거창하지 않은 아주 사소한 시작
나는 웨이트만 주야장천 파던 10년 차 헬스광인이었다. 취향을 말하자면 내 박자에 맞춰서 하는 운동을 좋아하며, 과하게 숨이 차서 헐떡이는 액티비티 한 운동을 별로 좋아하지 않았다.
그런 내가 갑자기 왜 러닝을 시작하게 되었냐면, 정말 사소한 계기 때문이었다.
처음 러닝을 뛰게 된 건 가까운 사람과의 인연을 마치고 나서였다.
변명의 기회조차 주어지지 않은 채로 끝났던 관계는 내게 뒤끝이 길게 가는 억울함을 남겼다. 어찌나 억울하던지 밤에 잠도 잘 안 왔다.
그러다 보니 눈을 뜨고 있는 시간이 길어졌다. 친구들에게 돌아가며 전화를 걸며 내 심심함을 달래 달라 떼를 썼다. 모두를 얼마나 귀찮게 했던지, 보다 못한 친구 하나가 내게 말했다.
"야 너 할 거 없으면 나가서 뛰기라도 해. 힘이라도 빼! 피곤하면 잠이 오겠지!"
처음에는 들은 척도 안 했다. 근데 일주일이 이주가 되고 몇 달이 지나니 그렇게 무료할 수가 없었다. 루틴이 되어버린 웨이트로는 이 이상 힘을 빼기는 어렵다는 결론에 도달했고 나는 남아도는 시간을 활용할 필요가 있었다. 그래서 그날 밤 무작정 운동화를 신고 집 앞 하천으로 나갔다.
나가자마자 무작정 달렸다. 한 1분 달렸을까? 세상에, 숨이 턱턱 막혔다. 운동 경력이 10년이나 되는 내가 고작 1분 만에 헉헉거리다니! 자존심에 스크래치가 났다. 그리고 자극된 승부욕은 나를 못 멈추게 만들어줬다.
미친 듯이 펌프질 하는 심장소리가 귀에서 느껴졌다. 사실 심장이 귀에 있었던 게 아닌가 하는 생각을 하며 나는 계속해서 달렸고 뛰다 멈췄다를 반복했다. 그렇게 30분 정도 뛰다가 집에 들어갔나? 억울함이고 뭐고 졸려 죽겠더랬다. 무거운 다리를 이끌고 샤워를 한 뒤 나는 까무룩 잠이 들었다. 어떻게 보면 나름 성공이긴 했다. 잡념이고 뭐고 감기는 눈을 이길 수 있는 건 아무것도 없었으니까.
그다음 날 퉁퉁 부은 다리에서 강력한 통증이 느껴졌다. 정강이뼈 근처가 얼마나 아프던지. 나는 도무지 이 고통이 느껴지는 부위가 어딘지 알 수가 없어 검색창에 검색을 했더니 앞정강근이라는 부위었다. 이 날 느낀 고통은 오랜만에 처음 헬스했을 때 겪었던 근육통과 흡사할 정도로 아팠다. 고관절도 아프고 거의 10년 만에 느끼는 고통은 러닝에 대해 더 안 좋은 생각을 심어주기 충분했다.
나가서 뛰라고 하던 친구에게 전화를 걸었다. "나 죽을 것 같아." 며 아픈 앞정강근 얘기를 해주니 친구는 무슨 달리기를 그렇게 무식하게 하냐며 핀잔을 줬다.
그녀는 매일 크로스핏을 나가길 2년 차, 유무산소의 강자 미친 크로스핏터였다. 황당해하며 뛰는 것도 알아야 뛸 수 있다며 "옥상으로 따다와" 말고 "하천으로 따다와"를 시전 하는 그녀의 부름에 나는 그 주 주말 다시 고통의 하천으로 소환됐다. 무거운 다리 핑계를 대던 내게 나를 아주 잘 아는 그녀는 말했다. "쫄리냐?" 젠장. "아니거든!"
내 친애하는 크로스핏터 D는 잔소리가 많았다. 그리고 아는 것도 많았다.
차근차근 몸을 풀고 움직이지 않으면 다음날 지옥의 근육통을 마주할 수 있다고 한다. 어쩐지 그래서 내 다리가 그렇게까지 아플 수 있었던 거였다. 우리는 몸을 잘근잘근 나눠 목-어깨-허리-고관절-다리 순으로 스트레칭을 했다.
그리고 한 5분 정도 조금 빠른 속도로 걷고 천천히 발을 굴렀다. 먼저 용감하게 스피드를 올렸는데 D가 나를 멈춰 세웠다.
<크로스핏터 D 가라사대 >
러닝의 법칙 1. 고관절을 굴린다는 생각으로 가볍게 통통거리며 발로 지면을 밀어내야 한다.
러닝의 법칙 2. 대화를 할 수 있을 정도의 강도로 뛰어야 한다. 헉헉대면 안 된다.
이 두 개는 무조건 지켜야 한다고 내 엉덩이 뒤에서 쫓아오며 잔소리하는 D는 굉장히 무서웠다. 그런 그녀를 이길 수 있는 방법은 없었기에 얌전히 실천하는 수밖에 없었는데, 신기하게도 무한질주하고 멈추기를 반복했던 그날보다 걷는 것보다 조금 빠른 속도로 뜀을 지속하는 그날이 덜 힘들었다.
분명 시작할 때 우리는 3km만 뛰기로 했던 거 같은데 신나게 조금만 더, 조금만 더를 하다 보니 5km 지점을 통과하게 됐다. 집에 가는 지점인 5.8km에서 멈추니 땀을 말리는 시원한 바람이 짜릿하게 느껴졌다. 그리고 우리는 돌아가는 길에 캔맥주 하나씩 사들고 사이좋게 바닥에 주저앉아 먹었다.
결국 러닝을 뛰게 된 사소한 계기는 생각 비우기, 승부욕 자극하는 친구 두기 뭐든 다 맞긴 하지만 결국에는 '시원한 바람에 땀이 말랐을 때의 기억'이라고 할 수 있다. 정말 사소한 이유로 일단 발을 굴렀고, 뛰는 법을 배웠고 땀을 흘렸으며 이를 말려보았다.
작은 발딛음이 주는 쾌감은 실천한 거에 비해 더 컸다.
이 날 나는 다시 근육통을 얻었고 집 가는 길에 맞은 찬바람 때문에 감기도 걸렸다. 하지만 이 주 뒤, 어쩐지 답답한 기분에 나는 다시 하천에 나가서 뛰게 됐다. 뛸 때 귓가에서 맴도는 바람소리가 나를 진공상태에 가두는 것 같은 그 기분이 너무 좋았기에.
이 날 이후 나는 계속해서 뛴다. 매주 뛰고 있다.
별 다른 이유 없이도 그냥 뛴다. 우울할 때도 예민할 때도 기분이 좋을 때도 일단 뛰어본다. 그러면 달리기는 더 큰 즐거움을 내게 돌려주니까. 그리고 생각보다 달리기는 시간을 많이 잡아먹지 않는다. 분당 7분으로 뛴다면 5킬로를 뛰어도 30분 이내라는 것. 시간이 없는 현대인들에게 이만큼 효율적인 스트레스 해소법이 있을까?
그러므로 나는 일단 나가서 뛰어보는 걸 추천해 본다. '얼마나 좋았길래 이렇게까지 추천을 한다는 말이야?'는 생각이 당신의 사소한 계기가 되기를 바라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