅대기 일쑤였다. 여러 이야기를 했는데, 그중 한 장면이 기억에 남았다.
-제가 쌓아온 것들이 모두 무너질 것 같아요.
그러자 선생님께서는 이렇게 대답하셨다.
-이미 무너졌어.
이상하게 그 말이 위로가 되었다. 알고는 있었지만 인정하지 못해 계속해서 회피하던 나의 상태를 객관적으로 짚어 준 그 한 마디가 인상 깊게 다가왔다.
그 후부터 조금 더 솔직한 이야기들을 꺼낼 수 있게 되었다.
입원 후 처음 1주일간의 기억은 또렷하지 않다. 드문드문 기억이 끊겨 있고 세부적인 사항은 흐릿하다. 주치의 선생님과 나눈 대화도 대부분 기억나지 않는다. 하지만 위의 말을 듣던 순간만큼은 가장 또렷하게, 명확하게 남아 있다.
1인실 생활 동안 하루 30분 정도 면담을 하고, 언제였는지는 잘 모르겠지만 두 시간 정도 심리검사를 받고, 나머지 시간은 아무것도 하지 않으며 보냈다. 간호사 선생님이 혼자 있으면 심심할 수 있다며 책을 가져다주셨지만 읽지 않았다. 전혀 답답하지 않았고 전혀 심심하지 않았다. 학교에서의 '쉬는' 시간이나 '휴'일 과는 다르게 사회적 '나'를 내려놓은 채 쉴 수 있는 시간이었다.
1인실에 있는 동안 어릴 적 책에서 우연히 읽은 소 카토의 명언이 떠올랐다.
"인간은 아무것도 하지 않을 때 가장 생산적이며, 혼자 있을 때 가장 덜 외롭다." 초등학교 3학년 때였나. 그때 읽었던 구절은 이상하리만치 강하게 기억 속에 남아 있었다. 그 당시에도 저 명언이 마음에 든다고 생각했었다.
-이해도 못하면서 왜 저 명언을 좋아했지.
이런 생각을 하다가
-아기들이 발화가 안 된다고 해서 말을 못 알아듣는 건 아니니까. 나도 그 뜻을 완벽히 이해하지는 못했더라도 본성적으로 저 명언에 담긴 느낌을 파악했던 게 아닐까.
이런 생각도 했다.
아무튼 중요한 것은, 열여덟 살의 나는 이제 그 명언을 이해할 수 있다는 점이었다. 지금껏 읽어 온 수많은 책들의 내용을 다시금 떠올려 보았다. 아이가 어른이 되려면 그 과정에서 겪는 고통은 필수라던, 같은 뜻을 가진 다른 모습의 활자들. 허탈했다.
나비가 애벌레 시절을 아름답게 회상하려면, 결코 다시 그 시절로 돌아가지 않을 거라는 확신이 전제되어야 가능하다. '아프니까 청춘이다, 어른이 되기 위한 성장통' 이런 말들은 애벌레에게는 적용되지 않는데. 행복한 어른들도 어린 시절 힘든 순간에는 이런 말들을 듣기 싫어했을 텐데. 대체 왜 아이들을 위한 조언이랍시고, 고통 속에서 살아가는 사람들을 위한 격려랍시고 그런 말들을 하는 걸까?
도서관 서가에 꽂힌 수많은 에세이들. 나는 그중 파스텔톤의 표지, 시라고 해도 믿길 정도로 적은 분량의 글, 연약한 분위기의 필명을 포함한 에세이를 가장 싫어한다. 위로는 그 의도가 비치는 순간 퇴색한다. 작가 본인의 이야기는 꽁꽁 숨기면서, 힘든 사람들에게 어쭙잖은 위로를 던지는 그런 싸구려 글 따위는 쳐다보기도 싫다.
작가의 경험을 담은 진솔한 글, 어떤 순간을 살아 본 이의 경험 한 줌이 진짜 위로가 된다고 생각한다. 알맹이가 빠진 '있어 보이는' 글을 쓰는 사람들은, 그들의 글로 인해 독자들 중 일부를 더 깊은 어둠 속으로 몰아넣을 수 있다는 사실을. 그런 글로 인해 자신감을 키우기는커녕 남들과 스스로를 비교하게 되거나 강인하지 못한 자신을 탓하는 사람들이 있다는 사실을. 정말 모르는 걸까,
입원 후 일주일간은 그런 생각들을 했다. 그런 글을 쓰는 작가들을 만나게 된다면, 반사회적인 날라리로 보일지라도 그것에 대해 따지고 싶다고. 가장 중2병적인 말로 반항하고 싶다고.
-네가 뭘 알아?
-나한테는 내 인생이 제일 대단해.
-이해한다고 하지 마. 위로 따위 듣고 싶지도 않아. 내가 제일 힘들고 불행한 사람이야. 넌 이해 못 해. 절대로.
-내 감정마저 침범하려 하지 마. 네가 뭔데?
지금껏 읽은 가벼운 문장들을 하나씩 하나씩 구겨 버렸다. 나의 일부가 될 뻔했던 그것들을 떼어 냈다. 소 카토의 명언처럼, 아무것도 하지 않으며 가장 생산적인 일을 했다. 일주일은 빠르게 지나갔다. 다음 주에는 다인실로 옮겨야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