저는 위로 세 살 차이 나는 누나와 아래로 두 살 차이 나는 여동생이 있어요.
외아들인 저는 집에서 어릴 때부터 특혜 아닌 특혜를 받았죠.
어려운 살림살이였지만 한 달에 한번 아버지 월급날 아버지는 시장에서 통닭을 사가지고 오셨어요.
지금도 그 고소한 기름 냄새를 잊지 못해요.
그런데 형편이 넉넉하지 않다 보니 가족은 다섯인데 늘 닭은 한 마리뿐이었죠.
어머니는 다리 하나는 아버지께 뜯어 드리고 나머지 다리는 꼭 내게 주셨죠.
그러면 누나와 여동생은 늘 투정을 부렸죠.
“왜 맨 날 철이만 다리를 줘, 나도 먹고 싶은데.”
“이년들아, 니들은 시집가면 그만이지만 철이는 아들이잖아.”
아주 드물게 생일 케이크를 사 오는 날은 대부분 아들인 저의 생일이었죠.
“왜 철이만 생일을 해줘?”
“시끄러워 이년들아 딸년들은 시집가면 땡이야.”
그랬죠.
아들인 저는 늘 딸들에 비해 좋은 대접을 받았어요.
어머니는 외아들인 저를 늘 티 나게 이뻐했고 아버지도 티를 내지는 않았지만 늘 그런 공감대가 있었어요.
지금 돌아보면 본의 아니게 누나와 여동생에게 미안한 마음이 들어요.
예전에는 누나와 여동생이 서운해하면 “별 걸다 그러네”라고 생각했지만 부모가 되고 자식을 키우고 보니 (그것도 딸만 셋) 누나와 여동생이 얼마나 서운했고 한편으로는 평생 마음의 상처가 되었을까 미안한 마음이 들어요.
부모님의 행동이 내 본의는 아니었지만, 너무 늦긴 했지만 대신 사과하고 싶네요.
“누나, 그리고 동생아 내가 너무 미안해.”
만약 기회가 된다면 언젠가는 부모님께서도 이제라도 미안하다는 말씀을 할 기회가 있기를 소망해 봅니다.
누나와 여동생은 채워지지 않은 부족한 사랑과 애정에 얼마나 아팠을 까요.
물론 부모님 입장에서는 똑같이 사랑하셨겠지만 사소한 행동 하나하나가 누나와 여동생의 마음에 깊은 상처가 아니었을까요?
많은 장례식장에 가보면 아들들보다 딸들이 더 슬피 우는데 그건 아마도 채워지지 않은 사랑에 대한 한과 상처로 인한 눈물 아닐까 생각이 들어요.
이것은 마치 어릴 때 보육원에 버려진 아이가 평생 기억에 없는 부모를 그리워하는 것과 비슷한 것 아닐까요?
이런 딸에 대한 상처는 저에게도 남아있다는 걸 최근에야 알았어요.
저희 딸들은 아빠에게 무척 다정한 딸들이에요.
결혼한 큰딸은 시집가기 전까지도 잠자기 전에 늘 아빠 볼에 뽀뽀를 해주는 딸이었죠.
둘째 딸은 대학생인 지금도 아빠만 보면 안아달라고 성화를 부리고, 셋째 딸은 좀 덜하지만 역시 아빠에게 치대는 걸 좋아하죠.
그런데 저는 그게 소름 끼치고 싫었거든요.
아무리 내 딸이지만 다 큰 녀석들이 좀 징그럽고 어색해서 자꾸 피하곤 했죠.
"아 징그럽게 왜 이래!"
이런 저에게 딸들은 억지로 뽀뽀를 하곤 했어요.
참 이상하죠.
다른 집은 아빠가 딸들을 좋아해서 안아도 주고 뽀뽀도 해서 오히려 딸들이 불편해한다는 데 우리 집은 완전 거꾸로니까요.
저는 자라면서 단 한 번도 아버지나 어머니가 누나나 여동생을 안아 주는 걸 본적이 별로 없었죠.
그렇다 보니 아버지가 어떻게 딸들을 대해야 하는지 몰랐던 거예요.
우리 아버지가 그러셨던 것처럼 저도 딸들이 어색했죠.
오늘은 딸들에게 사과하고 싶네요.
“아빠가 더 꼭 안아주지 못하고 밀쳐내서 미안해, 아빠도 잘 몰라서 그랬어. 우리 딸들 하늘만큼 땅만큼 내 목숨만큼 사랑해.”
전 어쩌면 딸들이 늘 내 곁에 예쁘게 있는 것이 당연했는지도 몰라요.
당연한 것에 대한 감사가 없었나 봐요.
세상에서 가장 소중한 것은 당연한 것.
수년 전 어느 일요일.
갑자기 몸이 아파 구급차를 타고 대학병원 응급실에 간 적이 있었죠.
응급실 침대에 누워있는데 주위로 교통사고 환자, 낙상 환자, 화재로 인한 환자들이 피투성이가 돼서 마구 들어오는 거예요.
평소 일요일 같으면 아침에 말끔히 차려입고 온 가족이 교회 예배당을 가고 점심때는 맛있는 점심을 온 가족이 둘러앉아 먹었을 시간인데 그날 저는 응급실 침대에 누워있었죠.
다행히도 큰 병이 아니어서 그날 오후 늦게 집으로 돌아올 수 있었지만 평범하고 당연한 일상이 얼마나 소중한지 그날 알았죠.
세상에 당연한 건 없어요.
당연한 것이 가장 소중하고 행복한 것이란 걸 그때 알았죠.
강연에 가면 거기에 온 청중들에게 제가 묻곤 해요.
“행복하세요?”
이 갑작스러운 질문에 바로 대답하는 사람은 거의 없어요.
다들 생각을 하죠.
“오늘 아침에 남편과 부부싸움을 했으니 좀 불행한 것 같기도 하고...”
“어제 마트에서 반짝 세일하는데 너무 싸게 잘 사서 행복한 것 같기도 하고...”
“우리 애가 성적이 떨어져서 약간 불행한 것 같기도 하고...”
다들 이런 표정으로 저를 바라봐요.
그럼 제가 다시 묻죠.
“하루를 살면서 가족이든 남에게든 감사하다는 말을 몇 번이나 하세요?”
감사의 횟수만큼 사람은 행복해요.
삶의 모든 당연한 것에 감사하는 만큼 사람은 행복하죠.
행복해지고 싶다면 하루에 다섯 가지 감사를 매일 실천해 보세요.
저는 가족 단톡방에 매일 다섯 가지 감사를 써서 올리죠.
아내나 딸들은 이런 아빠를 보면 무슨 생각을 할까요?
돈이 많을수록 행복은 줄어들고
명예가 높을수록 불행하고
유명할수록 고독해지는 법
주위에 보면 너무나 성공하고 부유한 사람들이 자살을 하는 걸 보게 돼요.
돈을 많이 버는 것, 성공해서 유명해지고 명예가 많은 것은 살아가면서 얻게 되는 껍질일 뿐 알맹이가 아니에요.
가끔 뉴스에 경제적으로 어려워서 자살하는 경우도 있지만 가난이 원인이 아니에요.
가난이 문제가 아니라 가난한 마음이 문제죠.
가난하고 어려워서 자살을 한다면 아프리카에 사는 사람들은 다 자살했겠죠.
가난할수록 결핍이 많을수록 작은 것에도 감사가 많고 행복을 느끼죠.
예전에 보육원 봉사 활동을 가보면 어린아이들이 안아주는 걸 그렇게 좋아해요.
사랑이 부족한 아이들은.
아주 작은 사탕 하나에도 세상을 다 가진 표정으로 좋아해요.
그런데 부잣집 아이에게 사탕을 줘보세요.
땅에 던져버리죠.
부유함은 감사를 잊게 만드는 독약과 같아요.
슬프죠.
감사를 잃어버린다는 것은 행복을 잃어버리는 거니까요.
자 이제 저를 따라서 해 볼까요.
“고맙습니다.”
“감사합니다.”
그 앞에 “너~~~ 무”를 붙이면 더 멋지죠.
“너~~~ 무 고맙습니다.”
“너~~~ 무 감사합니다.”
어때요, 어렵지 않죠?
행복 정말 쉬운 거니까요.