산티아고 순례길의 힐링을 담은 전 아나운서의 에세이 (손미나)
산에 올라오면 이렇게 잠깐 서서 풍경을 감상할 여유를 갖곤 하잖아. 근데 인생을 살 때는 자기가 높이 오른 줄 모르는 것 같아. 계속 올라가려 하기만 하고 즐기지 못해. 이만하면 됐다 하고 멈추어서 자기가 있는 자리를 즐길 줄 아는 사람은 아주 드물지. 이 길이 끝난 후에도 이런 걸 기억하도록 노력하려 해.
왜 사람들은 그토록 고생스러운 길로 스스로 나서는 걸까? 산티아고 순례길. 많은 순례자들이 걷는 약 800km의 여정은 결코 가볍지 않다. 나 역시 순례길의 절반 정도 되는 400km의 국토대장정을 하고는 좋은 경험이었지만, 생에 딱 한 번이라 생각했다. 매일 물집으로 고생인 발과, 배낭을 멘 등 뒤의 지독한 땀띠로 무지하게 고생을 했었기에.
그런데, 몇 해 전 읽게 된 산티아고 순례길 여행 에세이를 보고 언젠가 꼭 가보고 싶은 곳이 되었다. 내 안에 숨겨져 있던 도전하고 싶은 마음이 스멀스멀 피어올랐다.
여전히 아나운서라는 타이틀이 가장 익숙하지만 손미나 작가님은 알랭 드 보통의 인생학교 서울 교장, 잡지사 편집인, 여행 작가, 번역가, 소설가, 크리에이터 등 수많은 직업을 가지고 있다. 스페인어를 공부하고 유학하며 스페인과 인연을 맺었던 작가님이 다시 스페인 산티아고로 떠나서 겪은 이야기들.
작가님 스스로에 대한 도전이었지만, 흔들리는 인생을 겪고 있는 수많은 우리에게 보내는 응원의 메시지를 한가득 담고 있었다. 말 그대로 힐링에세이였던 책.
유난히도 공감 가는 메시지를 잘 와닿게 정리해 준 작가님의 글 솜씨가 너무 매력적이었다. 힘들지만 하루하루 나아가는 그 길 위에서 만난 사람들은 사연들은 읽는 이로 하여금 위로를 한가득 받는 느낌을 주었다.
신체의 한계를 극복하고, 정신과의 싸움을 이겨내고 나면 받을 수 있는 카미노의 선물. 그 언젠가 나도 받을 수 있겠지? 한 번쯤 인생에 온전히 나에게 집중할 수 있는 시간을 위해 도전할 수 있는 날을 기대해 본다.
저자 : 손미나
출판 : 코알라컴퍼니
발행 : 2023.04.05.
목차
프롤로그. 어느 날, 그 길이 나를 불렀다.
1. 무모한 도전이었을까? / 피레네산맥
2. 바람과 별이 교차하는 곳 / 나바라
3. 그 길이 주는 선물 / 리오하
4. 카미노는 마음으로 걷는 것 / 카스티야 이 레온
5. 산티아고 길은 인생을 닮았다 / 갈리시아
6. 그 모든 순간이 나였어 / 산티아고 데 콤포스텔라
에필로그. 당신만의 보물을 발견하기 바라며
P.296
상황 탓, 컨디션 탓을 하다 보면 앞으로 나아가는 것도 불가능하고, 자연의 아름다움도 즐길 수 없다. 실패나 좌절이 두려워 멈추어 선다면 아무 일도 벌어지지 않고 아무것도 이룰 수 없는 우리의 삶처럼 말이다.
힘든 일을 겪으면 먼저 남 탓을 하게 된다고 한다. 남 탓, 상황 탓, 컨디션 탓. 그렇게 탓하다 보면 나 스스로만 불행해지게 된다.
힘든 것만 생각하면 주저앉게 된다. 아주 작은 힘이라고 발휘해서 조금이라도 나아간다면 주저앉아 버리는 것보다는 훨씬 나아질 테니.
때론 쉬어가더라도, 주저앉아 버리지는 말자. 시시각각 변화는 삶에 순응하면서 말이야.
산티아고 길, 그곳에서 무엇을 얻을지도 중요하지만 내가 지나간 자리엔 무엇이 남겨질까 하는 것도 반드시 생각해 보아야 하는 이유이다.
보통 어떤 행위에 대해서 내가 무엇을 얻을 수 있는지를 주로 생각하게 되는데, 지나간 나의 자리에 남는 것이 무언인지도 반드시 생각해 봐야 한다.
좋은 향기를 남기는 사람이 되고 싶다면, 적어도 나의 모습을 한 번이라도 더 살펴볼 테니깐.
정작 나는 잘하고 있는지, 괜찮은 모습인지조 차도 모르고 이득만을 쫓는 사람이 되고 싶진 않으니깐 말이다.
나에게 벌어져야 할 일은 나를 지나 치지 않을 거라는 거야. 내가 조바심을 내지 않아도 결국은 벌어지게 되어 있다는 거지. 과거는 이미 내가 알지만 바꿀 수 없고 미래는 알 길이 없으니 현재를 살아야 해. 그저 현재에 집중해 살면서 받아들이는 것, 그게 인생인 것 같아.
나에게 벌어져야 할 일은 나를 지나치지 않는다. 지금 내가 겪고 있는 이 고통과 슬픔 역시, 내가 조바심을 내지 않았어도 벌어질 일이었다는 걸. 되돌릴 수도 없고, 어떠한 미래가 올지 모르지만 지금 현재에 더욱 집중해야 하고 받아들여야 한다는 것.
벗어나려고 울면서 발버둥 치는 게 아니라 온전히 나의 삶의 일부로 받아들여야 함을 너무도 깨달았다.
그러니 원망과 비난보단 사랑으로 감싸 안아야겠다고 크게 마음먹어 본다.
인생에서든 순례길에서든 각자가 자기 선택에 책임을 지고 앞에 놓인 길을 즐겨야 한다. 가지 않은 길이 궁금하더라도 내 앞에 놓인 길에 집중하는 것이 행복의 비결이다.
내가 가지 않은 길이 가끔은 참 궁금하다. 더 많은 선택지가 있을 것 같고, 훨씬 더 많은 자유가 있을지언정 지금의 선택에 집중하고 만족하는 삶.
그래서 지금이 참 좋다.
원하지 않는 혹은 우리를 슬프게 하는 일들이 벌어졌을 때 끝없는 나락으로 곤두박질치는 대신 그런 일이 우리 삶에 존재하는 것이 당연하다는 사실을 겸허하게 받아들일 수 있어야 한다. 중요한 것은 슬픔을 그저 짙은 슬픔으로만 묻어 두는 대신 다른 빛깔의 옷을 입혀 간직하는 것이다.
감당하기 힘든 슬픔이 찾아왔을 때, 헤어 나올 수 없는 우울에 잠식되었을 때, 슬픔과 우울에 다른 빛깔의 옷을 입히는 방법을 연습하고 또 연습하다 보면, 분명 잘할 수 있을 것 같아.
- 잠시 멈추고 지나온 삶을 돌아봐야 할 시점 같은 게 오면, 혹은 깊은 내면에 있는 나 자신과의 조우를 위해 일생에 한 번쯤은 순례자가 되어 봐야 하지 않을까라는 생각을 갖고 있었다.
- 비가 내리면 빗속을 걷고, 태양이 뜨면 햇살을 맞고, 바람이 불면 온몸으로 막아내야 한다. 전진하기 위해서는 그것이 무엇이든 그저 버텨내야만 하는 것이다. 또 미끄러운 길에선 몸을 낮추고, 개울이 있으면 물에 빠질 각오로 건너는 수밖에 없다. 그저 내게 주어지는 것들을 받아들이고 시시각각 변하는 상황에 순응해야만 한다.
- 게다가 극한의 아름다움이 쉼 없이 이어진다. 예쁜 풍경이 하나 나타났다 사라지면 더 예쁜 게 나오고, 그걸 지나면 더 아름다운 마을이 또 나타나고... 산티아고 길, 대단하다 정말로!
- 매일 걷다 보니 체력도 좋아졌지만 세상을 보는 관점과 마음가짐이 달라졌음을 느낀다. 똑같은 일도 내가 어떤 태도와 시각으로 바라볼 것인가에 따라 완전히 다른 결과로 빚어질 수 있다는 진리를 산티아고 길 위에서 배웠다. 힘든 상황을 견디고 버텨내니 앞으로 나아갈 수 있었다는 사실을 일상으로 돌아가서도 기억할 것이다.
- 행복하다는 느낌과는 또 다른 충만감, 모든 것을 다시 얻은 듯한 기분이라고 해야 할까? 그리고 무엇이든 할 수 있을 것 같은 기분. 이것을 일종의 자신감이라고 할 수 있을까? 무엇이든 할 수 있고 무엇을 하든 별로 많은 것이 필요하지 않을 것 같은 단단함으로 온몸과 마음이 꽉 차올랐다.
- 세상의 시계를 내 걸음 속도에 맞춰 지내는 동안 천천히 사는 일이 주는 즐거움을 알게 된 덕에 조급함과도 이별할 수 있게 되었다. 무게를 덜어 내고 한층 가벼워진 삶은 마음에 커다란 자유를 안겨주었고, 단순한 목표 아래 매 순간을 음미하는 법을 알게 되어 사소한 기쁨을 누리는 것이 가능해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