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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간이라는 깡패

ㅡ서머싯 모옴, <레드>

by 지얼 Dec 24. 2024


20대 시절에 영화 <타이타닉>을 잠실 소재의 롯데월드 시네마에서 봤다.

초딩 여학생 두 명과 함께.

모 피아노 학원에서 기타를 가르치던 시절이었다.

"쌤, 영화 보여줘요."

피아노 학생이었던, 뽀얀 얼굴에 빛나는 머릿결의 단발머리를 하고 금테 안경을 낀 조현(가명) 양이 어느 날 내게 말했다. "타이타닉 보고 싶어요."

그래서 조현 양의 친구와 함께 이 영화를 보게 되었는데, 아뿔싸.


에로씬이 나올 줄이야


비슷한 시기에 이태원의 한 클럽에서 20대 처자들과 술을 마시는 도중, 예상도 못했던 한 스트립걸의 나체쇼에 당혹해했던 기억이 난다. 보고 있자니 처자들로 하여금 저질 변태 취급을 당할 것 같고, 부러 안 보자니 내숭 떠는 것 같고.

그리하여 나는 중도를 실천하였다.

일별. 아니, 어쩌다 힐끗힐끗 보기.


초딩 여학생과 에로씬을 보는 것만큼 곤혹스러운 것도 없다. 얘들아, 저거 그런 거 아니야, 쟤네들 지금 너무 추워서 서로 체온을 나누고 있는 거야, 뭐 이럴 수도 없고.

별 수 있나. 한쪽만 실눈을 뜨고 자는 척이나 할 수밖에.

(개 한심....)




잠시 계산을 해 본다.

타이타닉이 개봉했던 것은 1997년.

초딩 6학년이면 13살이니 작금에 그녀는....

마흔 살이다

허걱.

마흔이라니.

엊그제 초딩이가 어째서? 

타이타닉이 아니라 에로 영화 <깨어나니 도련님>을 같이 봐도 부끄럽지 않을 나이가 아닌가...

... 하는 생각 직후에 찾아온 현타.

저 늙은 줄은 모르고(아니, 어쩌면 알면서도 부러 외면하고) 남들 나이 먹은 것에 화들짝 놀라는 꼴이라니. 마치 <인터스텔라>의 주인공 쿠퍼가 할머니가 되어버린 자신의 딸을 바라보는 것처럼.


영화를 보면 사건이 진행되다가 불현듯 영상에 써놓은 <30년 후>라는 글귀와 함께 세월을 대폭 건너뛰는 장면을 자주 접하게 된다. 혹자에 관해서는 인생도 이런 느낌이다. 중간 과정이 뭉텅 잘려나간 듯한, 예컨대 옛 연인과 재회했을 때의 이질감이랄까. 뭐지? 내가 얘를 잘 아는데, 통통하고 귀여웠던 모습은 어디 가고 이 개뼉다귀 같은 형상... 아니, 모습은 대체....

얼마 전에 제자였던 한 처자와 6년 만에 재회했을 때 그녀가 내게 이렇게 말했다. “예전에는 마르셨는데…” 살찌는 점진적 과정이 생략되었으니 낯설 수밖에. 6년이 아니라 20년이었다면 아마도 이랬을 수도.


누구세요?



서머싯 몸의 단편소설 <레드>는 아마도 시간이 파괴하는 젊음과 그에 따르는 사랑의 유한성, 아니 절연을 말하는 소설일 것이다. 선원인 젊은 훈남 ‘레드’는 어느 섬에 당도하여 그곳의 원주민 처녀인 ‘샐리’와 사랑에 빠진다. 그러던 어느 날, 포경선의 한 선장에 의해 강제로 납치되어 섬을 떠나게 되고…. 그 후 오랜 세월을 샐리는 눈물과 기다림으로 보낸다.
생각나는 노랫말이 있다. 우리에게는 <연가>라는 제목으로 알려진, <Pokarekare Ana>다.  

와이아푸의 바다에는 폭풍이 치고 있지만

그대가 건너갈 때에는 잠잠해질 거예요


그대에게 편지를 써서 반지와 함께 보냈어요

내가 얼마나 괴로워하는지 사람들이 알 수 있도록


제 사랑은 절대 마르는 날이 없을 겁니다.

언제나 젖어 있을 테니까요.

제 눈물로 말이에요


그대여 내게 다시 돌아오세요

너무나 그대를 사랑하고 있어요


https://youtu.be/fjTGRb_3EZc?si=vwHSNoFJ0_lj-4iV

Pokarekare ana



초딩이 소윤(가명) 양은 그림에 소질이 있다. 그래서 올 때마다 학원 벽에 걸려있는 화이트보드에 나를 소재로 그림을 그리곤 한다. 제목은 대충 이렇다. ‘너무 가난하여 자연인 생활을 하는 쌤’, ‘(못생겼다는 이유로 여자에게) 버림받은 쌤’ 등. 내가 따졌다. 

“야! 나도 한 때는 인기짱남이었어!”
“뻥까지 마세요.”
“뻥 아니거든? 너도 나이를 먹어봐. 그럼 지금처럼 예쁜 상태로 있는지.”
“흥, 그건 쌤한테나 그렇고요, 저는 안 그럴 거예요”
그리하여 증명을 위해 유튜브 채널 중 유명인의 변천사를 보여주기로 한다. 그중에 소피 마르소의 리즈 시절부터 작금의 모습을 시간에 경과에 따라 나열한 영상을 선택하여 소윤 양에게 보여주었다.
“봤지? 어떠냐? 소피 마르소 이 언니도 소싯적엔 무진장 예뻤잖아? 그런데 지금의 모습을 봐봐…. 늙는다는 것은 이런 것이야.” 그랬더니 그녀가 하는 말이,
“이 아줌마는 젊을 때 예뻤으니까 지금도 예쁜 거예요. 쌤은 젊었을 때도 못생겼으니까 지금도 못생긴 거고.”
표본을 잘못 잡았다. 소피 마르소는 시간의 파괴력을 증명하기에는 예외적인 존재였나 보다.



신 X원 초딩이 그림



이하 스포일러 주의.
하지만 세월이 할퀴고 간 레드는 더 이상 젊지도 않고 훈남도 아닐뿐더러 외려 추하기까지 하다. 그건 소피 마르소의 레벨까지는 미치지 못한 샐리도 마찬가지다. 그들은 결국 재회하지만…서로를 알아보지 못한다.

[… 긴 세월 동안 샐리가 사랑하며 그토록 애타게 기다리고 있던 남자가 바로 저 사람이란 말인가?(…) 속았다. 완전히 속았다. 실제로 두 사람은 재회했으면서도 서로가 서로를 알아보지도 못하지 않았던가? (…) 모든 게 신들의 장난이었다. 어느새 그들에게 남은 것은 늙은 모습뿐이었다.]


 <타이타닉>을 보면서 그런 생각을 하게 된다. 잭(레오나르도 디카프리오)이 죽지 않았으면 이후 로즈(캐이트 윈슬렛)와 결혼했을까? 결혼한 이후의 그들 삶은 어쩌면 영화 <레볼루셔너리 로드>의 프랭크(레오나르도 디카프리오)와 에이프릴(케이트 윈슬렛)의 그것이 아니었을까?
 
 “…스물다섯 살이라면 어리석은 감상에 젖어들 나이이지요. 그런데 생각해 보니 인간은 오십이 되어야 비로소 현명해지는 것이 아닌가 싶어요.”
 “…. 정신이 성숙해지면 인간은 에덴동산을 잃어버릴 수밖에 없으니까요.”

서머싯 몸은 작중 화자를 통해 이렇게 말했다. 혹자는 이렇게 바꿔 말하고 싶으리라. 늙으면 인간은 에덴동산을 잃어버릴 수밖에 없다고. 

에덴동산을 상실한 인간은 이렇게 말한다. <타이타닉>에서 잭과 로즈의 사랑이 영원한 것은 내면이든 외면이든 사랑의 노화를 겪지 않았기 때문이라고. 대개의 경우 세월은 외관은 물론 마음마저도 풍화시켜 버린다고. 
 
 “그 레드와 샐리의 슬프고 열렬한 사랑을 이제 와서 돌이켜보며 나는 생각한다오. 사랑의 눈금이 최고조로 달했을 때 두 사람을 영원히 헤어지게 한 잔인한 운명에 대해 그들은 오히려 감사해야 하지 않을까 하고 말이오. 그들은 고뇌에 찬 삶을 보냈을 거요. 그러나 그것은 아름다운 고통이었소. 사랑의 진정한 비극이 뭔지 알지 못한 채 헤어졌으니 말이오.”

“사랑의 비극은 결국 죽음도 이별도 아니란 말이오. 그 두 사람 중 어느 한쪽이 상대를 사랑하지 않게 되는 날이 언젠가 오리라는 것을 생각해 본 적이 있었을까요? 지난날에는 하루만 만나지 않아도 견딜 수 없을 만큼 사랑했던 여자를 지금은 다시 만나지 않아도 아무렇지 않다면 그야말로 그보다 더 무서운 비극은 없소. 사랑에 있어 진짜 비극은 무관심입니다.”
그리고 그 비극을 초래하는 것은 시간이라는 깡패일 것이다. 작가 제니퍼 이건이 말한다.

"시간은 눈앞에 버티고 선 깡패단이고, 너무도 바쁜 우리는 그 존재를 인식하지 못하다가 부지불식간에 알아차리게 된다."



길을 가는 도중, <타이타닉>을 같이 보았던 초딩이 조현 양… 아니, 아주머니 조현 씨와 우연히 맞닥뜨리게 된다. 알은척도 없이 스쳐 지나가는 순간, 신께서 왕림하신다.
”야! 지나가는 저 여자, 너랑 타이타닉을 같이 보았던 조현 양이야. 몰라?”

내가 대답한다. 

“앗! 혹시나 했는데 역시 그녀였군요…. 그런데 대체 왜 그녀는 나를 알아보지 못한 걸까요?

신께서 대답하신다.


거울 좀 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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