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 바람 몰아치는 날
가을 풍우(風雨)
- 김 중 근
긴 비 뒤에 거리의 은행나무는 또 다른 모습이다. 가을 비가 무거운 습기를 뿌리고간 탓인지 잔득 물을 먹고 겁먹은 나무들의 모습이 종전과는 영 다르다. 시퍼렇고 씩씩한 모습은 간데없고 찬 바람에 마음마저 움추려진다. 찬 비 지나고 찬 바람 부는 데.....
끊어질 듯하면서도 계속 이어지던 깊고도 맑은 은행나무의 매미 울음 소리가 마침내 끊긴지 오래지만, 매미 소리와 은행나무 훓고 지나는 바람 소리에 취해, 아직 나는 늘 애기 울음같이 애절하고 맑았던 청량한 소리 마음에 남아 있다. 그러나 은행나무 어디선가 울어대는 매미 울음 소리를 들으며 나만의 절차로 낮잠을 청했던 한 여름을 그의 마지막 오열 조차 듣지 못하고 보냈다. 내가 아주 어렸을 때부터 익숙해진 매앰~맴 소리가 왜 그리도 좋았던지. 툇마루 위 대나무 돗자리에서 한 여름 꽃과 별을 매달고, 더럽혀진 귀와 눈을 씻어내곤 했다. 시름으로 가득 찬 잡념들을 내 뜨락의 청청(淸聽)한 기운으로 대신 채워서 다시 힘차게 살게하는 청각제(聽覺劑)였다.
간 비에 젖은 잎새 어디선가 맑은 소리를 틔우는 은행나무를 본다. 앞서가는 계절 따라 어김없이 그 자리에 피고질 나무는 자신은 낙엽되어 바수어지고 지면서도 도심의 아름다운 풍경이 되어준다. 그 숭고한 헌신을 보며 끝까지 마지막 가는 그의 뒷모습까지 애절한 목소리로 배웅하며 오열했던 매미의 소리 또한 들리는 듯하다. 마지막 오열같이 매미의 울음 소리는 문간방 초당에서 감잎으로 차를 달이고, 중풍에 쓰러져 누워계신 내 아버지의 시린 어깨가 눈물겨워함을 알렸지만, 나뭇가지 마다 별똥처럼 쏟아져 내리는 바람 소리에 날아버린 애절한 소리....지금까지 귀에 쟁쟁하기만 하다. 가을철 도심 바닥에 바람 따라 구르는 은행 잎을 보고 이 거리에서 계절은 끝이 아니라 또 다른 새로운 계절의 시작임을 알게된다.
이젠 바람 소리도, 매미 소리도 자취를 감추었다. 계절처럼 오고가는 길 모퉁이에 서서 제 모습을 찾으려고 애를 쓰는 은행나무는 힘없이 서있다. 칠월 칠석을 넘어서 추석 한가위 까지 울었던 매미는 절조와 기개를 품었다가 다시 싱싱한 한 그루 은행 나무를 피게할 청각제(聽覺劑)를 준비하고 있을 것이다.
2024년 10월 20일 바람 부는 날
웅포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