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람 부는 날
바람 부는 날의 심상(心象)
- 김 중 근
기상관측 이래로 가장 뜨거웠던 지난 여름은 용광로같이 열기(熱氣)로 뜨거웠고, 작열(灼熱)했던 햇빛 또한 강열(强熱)해서 우릴 힘들게 했다. 폭서(暴暑)속으로 줄달음쳤던 여름의 발자국 소리도 어느듯 사라진지 오래다. 살며시 가는 가을은 언제나 다시 오기마련이지만, 이젠 슬며시 겨울로 접어든 느낌이다. 쏟아지는 가을 밤의 달과 별들의 반짝임에 설레임도 멀어져가니 마음도 심란(心亂)해진다.
오늘은 아침부터 회색 냄새 배인 바람이 불고 내게 보이는 것들은 암운(暗雲)을 향해 서서히 돌진하기 시작한다. 온통 먹칠한 구름이 바람치는 희미한 하늘을 덮는다. 맑은 날에도 심심찮게 심술을 부리더니, 내 마음까지 캄캄한 색으로 먹칠한다. 찬란한 태양이 빛날 그 아래, 구름엔 즐거움 대신(代身) 섧은 삶이 제 무게에 눌린다. 고통(苦痛)이 우리를 향해 소리치려 한다. 어제 밤 부터 맑은 날 푸른 하늘이 별안간 천둥 번개로 변하기 시작하려는 듯, 밖이 거친 바람에 요란하다. 검은 바람 부는 것이 마치 암흙과 절망의 늪에서 절규하고 몸부림 치는 듯 하다. 평온한 마음으로 아침을 맞으려했지만 뜨락 나뭇가지 사이에서 휘돌아치던 바람의 모습이 너무 사납기만 하다. 안간 힘으로 버텨온 마지막 이파리도 떨어지고 날린다. 오랫동안 내 뒤를 지켜보고있던 흙색 바람은 소리 부터 요란하다. 결국 온통 주위에 서러운 울음 바다를 만들고 내 심상(心象)에 더욱 뼈저린 상처만 남기고 휑하니 어디론가 떠난다.
비 바람이 치고 먹구름이 끼고 하는 것이 인간사(人間事)와 닮아있다. 뜻대로 늘 한결 같지 않다. 해와 달과 별빛과 함께 사는 사람은 암운(暗雲)과 암우(暗雨)를 볼 수 없지만 검은 바람에 놀라 숨을 곳을 찾는다. 문득 바라다본 산 넘어 능선(稜線) 위에 아침 해와 저녘 노을이 뜨고 지는 순간, 바람이 분다. 지난 여름 태양 빛이 너무 강해서 뜨거움 때문에 증발된 영혼들은 먹 구름이 되고 비 바람이 되어. 그 소리 또한 요란하다. 붉은 노을과 천상(天上)의 환희를 만들었던 빛은 암풍(暗風)에 섞여 날아간 듯 을씨년스럽다.
그 검은 바람이 부는 날은 해와 달과 별빛 조차 보이질 않고 암운(暗雲)만 하늘에 가득하게 떠다닐 뿐이다. 한편 문득 바라다본 수평선 넘어 검은 구름 아래로 젖은 안개 피어오르고 소슬한 바람이 불어대니, 마음은 기쁨과 즐거움 대신 어느새 남몰래 숨겨놓았던 고통의 눈물이 흐른다. 그동안 꽁꽁 숨겼던 애닯은 심정을 암풍(暗雨)에 섞어 날려보낼 수 있어 강변에 서서 큰 팔로 바람을 맞는다. 이런 날, 금강변 둘레길 강둑에 서있는 나는 시간이 정체된다.
하늘의 모습이 이렇게 천차만별(千差萬別)이듯 오늘 내 마음 바탕도 또한 이와 같은 탓으로, 마음이 탁해진다. 오늘같이 적당히 맑고 흐린 날! 소박하고 맑은 심성 대신 고통의 바람이 분다. 내 심상(心象)에 더욱 큰 상처만 더 할 뿐이다. 오늘은 내 가슴에 박혀있는 응어리를 빼내고 싶으리만큼 진한 소주를 마시고 싶다.
-2024년 11월 17일(일) 바람 부는 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