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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망고 Jan 09. 2025

사계절 중 하루

그래도 가장, 나은 계절은 언제일까

내 생일은 겨울이다. 수도 없이 죽고 싶단 생각을 했지만 그래도 가능하다면 겨울에 죽고 싶었다. 어차피 이기적인 선택을 할 거, 조금이라도 남아 있는 가족들에게 피해를 덜 끼치는 계절이 언제일까. 종종 생각해 보았다.


생일날 자살하면 남겨진 가족들이 내 생일에 한 번, 기일에 한 번. 일 년에 총 두 번 평소보다 더 슬퍼지는 날을 하루로 줄일 수 있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었다. 아주 가끔씩 내 안에서 이런 생각들을 비판하는 목소리가 들리곤 했다.

'네가 그냥 살아 있으면 가족들이 슬퍼하는 날이 제로가 되잖아?'

'진정으로 가족들을 위하는 방법을 네가 잘못 짚고 있어.'

알고 있었다. 아무리 비정상적인 사고에 사로잡혀 허우적거릴 때라도 그 사실을 완전히 잊지는 않았다. 그것이 내게는 너무나도 흐릿하게 보인다는 것이 문제였다.


무언가가 예상대로 흘러가지 않을 때 나를 탓했다. 나밖에 탓할 사람이 없었다. 단 한 번도 빼놓지 않고 우울이 그 뒤를 이어 나를 잠식했다. 절망으로 이루어진 파도가 멀리서부터 밀려왔다 한순간 들이닥치며 내게서 희망을 낼름 빼앗아가는 주기가 점점 짧아졌다. 언젠가부터 감정에 인과관계를 매길 수조차 없었다. 혼란스러웠다. 어떻게 해야 할지 매일이 막막했다. 그래서 또 좌절했다. 모두 내 탓이라고 자책했다.


나 스스로를 가장 미워하면서도 내겐 나 자신이 우선이었다. 가족들이 슬퍼하고 고통받을 걸 알면서도 당장 내가 겪는 정체 모를 아픔에서 벗어나는 것만이 중요했다. 죽음을 향한 기형적인 갈망은 시간이 흐를수록 점점 굳어 갔다. 죽음에 대한 막연한 두려움이 이제 이 모든 걸 끝낼 수 있다는 희망으로 변색되어 갔다. 딱 한 번만 이기적으로 행동할게요. 진짜 마지막이에요. 가족들의 얼굴을 볼 때마다 마음속으로 똑같은 말을 반복했다.


한겨울에 긴팔 티셔츠 하나만 걸치고 밖으로 나갔다. 분명히 나무는 세차게 흔들리고 있었지만, 아무런 추위가 느껴지지 않았다. 길가에 서서 거리를 지나가는 사람들을 바라보았다. 대부분 두꺼운 겉옷을 꽁꽁 싸매고 종종걸음으로 걷는 중이었다.


얼마나 그렇게 서 있었을까. 수많은 사람들 가운데 누군가가 "춥다" 라며 투덜대는 소리가 들렸다. 넋을 반쯤 놓고 있어서 누구의 불평이었는지는 전혀 알 수 없었다. 하지만 시끌벅적한 자동차 소리, 오토바이 소리, 사람들의 대화소리 가운데서 유독 그 작은 불평 한 마디가 몇 배는 크게 증폭되어 내게 도달했다.


-'춥다' 라니......

-겨울이면 추운 게 당연하지.

그런가. 당연한 사실조차 순간 받아들이지 못했다. 겨울은 춥다. 추우니까 겨울이다. 그렇다면, 내가 겨울에 죽는다면, 남겨진 가족들에게는 안 그래도 추운 겨울이 남들보다 두 배는 더 춥게 느껴지겠네.

갑자기 웬 사고의 비약이지. 싶으면서도 그럴 수 있겠다고 생각했다. 겨울은 춥지. 그걸 왜 잊고 있었을까? 태어나서 지금까지 열일곱 번의 겨울을 경험했으면서도.


남은 사람들에게 몇 배는 추운 겨울을 남기고 가고 싶진 않았다. 겨울은, 추위는 죽은 사람이 아니라 살아 있는 사람들에게만 하얗게 달려드니까...

겨울엔 절대 죽지 않겠다고 다짐했다. 봄이나 여름이나 가을이나. 겨울만큼 춥지 않은 계절에 떠나야지. 그런 생각으로 겨울을 보냈다.


봄에서 여름으로 막 넘어갈 무렵, 세상이 초록빛으로 반짝였다. 4월의 어느 날 지금껏 가운데 가장 죽음에 근접했다. 그리고 부모님에게 현장에서 바로 발각되었다. 다시 병동에 입원했다. 그렇게 봄이 완전히 지나갔다.


나 자신이 무서웠다. 남은 2024년을 겉으로는 별 일 없이 보냈던 건, 그저 운이었을 뿐이다. 그 운은 남들에겐 행운이었을지라도, 내겐 불운이었다. 열여덟 번째 겨울을 맞이한다는 현실은 결과적으로 여러 번의 시도가 모두 실패로 돌아갔다는 사실의 방증이었으니까.


어제 눈이 내렸다. 눈이 잘 내리지 않는 지역이라 동네 꼬마들이 눈사람을 만드느라 부산했다. 오늘 저녁까지도 올망졸망한 눈사람은 녹지 않은 채 형체를 잘 유지하고 있다. 눈이 빨리 녹기를 바랐다. 어서 겨울이 지나갔으면 했다. 그러면서도 눈이 녹을까 봐 두려웠다. 다시는 눈이 녹지 않기를 바랐다.


내 정확한 마음은 나도 모르겠다. 어쩌면 내가 눈이 되고 싶은 것일지도 모른다. 한여름에도 녹지 않는 흰 눈이 되어, 나와 비슷한 친구들을 잠깐이나마 막아서고 싶은 게 아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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