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도 무섭다.
어둠 속에서 오래도록 들려오던 소리가 있다.
"악마야, 물러가라!"
인간들은 빛을 손에 쥐고, 성수를 뿌리며 우리를 내쫓으려 했다. 그들의 눈에는 우리가 공포의 대상이었다. 그림자 속에서 속삭이며 그들을 타락시키고, 욕망을 자극하는 존재.
우리는 그들을 유혹했고, 그들의 가장 깊은 곳에 잠들어 있는 욕망을 일깨웠다. 질투, 분노, 탐욕, 교만...인간들은 우리의 속삭임에 쉽게 무너졌고, 우리는 그 에너지를 양분 삼아 살아왔다.
그리고 때로는 아주 순수한 영혼을 타락시키기 위해 애썼다. 왜냐하면 그런 영혼이 타락할 때 들어오는 에너지는 우리가 가장 원하던 것들이었으니까. 오랜 시간 동안 우리는 인간들을 유혹하며, 그들을 타락시키는 역할을 해 왔다.
하지만, 이제는 달라졌다.
우리는 도망쳐야 한다.
어느 순간부터, 인간들은 우리 없이도 스스로 타락하기 시작했다. 아니, 정확히 말하면 우리가 유혹하는 것보다 훨씬 더 창의적인 방식으로 스스로를 파괴하고 있었다.
인간들은 더 이상 유혹의 속삭임을 기다리지 않는다. 그들은 우리보다 더 교묘하게, 더 치밀하게, 더 잔혹하게 악을 창조한다.
우리가 계획을 세우고, 한 인간을 서서히 타락시키기 위해 몇 년씩 공들일 때, 인간들은 단 몇 초 만에 누군가의 인생을 무너뜨린다.
어느 날, 한 악마가 이렇게 중얼거렸다.
"이건 우리가 한 게 아닌데?"
우리는 더 이상 인간들을 유혹할 필요가 없다. 그들은 스스로 타락하고 있었고, 그것도 우리가 상상했던 범위를 훌쩍 넘어선 방식으로.
과거에 우리는 인간들에게 속삭였다.
"그를 미워해라."
"욕망을 따라가라."
"복수를 하면 속이 시원할 거야."
하지만 이제 인간들은 스스로 더 깊이 어둠 속으로 걸어간다. 전쟁터에서 서로를 잔인하게 죽이며, 탐욕에 빠져 세상을 불태우며, 끝없는 경쟁 속에서 서로를 짓밟는다.
우리는 고개를 갸웃거렸다.
"우리도 이 정도로는 안 했는데?"
한 악마는 인간이 만든 장면을 보고 놀라 주저앉았다. 폐허가 된 도시, 불타는 숲, 울부짖는 아이들, 그리고 피투성이가 된 거리. 그 장면 앞에서, 우리는 한동안 아무 말도 할 수 없었다.
"이건... 우리가 한 일이 아니야."
"이건 우리보다 더한데?"
"우리가 계획한 타락보다 더 무섭잖아."
악마들은 서로를 바라보았다. 우리는 인간을 타락시키는 존재였다. 하지만 이제는...
우리조차 인간들이 무섭다.
어느 날, 가장 오래된 악마가 말했다.
"우리는 여태껏 인간들을 속여왔다. 하지만 이제는 우리가 속고 있는 게 아닐까?"
그 말에 모두가 침묵할 수 밖에 없었다. 인간들은 우리가 없는 곳에서도 더 큰 악을 만들어냈다. 그것도 아주 자연스럽게, 당연하다는 듯이.
"이제 우리가 떠나야 할 때가 왔다."
우리는 더 이상 인간들에게 속삭이지 않는다.
우리는 더 이상 인간들을 유혹하지 않는다.
우리는 이제 그들을 피해 숨는다.
우리는 악마다. 하지만, 이제 우리는 인간들이 두렵다.
그러니 마지막으로 우리가 외칠 수밖에 없다.
"인간아, 물러가라!"
이제 우리조차 이렇게 말할 수밖에 없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